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1화. 수양 대군의 한 (2)
“지위가 높은 자가 낮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익괘가 되고, 아래의 것들을 취해 자신에게 이롭게 하면 덜어냄을 뜻하는 손괘가 됩니다. 이는 성을 쌓아 올릴 때 흙을 아래로 두껍게 쌓으면 그 성의 모양새가 안정되고 반대로 욕심을 부려 흙을 위로 더 높이면 종국엔 위태롭게 무너지게 됨을 말하는 것으로, 위에 있는 자일수록 덜어냄으로써 더함을 늘 고심해야 한다는 뜻이옵니다.”
“잘 이해하였구나, 이유!”
세종께선 벼락같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럼 너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덜어내야 하겠느냐!”
“아, 아바마마!”
“고하거라!”
기어이 답을 들으시겠다는 듯 전하께서 수양 대군을 사정없이 몰아붙이셨다.
신하들이 경서 몇 줄을 인용하며 편협한 의견을 고수할 때 전하께서 사정 봐주지 않고 파고들어 스스로 오류를 깨닫게 하시는 문답법이었다.
추위에 얼었던 몸을 데우기 위해 화급히 마셨던 몇 잔의 독한 술기운이 얼굴로 쏠리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수양 대군은 입안의 여린 살을 콱 깨물어 정신을 깨우고, 공손히 대답을 올렸다.
“소자는, 대군이란 특권에 안주하는 마음을 덜어내야 하옵니다.”
“또!”
“학문을 경시하고 육신의 평안함을 탐하려는 게으름을,”
“또!”
“음률과 사냥을 즐기는,”
“또!”
“······.”
수양 대군은 고개를 들어 부왕을 바라보았다.
늘 자애로우시던 부왕께서 어찌 저렇게 엄하신 표정으로 노엽게 캐물으시는가. 겨울의 거친 바다를 항해하며 황동과 초석을 구해온 내게, 왜!
그러나 수양 대군 또한 세종의 아들. 지금 이 순간에 올리는 답변이 앞으로의 운명을 좌우할 것임을 직감하였다.
그리하여 수양은 처음으로 의식 저 밑으로 꾹꾹 묻어 놓은 진실 한자락을 꺼냈다.
“소자, 마음속 원망을 덜어내야 하옵니다.”
“어떤, 원망이냐?”
“조강지처를 잃게 된, 원망이옵니다.”
“네 처는 왜 죽게 되었느냐?”
“······.”
“왜 죽게 되었느냐!”
송곳 같은 추궁이셨다.
수양 대군은 스스로 기만하던 거짓을 깨워 눈물로 진실을 고하였다.
“···감히, 왕손을, 해하려, 하였기에, 마땅히, 죽어야 하였습니다.”
“맞다! 네 처는 감히 이 나라 국본의 후궁과 그 소생을 해치는 사특한 술수를 썼기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은 것이니라.”
처의 잘못을 똑바로 고하는 아들의 눈물 앞에서 세종의 날카로움이 한풀 무뎌졌다.
“또한 네가 오늘 살아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네 형의 우애 덕이다. 아내의 사특함을 방조한 너의 불온을 네 형이 애써 용서하였기에 네가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을 절대 잊지 말지니!”
“···예, 아바마마. 소자, 형님 저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유야. 내 지난 일은 묻지 않으마. 하지만 두 번은 봐주지 않겠다.”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 없던 이향이 엄하게 일렀다. 정말로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터였다.
수양은 형님 저하 앞에 엎드려 다짐하였다;
“예, 형님. 감히 불온한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새 아내는 엄히 단속하겠습니다. 저 또한 행동거지를 근신하며 형님께 아우의 예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좋다!”
수양 대군의 다짐을 단단히 얻고 나서야 평소의 자애로운 부왕의 모습을 되찾으신 세종께서 서탁 위에 단정하게 접어두었던 커다란 종이를 펼치셨다. 그리고 수양 대군을 향해 손짓하셨다.
“유야. 이리 와 이 지도를 보거라.”
지도는 태종 때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윤서가 바친 세계 지도를 합쳐 새로이 그린 세계 지도였다.
지도를 본 수양 대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항해하면서 목격한 섬들의 위치가 상당히 정확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바마마! 여기가 유구국이고, 소자는 여기 이 작은 섬들을 거쳐 여기 여송(루손 섬)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곳 여송에는 복건 출신 중국인들이 많이 살아서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사온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잘남을 과시하길 즐겨하는 것이 평소의 버릇,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수양 대군은 떠벌떠벌 항해를 통해 알게 된 지식을 상세히 풀어놓았다.
수양은 이곳이 저 멀리 회회국과 천축국의 상인들이 일본까지 오가는 중간 기착지이고, 또한 복건성 출신 중국인들이 일본의 여러 상인과 힘을 합쳐 때로 왜구로 돌변하는 거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고하였다.
“여기서 제가 돌아오게 된 것이, 서신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천축국까지는 중간에 기착할 섬이 거의 없어 여기, 육지를 따라 항해해야 하기에 시일이 너무 걸리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일단 이곳에서 천축국의 상인에게 소량이나마 초석을 구입하였고, 그리고, 아바마마! 형님!”
드디어 초석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고하여 공을 확실히 인정받을 생각에 들떠 수양 대군이 전하를 부를 때였다.
“아, 초석! 수양 형님. 혹시 초석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리 혹시 들으셨습니까?”
난데없이 광평 대군이 툭 끼어들어 초를 쳤다.
“···으응!?”
“석탄은 아주 오래 전 초목이 깊은 흙 속에 묻혀 압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초석도 지붕의 기운이 얽혀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초석 광산 주변의 어떤 것들이 모여 생겨나는 것으로 추정되기에 금성이 지금 커다란 초석 광산이 있는 산동 반도로 가고 있어요.”
“금성이, 산동을?”
“예, 형님. 형님께서도 초석에 관해 들으신 바가 있습니까?”
“······.”
수양 대군은 말없이 향 좋은 술을 한 모금 털어 넣었다. 술맛이 더럽게 썼다.
“천축국의 초석 광산은 그냥 땅에서 긁어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도 높은 양질의 초석이 끝도 없이 나오게 된다 하옵지요. 그런데 복건 출신 상인 하나에게 은을 몇 덩이 건네고 들은 바로는 염초는 분변을 이용해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해적질에 이따금 쓰는 화약을 그럭저럭 똥 밭을 만들어 생산해 낸다고 하였습니다.”
“오오, 그것참 일리가 있구나!”
이향의 눈이 반짝거렸다.
“염초를 채취하는 곳이 주로 처마 밑이나 변소 근처가 아니더냐? 사람들이 주로 소변을 보거나 요강을 버리는 곳이 그곳이니.”
“하하, 어차피 지금 집집마다 더럽게 길에 버리고 있는 똥오줌 무더기를 취토군을 시켜 모아서 거름을 만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거름 밭과 염초 밭을 나란히 만들면 되겠네요.”
“염초는 마른 흙을 긁어 구워내니 거름 밭처럼 질척하면 되지 않을 것이다. 분변을 부은 흙을 건조하여 하얀 가루가 생겨나게 해야겠지.”
“그러합니다, 형님. 아, 그러고 보니, 형님 저하! 아바마마!”
언제부터 광평이 저리 형님과 아바마마와 격의 없이 활달하게 의견을 나누었지?
어째서 이 자리를 안평도 임영도 아니고 광평이 턱 차지하고 앉아서 형님의 오른팔이 된 것처럼 저리 구는 것이냐.
수양 대군은 무언가 불길한 마음이 스멀스멀 들었다.
“한양의 길이 온통 똥오줌 천지가 아닙니까? 장마가 지면 길 위에 늘어붙은 똥오줌이 청계천과 우물로 흘러 들어가 물이 다 짤 지경인데요!”
“오오, 성분!”
“예, 저하! 성분! 똥오줌을 이루는 성분이 길에도 많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광평이 아주 훌륭한 생각을 해냈구나. 당장 내일부터 마른 땅을 골라 살살 걷어 구워보도록 하여라.”
전하와 형님, 광평은 ‘성분’이라는 말을 주술처럼 외우며 신이 나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수양만 소외된 채 우두커니 앉게 된 것이었다.
“유야, 수양아! 여기 좀 보거라. 네가 다녀온 여송 밑으로 이렇게 섬들이 이어지고 이 밑에 큰 섬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들었느냐?”
갑자기 아바마마께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수양 대군은 아바마마의 다정함이 평소와 달리 기쁘지 않았다.
“이 비옥한 섬에는 캥거루라고, 뱃속에 새끼를 넣고 다니는 희한한 짐승이 살고 있다지. 이곳까지 장차 여기, 유럽에 사는 얼굴이 하얗고 눈이 파란 인간들이 배를 타고 와 정착할 것이란다.”
“···예에.”
“나는 우리 조선도 여기에 한 번 진출하여 보았으면 좋겠구나.”
“···예에?”
“당장은 어렵겠지. 그러나 앞으로 우리 향이의 치세에서는 네가 열심히 개척하는 항로를 따라 우리 백성들도 여송과 유구, 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종국에는 여기까지 진출하면 좋겠구나.”
“···그 말씀은?”
“그래, 유야.”
세자 형님이 수려한 얼굴에 인자한 웃음을 가득 띠고 수양 대군을 바라보았다.
“수양 네가 앞으로 우리 조선의 해양 개척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 바닷길을 개척하는 중차대한 임무 말이다. 내 너의 항해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당장은 한양에 머물며 한강에 얼음이 풀리면 범선이라 하여, 노를 젓지 않고 바람의 힘으로 항해하는 배를 만들어 시험하는 것을 맡아 진행하거라.”
염초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공으로 병조에서 중책을 맡아 한명회가 가 있는 북방으로 진출하려던 수양의 야심찬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길가의 흙을 채취하여 염초를 구워보고, 또 분변을 수거하여 똥밭과 거름 밭을 만들 계획에 들떠 계신 전하와 세자 저하, 광평 대군 사이에서 수양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내며 마음 깊은 곳의 야심을 덜어내야(損) 하였다.
그나마 당분간 한양에 머물며 ‘범선’이라는 것을 시험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수양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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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모님, 얘가 제 동생 금똥이옵니다. 아직 말!은 자 못해요.”
협경당 윤서의 침전 안, 홍위가 머리가 허연 노부인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서 윤서 품에 안긴 금똥이를 가리켜 보였다.
세자빈이 된 귀한 딸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낸 후 깊은 슬픔이 주름으로 올올이 얼굴에 새겨진 노부인이 금똥이를 보며 홀홀 웃어 보이고, 다시 윤서를 찬찬히 살폈다.
현덕 빈 권씨의 친모 해령부부인 최씨였다.
중전 책봉을 앞두고 윤서가 권씨 가문의 양녀로 입적하게 되는 일을 된 것을 처리하기 위해 합덕에서 여러 날에 걸쳐 상경하여 협경당에 들른 부부인은 어릴 적부터 거둬 기른 먼 친척 아이가 딸의 뒤를 이어 중전에 오른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충직하나 맹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똑똑해져 세손의 보모 나인이 되었다는 소식도 신기하였는데, 이제 중전이라니!
그리고 또 양녀라니!
“네가, 아니지, 장차 중전마마가 되실 승휘 마마님이 제 딸로 입적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오나, 혹여라도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늘 근심이옵니다.”
조심스럽게 예를 다하는 부부인을 뵙는 윤서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부부인은 말하자면 윤서의 20대 조상님이시다. 족보에서 이름으로나 뵙던 조상님을 실제 마주하고, 또 그의 양딸이 되는 현실은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윤서는 금똥이를 안은 채 다시 허리를 굽히며 답례의 인사를 올렸다.
“저의 친모가 재가하신 후 오갈 데 없어진 저를 거둬 길러주시고 또 본방 나인으로 궐에 보내주신 은혜 진실로 감사하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마음은 정말로 고우셨지요.”
‘머리는 나빴지만.’이란 말을 생략하고 부부인은 윤서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제가 빈 마마를 보내고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겠단 정도로 늘 근심이었는데, 권 승휘께서 중전이 되신다니 우리 세손 아기씨도, 군주 자가도 더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금똥 아기씨는 우리 세손 아기씨 어렸을 적과 아주 판박이네요.”
“그내요? 금똥이가 저앙 닮았어요? 눈나는 제가 훠씬 더 얌전한 아기였대요. 금똥이는 잠깐도 가만히 있지 않아요.”
홍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똥이가 홍위 곁으로 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매금아!”
윤서는 매금이를 불러 홍위와 금똥이를 맡겼다.
늘 몸으로 최선을 다해주는 매금이를 보자 금똥이가 “마아! 마아!” 하며 반기고, 홍위도 금똥이와 매금이와 앞뜰 연못에서 썰매놀이 할 생각에 싱글벙글 소리쳤다.
“외함머니! 어먼니랑 맛씀 나누세요! 저는 마당에서 금똥이앙 놀고 들어오께요.”
아이들이 우다다 나간 뒤, 부부인께서 기어이 눈물을 주루룩 흘리셨다.
“우리 세손 아기씨게서 정말로 밝아지셨네요. 덕분입니다.”
“저, 그, 서신으로 부탁드린 사안 말씀입니다.”
“걱정 마세요. 이미 자신이에게도 말해 놓았습니다. 초당이 제법 넓어 두 분 생활하기 불편하지 않을 것이에요.”
윤서는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권가의 친어머니와 그의 의붓여동생의 거처를 고심 끝에 해령부부인의 거처로 마련한 정릉 쪽 기와집으로 함께 정할 수 있는지를 부탁한 참이었다.
그편이 친모에게 박정하다는 세간의 평을 미리 예방하고, 그리고 불순한 짓을 하지 못하게 경고하기에 최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부인께선 흔쾌히 수락하시고 미리 거처까지 손을 보아 놓으셨다.
해령부부인은 사방을 살피더니, 윤서에게 가까이 다가앉아 속삭였다.
“홍 승휘가 없는 것은 잘 되었으나, 정 승휘 또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옵니다. 빈께서 생전에 두 사람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였는데, 홍 승휘는 오히려 수가 빤하였고 정 승휘는 음험하게 뒷공작을 잘한다고 하였지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밖에서 조 상궁이 고하였다.
“마마, 정 승휘가 뵙기를 청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