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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62화 (162/255)

제 162화. 정 승휘와 후궁 봉작 문제 (1)

정 승휘가 온 것은 이향이 즉위한 후 후궁 봉작 품계를 정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윤서가 세자빈이 되는 것이라면 이향의 애정 안에서 다른 후궁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다. 내명부의 수장은 중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소헌 왕후는 세종의 다른 후궁들과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하실 것이고, 경복궁에서는 명실상부 내명부의 수장이 될 윤서가 이향의 다른 후궁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향의 즉위에 맞춰 후궁들의 품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서 윤서는 다각도로 고심하며 안을 짜고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신왕의 치세에서 윤서는 이향의 심신을 세심하게 살필 아내이자, 어떤 상황에서든 홍위의 입지가 든든하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어머니여야 한다.

윤서는 먼저 박 상궁에게 논의했다.

제조상궁을 맡아달라는 윤서의 제의를 “그리되면 돈 버는 일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며 딱 잘라 거절한 박 상궁은 윤서 체제하의 경복궁에서 중궁전 지밀상궁을 맡기로 하고, 교태전의 행각 하나에 거처를 정했다.

이향의 기존 후궁들을 어떻게 대우할까 묻는 질문에 박 상궁은 이마부터 찡그렸다.

“세손 각하에 이미 금똥 아기씨도 있는데 다른 여인을 품으시면 내 속부터 뒤집어질 것 같소. 하지만 원체 여색을 밝히는 가계니, 원. 원경 왕후 계실 땐 하루도 궐이 조용할 날이 없었지요.”

윤서를 딸처럼 생각하는 박 상궁은 윤서보다 후궁의 존재 자체를 못마땅해하며 혀를 차다가 급기야는,

“저하를 꼬시는 년이 있으면 쓱싹 손을 써야지요.”

하고 매섭게 눈을 번득거려서 윤서의 계획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양 귀인은 또 입장이 달랐다.

그 자신이 승은 후궁 출신으로 종1품 귀인의 자리에 오른지라, 윤서가 후궁의 일을 의논하자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왕의 사랑을 다투는 후궁으로서의 삶보다 세 왕자의 어머니이자 홍위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동지로서 양 귀인은 냉철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금상 전하께서는 여러 여인을 쉴 새 없이 탐하시면서도 중전마마께 지극히 예를 다 하셨지요. 중전마마께서도 전하의 후궁을 너그러이 포용하셔서 그 권위가 절로 높아졌어요. 그러니 적당한 품계와 임무를 던져주고 절대 후궁과 총애를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아무리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후궁은 후궁일 뿐입니다.”

양 귀인은 슬며시 “신빈을 보세요. 그리 어여쁨을 받아도 중전마마 앞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지 않습니까?” 덧붙이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궁인 출신으로 왕자를 낳은 귀인에 이르렀어도 지아비를 여러 여인과 나누는 일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란 듯 한숨을 토로한 양 귀인은 냉정한 조언을 이어갔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점은 어떤 여인이 총애를 받더라도 저하의 마음이 그 여인의 소생에게 쏠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조 때에 벌어진 비극은 없어야 해요. 우리 세손 아기씨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 왕실을 위해서나, 후궁 소생이 지나치게 어심을 사는 일만은 무슨 수를 써서도 막아야 합니다!”

‘무슨 수’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가 들어 있을 것이다.

윤서는 또 중전마마를 찾아 고하였다.

한참 수양 대군의 재혼과 영응 대군의 혼사에 정신을 쏟고 계시는 소헌 왕후께선, 후궁의 품계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셨다.

“정 승휘의 집안이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예학에 밝다. 정 승휘의 부친이 대제학을 지내지 않으셨느냐? 윤서 너는 홍위와 금똥이를 돌보고 내수사의 재정을 총괄하며 여러 사업을 이끌고 학당을 세우는 일만으로도 분주할 것이니 정 승휘의 품계를 제일 높게 주어 내명부의 대소사를 맡기거라.”

나머지 유 승휘와 문 승휘, 권 승휘는 자식도 없으니 정3품 소용을 주고 정 승휘를 보조하게 하면 될 일이라고 하셨다.

의외로 잠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서 윤서도 모른 척하고 슬며시 일어나려는데, 소헌 왕후께서 문득 말씀하셨다.

“윤서야, 나중에 주상이 다른 여인에게서 후손을 보더라도 아이들은 손대지 말거라. 네가 아이들을 아끼는 것을 내 안다만, 그래도 다시 한번 다짐을 받자면, 왕손에 절대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된다! 약조하거라!”

“예, 중전마마.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윤서도 아이들에게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 혹여 나중에 성장하여 홍위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라면, 그건 홍위가 처리할 것이다.

윤서가 진지하게 약조를 드리자, 소헌 왕후께서 윤서를 보며 슬쩍 웃으셨다.

“전하께서도 상왕께서 승하하시기 전까지는 여색을 밝히지 않으셨다.”

“!”

“향이도 나중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럴 경우에도 꼴사납게 후궁과 총애를 다투지 말고, 어여뻐하는 여인이 있거든 더욱 잘해주거라. 투기한다고 해야 체면만 구기지 소용이 없어. 온통 여인이 널려 있는 게 궁 아니냐?”

“···예, 중전마마.”

윤서가 느릿느릿 내키지 않는 대답을 올리자, 소헌 왕후께서 하핫, 크게 웃으셨다.

“그래도 이젠 중전 안 한다는 황당한 소리는 안 하는구나.”

“···우리 세손 아기씨가 있는데요.”

“그럼. 홍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전 자리는 꼭 쥐고 있어야 하느니. 그리고 아들 두셋은 더 낳아야 중전 자리도 더 공고히 할 수 있으니, 노력하거라.”

어머나.

시어머니께서 잠자리를 말씀하시다니.

윤서가 화라락 얼굴을 붉혔더니 소헌 왕후는 “금똥이까지 낳고도 소녀처럼 그리 부끄러움을 타누.” 하고 혀를 차셨다.

종합하자면 중전께서는 이향의 잠자리를 다른 후궁과 나누라는 명은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명확히 하신 것이다.

“중전마마, 차차 궁녀 제도를 손보려 합니다.”

알현한 김에 윤서는 박 상궁, 조 상궁과 함께 세우고 있는 궁녀 조직 개편안을 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안건에 대해서는 소헌 왕후께서 단호히 고개를 흔드셨을 뿐 아니라 슬쩍 최 상궁을 바라보셨다.

눈치 빠른 최 상궁이 바깥 문가에 선 궁녀들까지 모두 물리고 나서야 소헌 왕후는 윤서를 가까이 불러 앉힌 후 인자한 왕비의 얼굴을 싹 지우고 말씀하셨다.

“그건 차차, 향이 치세가 안정기에 들고 홍위가 능히 대업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을 때 추진하거라. 궁녀들이 일평생 혼인도 못하고 궐에서 지내는 삶이 불쌍해만 보이느냐? 아니다. 저들은 어쩌면 궐의 주인이 자신들이라고, 왕족은 궁인들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어. 이 왕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바로 사악한 마음을 품은 궁녀와 내관이다.”

윤서는 역사에서 홍위의 궐 밖 유숙을 노출하고 수양 대군의 난에 협력한 궁인 조직을 개편할 계획이었다.

이에 대해 중전께선 그 문제의식에는 동의하나 철저히 준비하여 시행하란 명을 내리신 것이었다.

“예, 중전마마.”

윤서는 중전의 말씀을 가슴 깊게 새기고, 협경당으로 돌아오면서 지난 제석 나례에서 “성현의 말씀에 따라 마땅히 저희 후궁과 나눠야 할 임무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하고 요구한 정 승휘에게 답할 말을 생각했다.

그때 윤서가 “정씨 가문 전체의 명운을 걸고 잘 생각해서 말씀하세요! 그것이 꿈꾼다고 하여 과연 손에 쥘 수 있는 임무인지, 오래, 신중하게.” 하고 말하였을 때, 정 승휘는 결연히 답하였었다.

“소첩의 부친께서는 일찍이 맡은 바 임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심으로 전하의 총애를 받으셨고, 대사헌을 지내시며 이 나라 조선의 학풍을 성현의 도리에 맞게 세우셨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해보아도 제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임무를 요구한다고 해서, 우리 가문이나 부친의 명성에 누가 될 일은 없습니다!”

윤서의 위협적인 경고에도 정 승휘는 눈물을 흘리며 “현숙한 여인은 투기하지 않는다”란 여인의 덕목을 고집하며 이향과의 잠자리 배분을 요구하고 나섰다.

중전마마까지 두루두루 의견을 종합해 결론을 내려보면,

이향의 잠자리에 대해 윤서가 나서서 정 승휘나 다른 후궁에게 “너희와는 전하의 머리카락 하나도 나눌 수 없어!” 하고 대거리를 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능력에 맞게 품계를 나누어주고 공평하게 내명부 일을 배분하면 될 일이다.

그리하여 윤서는 후궁 품계를 정해 정 승휘를 부르기 전, 잠자리의 실질적인 주관자 이향의 의견을 최종 확인하기로 하였다.

왕이 되어 공식적으로 강녕전에 머물 이향이 윤서가 아이들과 함께 머무는 협경당으로 오지 않고 다른 후궁의 처소로 간다고 하면, 혹은 강녕전에서 수발을 드는 지밀나인을 안는다고 하면,

윤서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밤이 늦도록 일하다 자정이 다 되어서 협경당에 와 털썩 쓰러져 자던 이향이 오랜만에 일찍, 해시(밤 9시) 경에 돌아온 날이었다.

윤서는 협경당을 개축하면서 침전 옆에 여러 무늬의 도자기 타일을 구워서 붙인 목욕탕을 새로 짓게 하였다.

종기가 났는지 잘 살필 목적으로 널찍하게 만든 목욕탕에 피부에 좋은 뽕나무 뿌리, 복숭아 나뭇가지, 국화 등을 넣어 끓인 목욕물을 가득 채우게 한 후 이향의 목욕 시중을 들며 윤서는 벼르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실록에서 봤는데, 저하께서 보위에 오른 후 홍 승휘는 종1품 귀인에 책봉되었고, 정 승휘와 다른 후궁들은 모두 종3품 소용의 품계를 받았어요. 홍 승휘는 지금 폐서인 되어 보현암 비구니가 되었으니 열외고, 다른 후궁들의 품계는 어찌할까요?”

머리카락에 은목서 향 비누를 칠해 거품을 내며 묻자, 눈을 감고 윤서의 손길을 음미하고 있던 이향이 눈을 떴다.

“부인이 다른 여인을 입에 담는 것은 처음인데.”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들어 있다.

“그간은 저도 그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그러하다.

윤서는 그간 아무리 배타적인 사랑을 받아 금똥이를 낳았다고 해도 자신이 이향의 많은 후궁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다른 여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의식적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중전은 내명부를 관장하는 자리이고, 그러니 저하의 후궁에게 적당한 직위와 임무를 주어 함께 왕실 일을 해나가야지요.”

“그래서, 이제 나도 나눌 생각인 것이오? 머리카락 한 올도 나눌 수 없다더니?”

이 사람이 진짜!

윤서는 순간 이향의 긴 머리카락을 콱 잡아당겨 한 웅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대신 고된 정무로 딱딱하게 굳어진 승모근을 꽉 눌렀다.

“아야! 아프게 꼬집는 것을 보니 그럴 마음은 여전히 없는 것이로군.”

“꼬집는 것이 아니라 뭉친 근육을 푸는 거예요. 여길 풀면 머리가 개운해지니까.”

“아니, 아니오, 부인. 평소와 달리 힘이 너무 세다니까. 아야!”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해서, 윤서는 비로소 이향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정말로, 모든 일에 대범하게 굴면서도 이 문제만큼은 머리가 하얗게 굳어진다.

“어마마마께 의논을 드려 각자 잘 할 수 있는 일에 맞춰 품계를 줘요. 부인은 학당과 내수사 일과 우리 아이들 키우는 일만으로도 분주할 터이니.”

“···예.”

어째서 이런 처지가 된 것이냐 한탄하며 힘없이 대답했더니, 이향이 윤서의 손을 확 당겨 목욕탕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윤서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내가 다른 여인을 안는 일이 생기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

말만 들어도 벌써 가슴에 커다란 칼이 쑥 박히는 것 같은 고통에 윤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윤서는 세 아이의 엄마이니.

“계속 열심히 중전 역할을 할 거에요. 우리 희아와 홍위와 금똥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하지만,”

이런 불쾌한 이야기를 또 하고 싶진 않기에 윤서는 눈을 떠 이향의 눈을 직시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처럼 온몸과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는 못할 거에요.”

“그렇겠지. 당신은 그러한 사람이니까.”

익히 예상한 대답이라는 듯 이향은 윤서를 끌어당겨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이어 말했다.

“다른 후궁들이 잠자리 문제를 들고 나오면,”

습기를 머금은 이향의 음성이 윤서의 고막에 웅웅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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