제 167화. 양녕 대군과 수양 대군
[사관은 말한다.
치세의 절정에서 과감히 양위하고 물러나신 상왕 세종과, 상왕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보위에 오르사 청사에 길이 빛날 아름다운 업적을 세우신 우리 전하의 치세는 이날 어린 세자 저하의 흥겨운 운율 속에 이미 그 징조가 선명하였다.]
*****
“아바마마께서 춤을 추시기에 우리 아기씨도 춤을 추었다고?”
연회가 본격적으로 무르익으면서 밤이 깊어지자 먼저 협경당으로 돌아온 홍위가 윤서에게 올챙이 춤을 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춤, 나한테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근엄하기 짝이 없는 이향이 춤을 추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나 지켜볼 일이지만, 그보다 우리 홍위가 강사포에 원유관을 쓰고 패옥 소리 싸르락거리며 올챙이 율동을 하였을 그 귀여운 모습이 너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보고, 싶어요?”
“응, 보고 싶어. 우리 홍위가 귀엽게 춤을 추는 모습.”
홍위는 쑥스러운 듯 몸을 좀 꼬았지만, 윤서가 기대 가득한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살 때 윤서에게 배운 대로 허리에 손을 모으고 다리를 굽혔다폈다 하며 율동을 시작했다.
촛불 아래 붉은 강사포 자락은 부드럽게 펄럭이고, 작은 머리에 비해 조금 큰 원유관은 움직임에 따라 옆으로, 앞으로 기우는데 앙증맞기만 하던 세 살 때의 춤과 달리 다섯 살의 춤은 씩씩하고 늠름하였다.
윤서는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노래를 불러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 홍위가 쑥쑥 커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도 또 가르쳐 주어야겠네.’
그래서 이향처럼 훤칠한 청년이 된 홍위가 지금의 홍위처럼 귀여운 아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구장복과 강사포 자락을 나풀나풀 펄럭이며 상왕으로 물러나는 할아버지 이향을 위해 올챙이 춤을 추면,
그 장면은 또 얼마나 훈훈하게 흥겨울까.
생각만 해도 너무 흐뭇해서 저절로 입꼬리가 쑥 올라가는데,
율동을 마친 홍위가 윤서에게 와 폭 안겼다.
“어먼니, 금똥이는 잠드었어요?”
“응, 아까 광평 삼촌이 안아서 데려다주셨는데 힘들었는지 저녁 먹고 목욕시키자마자 잠들었어.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새해가 되자 다섯 살 형아가 되니까 이제 혼자 잘 수 있다고 마침 몸살이 나신 유모 이씨 부인을 사가로 돌아가시게 한 홍위였다. 의젓하게 굴기 위해 전처럼 폭 안기는 횟수가 많이 줄었는데 오늘은 꼭 안겨 있는 것을 보니,
“속상한 일이 있었군요. 무슨 일이에요?”
“···양녕 하아버지가, 금똥이를, 노여봤어요.”
“!”
“옛날에, 나도 노여봤어. 무서워요.”
양녕 대군, 그 개차반 늙은이가 감히 내 아이들을!
윤서는 홍위를 꽉 안았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왕과 세자의 고된 일정은 보지 않고 오늘 아바마마께서 쓰신 면류관이나 또 우리 홍위가 쓴 원유관만 부럽게 바라보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양녕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부러움과 선망 때문에 우리 세자 아기씨나 금똥이를 문득문득 무섭게 볼 때가 있을 거에요.”
부러움이 강해지면 원망이 되어 무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윤서는 홍위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시선은 우리 아기씨나 금똥이가 무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릇된 원망을 품고 있어 생겨나는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지나친 것 같으면 이 어머니한테 말씀하면 됩니다.”
“응! 자선이가 그앴는데, 음, 양녕 하아버지는 행동이 황음무도한 개차반이라서 세자에서 쫓겨났대. 그언데, ‘황음무도한 개차반’이 뭐에요?”
자선이 말조심하라고 좀 혼나야겠네.
윤서는 홍위의 원유관을 벗겨 가죽 보관함에 넣고 강사포를 벗겨 옷걸이에 걸면서 ‘황음무도한 개차반’은 세자답지 못한 품행을 말하는데 어린 아이가 쓰기 적절한 용어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홍위의 등을 토닥거려 재워주면서, 윤서는 요주의 감시 목록에 양녕 대군도 넣었다.
잊고 있었네.
원래 역사에서 안평 대군은 물론 영월로 유배된 홍위까지 죽여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던 대표적인 종친이 양녕 대군이었단 사실을.
*****
윤서의 경계 대상에 자신이 포함된 줄은 까맣게 모르는 양녕 대군은 연회가 파할 무렵 묵묵하게 술을 들이켜고 있던 수양 대군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내 거처로 가자. 내 새로 비파를 구했는데 소리가 그윽한 것이 네 옥피리 소리와 썩 잘 어울릴 것 같구나.”
주색잡기와 사냥에 능한 양녕 대군은 의외로 명필에 비파 연주를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무예와 사냥을 즐기면서 악기에 능한 수양 대군과 통하는 점이 있었다.
연회든 강무든 종친과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승마 솜씨든 피리 솜씨든 돋보이길 좋아하는 수양 대군은 오늘 연회에서 혹시 기회가 있을까 하여 품에 아끼는 옥피리를 넣어 왔었다.
그러나 연회는 시종일관 상왕과 신왕 위주로만 흘렀고 축하의 춤을 선보이는 자리조차 처음으로 춤을 춰보인 형님 전하와 어린 꼬맹이 세자가 좌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으니 피리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소외감에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수양 대군은 명례궁으로 돌아가도 아내가 죽어 썰렁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주저 없이 수양 대군을 따라갔다.
한강진 나루가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별장에 도착하니, 얼굴이 새초롬하게 고운 양녕 대군의 희첩이 다섯이나 나와 양녕 대군을 부축했다.
“······.”
여색을 썩 즐기지 않는 수양 대군으로서는 그닥 마음에 드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중 둘이 거문고와 가야금을 제법 탄다고 하여 동석하게 되었다.
양녕 대군은 정말로 비파에 피리를 맞춰 연주하러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비파를 품에 안고 드르르륵 현을 고르며 수양 대군에게 물었다.
“쌍화점 어떠냐?”
“좋습니다, 백부님.”
“얘야, 애심아, 네가 먼저 거문고를 뜯거라.”
애심이라 불린 아이가 먼저 술대를 들어 두둥 쌍화점의 도입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어 양녕 대군이 비파를 뜯기 시작하고, 수양 대군도 품에서 옥피리를 꺼내 입술에 대고 불기 시작했다.
수양 대군의 향비파는 소리가 그윽하고 맑아 일반 피리보다 묵직한 소리를 내는 수양 대군의 옥피리 소리와 정말 잘 어울렸다.
“청산은, 어떠냐?”
쌍화점이 끝나자 양녕 대군은 무학 대사의 스승 냐옹 선사가 지은 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법 많이 알려진 노래이기에 수양 대군도 묵묵히 양녕 대군의 음률에 맞춰 피리를 불었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오늘따라 냐옹 선사의 시가 수양 대군의 가슴을 후벼팠다.
형님께서 보위에 오르셨으니 정말로 탐욕을 벗고 바람같이 살아야 한다.
이런 씁쓸한 마음은 양녕 대군도 마찬가지였는지, 연주가 끝나자 희첩을 모두 내보내고 애심이만 남겼다.
“이 아이는 말을 못한다.”
애심이란 아이를 가리키며 불쑥 말한 양녕 대군이 주안상 위의 술잔을 거칠게 입에 털어놓고 수양 대군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폐세자하고 두 달 만에 부왕께선 보란 듯이 주상을 보위에 올리시고 오늘처럼 연회를 베풀고 직접 일어나서 신하들과 춤까지 추셨다. 그때 내 심정이 어떠하였을 것 같으냐?”
“···하지만 그 덕에 백부님께선 평생을 이리 즐기면서 사시지 않습니까? 얼굴도 여전히 수려하게 환하시지요. 상왕 전하의 옥안을 보소서. 시커멓게 색이 죽고 눈도 잘 보이지 않으셔서 안경이란 기물을 쓰지 않으시면 앞도 잘 못 보십니다.”
무슨 의도로 저런 말씀을 하는지 뻔히 짐작하면서도 수양 대군은 효자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자 양녕 대군이 수염을 쓸며 피식 웃었다.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을 빼앗기고 전하의 자비에 기대 살아야 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너도 곧 알게 되겠지. 번듯하게 처신하면 할수록 목숨 부지가 더 어려워지기에 팔도를 떠돌며 계집 속살이나 훑고 다녀야 하는 그런 신세 말이다.”
계집질이 정도를 넘어섰기에 폐세자되었으면서 양녕 대군은 교묘하게 마치 자신이 폐세자에 밀려나고 나서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난행을 즐긴다는 듯 포장하였다.
“······.”
그 본말전도를 모르지 않지만 처지가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하기에 수양 대군은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피리를 들어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고려 가요의 음률을 불었다.
연인을 보내는 처량한 심사가 옥피리의 구슬픈 선율을 타고 흐르자, 말은 못하나 귀가 예민한 애심이가 소리 없이 입을 벙싯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애첩의 이슬 같은 눈물을 닦아주며 양녕 대군이 혼잣말처럼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간에선 주상이 세상에 둘도 없이 우애를 가진 군주라 하지. 또한 오늘 보위에 오른 금상도 너와 같은 동복형제뿐 아니라 주상이 싸질러놓은 서자들까지 어찌나 살뜰하게 챙기는지 성군이 따로 없다고들 하더구나. 그런데, 유야. 그거 아느냐? 주상도 금상도 한 번도 아쉬워 본 적이 없느니. 가진 것을 빼앗겨 본 적이 없기에 그리 반듯하게 관대한 것이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뭐, 어때? 나야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자로 온 조선 팔도에 악명이 자자한데. 내가 이러한 말을 했단 사실이 새어나갈 것은 네 입밖에 없느니. 네가 고한다해도 주상은 허허 웃고 말겠지. 고아한 인품이거든.”
양녕 대군이 비열하게, 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너는 아니지 않느냐? 너도 이제 가지지 못한 자, 빼앗긴 자가 얼마나 치밀하게 원망할 수 있는지 절절하게 느낄 것이다. 이씨 왕조가 언제부터 장자 상속이 그리 번듯하게 이루어졌다고.”
“백부님!”
“태종도 다섯째였고, 주상도 셋째였어!”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오늘 일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수양 대군이 팽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러자 양녕 대군이 비파를 드르릉 뜯으며 노래하듯 소리쳤다.
“이 넓은 한양 땅에 무수히 지어놓은 그 많은 궁궐 중 하나를 너에게 주지 못해 바다를 떠돌게 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계집과 짐승을 쫓아 여기저기 떠돌아야 하는 것처럼, 너도 앞으로 출렁이는 물길 위를 떠돌겠지.”
수양 대군은 더 듣지 않고 방문을 잡았다.
“유야! 저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
방문을 열던 손길이 일순 느려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양녕 대군이 소리쳤다.
“주상과 금상은 빼앗겨본 적 없기에 늘 정도만 고집하지. 변칙적인 것을 대비할 줄 몰라. 명심하거라. 정도가 아니라 변칙이라는 것을. 평소엔 저들이 예상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납작 엎드려 개처럼 꼬리를 흔들다가, 단 한 순간, 태종께서 날 내치고 두 달 만에 주상을 왕으로 덜컥 세웠듯 그렇게 예고 없이, 단 한 번을 노려야 한다.”
수양 대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으핫핫핫핫” 광인처럼 웃는 양녕 대군의 웃음과, 뒤이어 “끄윽” 화살 맞은 짐승의 비명 같은 신음이 방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왕이 되지 못한 대군은 정녕 저리 살아야 하는가.
저리 살았기에 왕이 되지 못하고 폐세자 되었다는 사실을 어느새 잊고, 앞으로 정말로 물 위를 떠돌며 살아야 하는가 한스러워하며 수양 대군은 명례궁을 향해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