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3화. 정 승휘와 후궁 봉작 문제 (2)
이향이 윤서의 귀에 속삭였다.
“다른 후궁들이 잠자리 문제를 들고나오면 홍가를 부르시오.”
“···홍 내관을요?”
“응, 날 오랫동안 보좌한 홍 내관이 대전 내관이 될 것이니. 홍 내관이 처리할 거요.”
윤서는 순간 중국 드라마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내관이 후궁 이름이 적힌 패를 들이밀면 황제가 그 중 하나를 골라 그날 시침을 들 후궁을 정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기분이 확 상해서, 이향의 젖은 가슴을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처음에는 이향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의기양양했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홍 내관이, 어떻게요?”
“홍 내관은 이렇게 말할 거요. ‘본래도 색욕이 없으셨던 우리 전하께서는 연일 이어지는 과다한 정무와 잦은 순행으로 더욱 고단하신지라 후궁의 처소에 들 기력이 없으십니다!’ 하고 말이오.”
아니, 이게 뭐야.
“그, 그럼, 저는요?”
“으응?”
“나는, 이제 겨우 육체 나이 스물인데······.”
워낙 부실(?)하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던데, 정말로 기력이 달리기 시작한 것인가. 눈만 마주치면 덮치던 이향이 요새 뜸해진 것도 실은······.
아래에서 부피를 키워가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혼돈에 빠진 윤서의 귀에 이향의 노여운 음성이 들렸다.
“아니, 부인! 내가 가면 늘 쓰러져 자고 있었으면서!”
“예?”
되묻는 윤서를 확 밀어낸 이향이 윤서의 눈을 들여다보며 화를 냈다.
“내 아무리 더듬거려도 눈을 못 뜨는데 어찌 지분거린단 말이오. 새벽에라도 안을라치면 금똥이가 옆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있지. 대체! 응?”
“아!”
“그러게 아바마마 일 좀 덜 받으라고 그리 일렀거늘.”
“······.”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지금 금똥이 동생도 최소 서넛은 더 만들어야 하고. 우리가 갈 길이 머오.”
이게 아닌데.
왜 갑자기 혼나는 모양새가 된 것인가.
그날 밤 윤서는 금똥이를 유모에게 안겨 보낸 후 늦도록 혼이 나야 했다.
****
정 승휘는 스물여덟 살로 정식으로 간택된 최고참 후궁이었다.
함께 승휘로 뽑혀 들어온 이들 중 현덕 빈은 홍위를 낳고 돌아가셨고, 홍 승휘는 지금 폐서인 되어 정릉 골짜기 보현암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셋 중 이향의 관심을 가장 적게 받은 후궁이기도 하였다.
원래 역사에서 이향의 즉위 시 똑같이 자식이 없는데도 홍 승휘가 종1품 귀인의 품계를 받을 때 정 승휘는 고작 정3품 소용의 품계를 받을 정도로 푸대접을 받았다.
친정아버지가 대사헌과 관찰사 등을 역임하는 조정의 중신으로 있는데도 이렇게 이향에게 대접을 못 받은 건 정 승휘가 친정아버지나 작은아버지 정창손처럼 고집스러운 ‘말빨’과 융통성 없는 ‘예법’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라고 윤서는 짐작한다.
첫 세자빈 휘빈 김씨가 박색하여 이향의 관심을 못 얻는다고 생각한 세종께서 두 번째 세자빈 봉씨와 그 뒤 들인 간택 후궁 셋 모두 용모를 중히 여겨 뽑았던지라 정 승휘도 미모가 상당하였다.
문제는 그 미모가 특유의 고집스럽고 자존심 강한 성격과 결합하여 ‘B 사감과 러브레터’의 B 사감처럼 무미하게 보인다는 데 있다.
일곱 살에 세자에 책봉된 이향은 위로는 자애로우나 완벽주의자인 부왕 세종에 아래로는 대단한 신하들에게 새벽부터 시달리고, 거처가 경복궁 내 자선당인지라 밤조차도 부왕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거수일투족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낮과 밤의 고단한 세월에서 돌아가신 현덕 빈은 푸근함으로, 홍 승휘는 특유의 고양이 같은 외모와 애교로 이향의 관심을 끈 반면, 정 승휘는 짧은 만남에서도 친정 가풍에 따라 여러 가지를 조언하려 들었다고 이향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세종에 필적하는 수준의 학식을 가진 이향 보기에는 그 조언이 어줍지 않아 보이기만 했던 것이니.
어찌 보면 정 승휘도 참 딱한 인사다.
지금도 윤서 앞에서 고작 보모 나인 출신으로 가문도 시원치 않은 어린 예비 중전 따위에게 내가 꿀릴 쏘냐 시위하듯 턱을 치켜들고 앉아 있다. 궐에서 여인의 권력은 첫째가 왕의 총애에서 둘째가 공식 품계에서 나온다는 기본 사실을 부러 무시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향의 여인으로 쓸모는 없다고 하나 예법에 밝은 후궁으로 쓰임새는 제법 많았으니, 윤서는 정 승휘의 홀로 높은 자부심에 알맞은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정 승휘가 일전에 말하였듯 예법에 밝으니 궐의 대소사를 맡아 감독해주시게. 가장 중요한 왕실 일로는 종묘와 선대 조상들께 제를 올리는 것이 있으나 이는 전하께서 예조와 함께 주관하실 일, 내명부 쪽에서는 각종 세시 명절과 귀빈 접대 연회가 아닌가. 시시철철 연회 음식에서부터 꽃 등의 장식, 귀빈들에 대한 답례 하사품 등을 격식에 맞게 정하는 것 말일세.”
“그런 중차대한 임무는 보통 빈이나 귀인의 봉작을 받아야 주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윤서의 말에 정 승휘는 삐딱하게 되물었다.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품계로 회유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원한다고 이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나중에 홍 내관이 잘 설명해 줄 것이니 윤서는 그 결례를 무시하고 본론을 이어갔다.
“귀빈 접대에 쓰이는 음식과 식기류에 예산이 많이 드네. 그런데도 한번 연회를 치르고 나면 귀한 그릇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져 손실이 심하다지. 정 승휘는 궁인들의 규율을 엄정히 세워 줄줄 새어나가는 예산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네.”
“권 승휘 마마님, 저는 학문과 예법에는 밝아도 그런 사소한 일에,”
“사소하나 중차대한 숫자 다루는 일에 자네가 약한 것을 내, 알아. 그래서 자네를 도와 예산을 짜고 집행하고 궁인들을 관리할 장번 내시를 하나 붙여주겠네. 허 장무!”
윤서가 정 승휘를 접견하는 장소는 협경당 내에서 서쪽 담벼락에 따로 작은 출입문을 가지고 세워진 널찍한 전각이었다. 여럿이 모여 회의하기 좋게 넓은 탁자와 의자가 있고, 커다란 종이를 걸고 붓으로 글씨를 써가며 발표할 수도 있는 걸개도 있었다.
윤서가 “허 장무!” 하고 부르자 “예, 마마!” 하고 그윽한 목소리로 답하고 들어온 이는 윤서의 왕비전 소속 종6품 상촉으로 대내외 문서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업무를 담당할 장무 내관 허희였다.
어릴 적 개에 물려 고자가 된 허희는 엄자치 밑에서 혹독하게 수련을 받은 이십 대 후반의 내관으로, 특히 숫자에 밝아 동궁전의 출납을 맡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모가 수려하였다.
전날 밤 윤서는 이향에게 박 상궁의 조직과 의녀 조직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전에 이향이 윤서에게 박 상궁의 조직을 없애라고 한 것은 권력이 두 곳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종께서 뒤로 물러나시며 이향은 국왕이 되고 윤서는 왕비가 되니 오히려 이향의 치세를 뒷받침할 정보 수집 조직이 필요해졌다.
뜨거운 시간 끝에 나른해진 여운을 즐기다가 말을 듣게 이향은 “부인의 베갯머리 송사 솜씨가 날로 절묘해지는군!” 감탄하고는,
“정보 조직에 엄자치를 넣어 무리가 없는지 도움을 받고, 모아들인 정보는 나와 공유하시오. 그리고 누굴 제거할 필요에 대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내 재가를 받고.”
조건을 달아 허락했다. 그리고 어지간한 일은 윤서의 재량에 따라 판단하고 실행하라 말하였다.
그 재량에 따른 실행 문제에 이향의 후궁들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작은 권 승휘는 올해를 넘기지 않고 왕실의 추문으로 번지지 않게 내보내는 것, 유 승휘의 은밀한 집필 행위를 보장해 주는 것 등은 이미 이향의 양해를 받았다.
그리고 장차 종1품 귀인으로 책봉할 정 승휘에게 내명부 행사의 막강한 관리 권한을 맡기면서 동시에 원래 역사에서 정씨 가문이 수양 대군의 정변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과거 때문에 동향을 살필 목적으로 붙이는 자가 바로 허희 장무 내관이었다.
“허 장무는 계산에 밝아 그간 동궁전의 재무를 담당하였네. 앞으로 중궁전이 주관하여 치르는 모든 행사에서 정 승휘, 아니 장차 정 귀인이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 전반을 도울 것이니 서로 잘 도와서 일을 해나가시게.”
허 장무가 접견실에 들어설 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정 승휘는 윤서가 허 장무를 소개하는 동안 빳빳하게 굳어진 자세로 앞만 응시하다가 ‘정 귀인’이란 말에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려 윤서를 응시하였다.
“왜, 허 장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가? 다른 조력자가 필요하신가?”
윤서가 묻자, 정 승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표정을 부드럽게 고쳤다.
“저를 귀인으로 책봉해 주신다니, 참으로 과분한 처사이옵니다. 그러나 또 생각하니 대외 일에 분주하신 중전을 보필해 왕실 내부의 일을 처리할 자가 오랜 궐 생활을 통해 여러 일을 배운 저 외에 달리 없는 사정을 또 제가 이해합니다. 중하게 써주시니 성심을 다하여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마마.”
“그래요. 본시도 예학에 밝은 데에다 중전마마께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으니 그 누구보다 잘 해내시리라 내 믿네.”
“예, 마마.”
들어올 때와 사뭇 달라진 우아하게 공손한 태도로 정 승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사흘 뒤 있을 우리 저하의 즉위식 연회부터 점검하는 것이 좋겠네. 양 귀인께서 마지막으로 전하의 즉위식까지는 챙기고 계시니, 정 승휘는 허 장무와 함께 양화당으로 가서 일의 진행을 배우고 필요한 문서 기록을 받아오기 바라네.”
“예, 그럼 이만 양화당으로 가보겠습니다.”
정 승휘가 의자에서 일어날 때, 뒤에 서 있던 허 장무가 의자를 빼주었다.
그 작은 배려에 정 승휘는 소녀처럼 새초롬하게 얼굴을 붉히며 허 장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앞서서 접견실을 나갔다.
“···행여 추문이, 되지 않을런지요?”
윤서 뒤에서 기둥처럼 서 있던 조 상궁이 물었다.
조 상궁은 제조상궁으로 올라설 것이나 기존의 제조상궁처럼 궐 전역의 궁인 관리를 맡는 대신 경복궁의 궁인 관리를 맡으면서 동시에 윤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역할도 겸하기로 하였다.
공노비의 수를 줄이다가 종내는 폐지하려는 국가 정책의 방향에 맞춰 궁인의 조직을 바꿔가는 은밀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리 쉽게 추문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네.”
정 승휘 같은 이들은 스스로 세운 원칙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며 주변 인물에게도 같은 원칙을 지킬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수려하고 친절한 허 장무에게 마음이 흔들려도 절대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까처럼 더 쌀쌀맞게 굴며 괴롭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허 장무를 괴롭히느라 예산을 빼돌려 뒷주머니를 차거나,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일을 꾸미거나 할 틈도 없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을 봐주지 않는 이향을 원망할 틈도 없을 것이고, 윤서에게 반감을 갖기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게 되겠지.
그것이 윤서가 이향과 엄자치에 대해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허 장무를 정 승휘에게 붙여준 이유였다.
*****
그리고 마침내 이향의 즉위식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