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65화 (165/255)

제 165화. 세종의 양위와 이향의 즉위 (2)

홍위가 윤서에게 금똥이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조르는 사이,

무엇이든 일단 입에 넣어 빨고 보는 구강기의 금똥이는 홍위 옆구리에 단 패옥의 옥구슬부터 덥썩 입에 물려 하였다.

조그만 입술이 구슬에 닿기 직전 금똥이를 휙 들어 올린 윤서는 홍위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종친 석에 자선이가 서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요. 금똥! 패옥의 구슬은 빠는 것이 아니에요!”

“으아아앙.”

윤서에게 한 소리 듣자 금똥이는 입으로만 우는 소리를 내며 홍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렇게 우는 소리를 내면 마음 약한 형아가 늘 봐주기 때문이다.

역시나 금똥이 우는 소리를 들은 홍위는,

“아이고, 어먼니! 왜 애느은!”

왜 애를 울리고 그러느냐고 입술을 비쭉 내밀며 금똥이를 향해 “헝아한테 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금똥이는 홍위에게 가겠다고 윤서 품에서 발버둥 쳤다.

윤서는 순간 코끝이 찡하게 매워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우리 홍위가 이제 나한테, 타박도 한다.’

그간 홍위는 윤서에게 대개는 다정하고 드물게 칭얼거리는 정도였다. 윤서가 워낙 마음을 다하는 것도 있지만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면 애정을 거둬갈까 본능적으로 두려워서 일종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협경당 한 지붕 아래 아침저녁으로 한 공간에서 잠들고 일어나고 같이 밥을 먹고, 금똥이가 때로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다가 단호히 “안 돼!” 혼이 나는 것을 보면서 홍위는 이제 알게 된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 떼를 쓸 수도 있고 그러다 혼이 날 수도 있지만, 혼이 난다고 해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홍위도 슬슬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안 든다고 표현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조르고 떼를 쓸 수 있는 진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세자가 되면 이향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기대 속에 엄격한 평가를 받겠지만, 그래도 여기 이 협경당 안에서만큼은 제 나이의 아이답게 살 수 있으리라.

감동이 뿌듯하게 밀려와 저절로 나오는 눈물을 한 손으로 스윽 닫고, 윤서는 대안을 제시했다.

“음, 그럼 이렇게 해요. 할마마마께 즉위 전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신 아바마마께서 창덕궁에서 곧 돌아오실 거에요. 그 전에 우리 장차의 세자 저하께선 종친석 맨 앞줄에 가서 서야 하니. 우리 희아 공주랑 나랑 우리 금똥이가 근정문 앞까지 함께 가는 거에요.”

윤서도 실은 보고 싶었다.

어제 내병조 병사와 금군만 도열해 있던 장면에 붉은색 술을 늘인 금색의 관을 쓰고 붉은색 조복에 허리에 후수와 패옥을 차고 옥으로 된 홀을 든 신하들이 빼곡하게 도열해 있는 모습을.

마침 협경당을 나서 좁은 골목만 가로지르면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뜰이 나오니 금똥이가 형을 배웅하러 간다는 구실을 내세우기도 좋다.

그리하여 일각(15분) 후.

붉은 강사포와 원유관에 검은 목화신을 신은 홍위가 작은 손에 홀을 모아쥐고 협경당 뜰을 가로질러 서쪽 정문으로 향했다.

홍위가 의젓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에 늘인 패옥의 옥구슬 소리가 싸르락 싸르락 울리고,

그럴 때마다 뒤에서 따라가는 윤서 품에 안긴 금똥이가 “아아, 아아!” 소리를 내며 원유관에 달린 색색 구슬을 잡아 보고 싶어 몸을 앞으로 숙이고 팔을 버둥거렸다.

“어머니가 힘이 세셔서 다행이에요.”

고운 분홍색 금박무늬 장삼을 입고 윤서 옆에서 걷는 희아가 금세라도 팔에서 빠져나갈 듯 버둥거리는 금똥이를 보며 속삭였다.

“금똥이도 힘이 세서. 날이 갈수록 형아가 하는 건 뭐든 다 따라 하려고 하니.”

“힘, 좋아! 요! 아기씨, 힘!”

윤서는 한숨을 쉬는데 버둥거리는 금똥이가 귀엽다고 뒤에서 매금이가 종알거렸다.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을 앞에는 붉은 시위 옷을 입은 병사들이 위엄 있게 도열해 있다.

이제 곧 창덕궁에서 동십자각을 향해 이향이 연을 타고 올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근정문을 들어가 뜰에 도열해 있어야 해서 홍위가 짧은 다리로 종종 걸어갈 때였다.

금관조복 차림으로 흥례문을 들어와 근정문으로 향하던 한 무리가 홍위를 보고 일제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어이쿠, 우리 조카 저하. 원유관에 강사포가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무리 중 하나가 허리를 펴며 홍위를 향해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그러자 홍위는 작은 어깨를 쭉 펴고 홀도 야무지게 두 손으로 잡아 배 앞에 쥐고 의젓하게 인사했다.

“광평 삼촌. 안녕하세요. 수복이도 잘! 있어요? 수양 삼촌, 강녕하십니까? 먼 바닷길! 항해에 노고가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평소 리을(ㄹ) 발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홍위가 딱딱 끊어서 책 읽듯 말하자, 수양 대군 옆에 서 있던 도원군이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래도 철이 많이 들어서 도원군은 이제 감히 세자가 될 홍위의 발음을 놀리지 않는다.

“세손 각하, 키가 많이 크셨네요. 각하의 염려 덕분에 이 삼촌, 항해 잘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수양 대군은 어린 조카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이번에는 윤서를 향해 깊게 허리를 굽혔다.

윤서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과 수양 대군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공식적으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는 친정 가문의 방납 비리에 상심하여 병사한 것으로 공표되었지만, 궐 소식에 밝은 이들을 입을 통해 실은 동궁의 후궁과 왕손에게 손을 쓴 죄로 자진을 강요받았다는 진실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윤씨의 죄상을 밝혀낸 이가 한강에서 세손의 목숨을 구한 적 있는 권 승휘란 사실도 함께 알려졌다.

그러니 이 사정을 아는 이들은 서로 원한을 쌓게 된 두 사람이 어떻게 인사를 나누는지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수양 대군은 허리를 굽힌 채 더없이 정중한 어조로 윤서에게 인사를 올렸다.

“장차의 중전마마께서도 강녕해 보이시니, 저의 마음이 참으로 좋습니다. 어린 아기씨도 참으로 활달하고 총명해 보이십니다.”

“항해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저도 기쁩니다.”

윤서도 살짝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허리를 펴니 품 안의 금똥이가 광평 대군을 향해 “다아, 다아!”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평소 광평 대군의 아들 수복이가 자주 협경당에 와 함께 놀기 때문에 광평 대군과 낯이 익어서였다.

“금똥이, 잘 있었니? 삼촌, 보고 싶었어?”

광평 대군이 웃으면서 금똥이를 귀여워하자 수양 대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광평 대군이 왜 이렇게 홍위와도, 금똥이와도 이리 가까운지 의아한 모먕이었다.

“광평 삼촌, 즉위식에 아기는 못 들!어, 가요?”

여전히 금똥이를 데리고 가고 싶은지 홍위가 광평 대군을 향해 물었다.

“우리! 금똥이도 아바마마 즉위하시는 거 보면, 좋아할! 것 같아요.”

“세자 저하는 어린 동생에게 전하의 즉위식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까?”

“예, 금똥이가 이런! 즉위식을 보려면, 한참 있어야 하니까. 제가 즉위할! 때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 보여주고 싶어요.”

세상에, 우리 홍위가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졸랐구나.

뭉클하게 감동하는 윤서의 눈에, 홍위의 원유관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훑는 수양 대군의 눈빛이 잡혔다. 자기가 써야 할 원유관을 마치 홍위가 빼앗아 쓰고 있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핥는 시선이었다.

“!”

그러나 수양 대군은 다음 순간 그 눈빛은 윤서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듯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곧 세자 저하가 되실 것이라 그런지 세손 각하께서 동생을 생각하시는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의젓하고 아름답습니다. 세손 조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음 즉위식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야 있을 것이니, 제가 어린 조카님을 안고 들어가지요. 곧 대군이 되실 신분이니 예법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정중하고 인자한 목소리였다.

주변의 사람들이 항해에서 돌아온 수양 대군이 예전의 과시적인 오만함을 벗고 매사 진중하게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를 따른다고 칭찬하는 말에 딱 부합하는 행동거지였다.

그러나 어린 아기는 진심을 꿰뚫어 보는 것일까.

금똥이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며 다가서는 수양 대군을 보자 갑자기 “으아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윤서의 품을 파고들었다. 평소 떼를 쓸 때 우는 가짜 울음이 아니라 정말로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울음이었다.

“하하, 형님께서 바닷바람에 얼굴이 시커멓게 거칠어져서 우리 금똥이 조카가 낯을 가리나 봅니다.”

광평 대군이 한순간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며 윤서 앞에 와 팔을 내밀었다.

“우리 장차의 세자 조카님이 그리도 우애 있게 동생을 챙기시는데, 장차의 신하가 되어 어찌 가만히 있을까요? 수복이랑 자주 놀아서 저는 낯이 익을 것이니, 제가 안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기저귀 채웠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거에요.”

윤서가 광평 대군에게 금똥이를 넘기자, 금똥이는 또 언제 울었냐는 듯 광평 대군의 목을 꽉 안고는, 광평 대군의 금관 옆으로 늘인 붉은 술을 신기한 듯 입으로 물려 하였다.

그러자 자선이가 나서서 광평 대군의 붉은 술을 짧게 뒤로 묶었다.

윤서는 일단 손을 모으고 수양 대군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금똥이가 한창 낯을 가릴 시기라서 결례를 하였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하하, 영민한 아이들이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하더군요. 우리 조카님도 형님과 형수님을 닮아 아주 영민하려나 보옵니다. 왕실의 홍복이지요.”

수양 대군은 대범하게 웃고 “저의 새 부인을 잘 가르쳐 주십시오.” 하며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 가요, 이제.”

원하던 대로 금똥이를 데려갈 수 있게 된 홍위가 홀을 다시 모아쥐고 의젓하게 앞장서고, 그 뒤를 신이 나서 까르르 웃으면서 금관의 비녀를 만지작거리는 금똥이를 안은 광평 대군이 따랐다.

“수양 삼촌이랑 도원군은 좀 변한 거 같아요.”

희아가 윤서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윤서는 도원군과 함께 광평 대군의 뒤를 걸어가는 수양 대군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변할 수밖에요. 큰 시련을 겪었으니.”

수양 대군과 윤씨는 아주 사이가 좋아 보였다.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던 부부도 배우자를 잃었을 때 수명이 휙 줄 정도로 극심한 심적인 타격을 받는다.

그러니 위험한 야망까지 공유하며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한 부인을 잃고 난 후, 원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이르게 이향이 즉위하는 모습을 보게 된 수양의 지금 심정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참담하고 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참담함을 어린 새 부인과 함께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길.

건강하게 보위에 오른 이향의 강건한 치하에서 맡은바 해양 무역의 개척을 순조롭게 수행하고, 훗날 해외 무역지 여러 곳에 우리 조선의 세력을 키워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해주길, 윤서는 기도했다.

윤서는 지금의 해양술로 호주는 당분간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주까지는 아니어도, 동남아 여러 곳에 정착해 뿌리를 내린 화교처럼 수양 대군이 농업 혁신으로 점점 불어날 조선 백성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제안하는 정도의 역할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외에 무역 거점 정착지를 늘리다 보면 홍위 시대에는 더욱 발전된 해양술로 호주까지 진출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수양 대군이 남몰래 품어온 야심을 원래 역사와 달리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는 길이었다.

******

[왕(王)은 말하노라. 태조께서 홍업(洪業)을 세우시고 태종께서 예(禮)가 바로 서고 악(樂)이 바로 갖추어지게 다듬으신 조선을 내가 이어받아 밤낮으로 삼가며 인애가 백성에 미치기를 힘써온 지 스물일곱 해가 되었다.]

장중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어도를 당당히 걸어 근정전 올라 이향이 어보를 받은 후.

이향이 다시 월대 위에 나와 서자, 도승지를 겸직한 예조판서 김종서가 세종의 양위 교서를 소리 높여 읽기 시작했다.

홀을 가슴에 쥔 모든 이들이, 심지어 광평 대군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면 금똥이까지 조용하게 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애민 군주의 양위 교서에 귀를 기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