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60화 (160/255)

제 160화. 수양 대군의 한 (1)

오랜 선상 생활을 마치고 겨우 육지에 올라 가장 안락하다는 궐에서 호화로운 금침을 깔고 자게 되었는데도 수양 대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웠다 앉았다 뒤척거렸다.

속에서 활활, 오장육부에 불이 붙은 듯 울화가 끓어올랐다.

울분은 강령포에 내리는 순간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으면 며칠 전부터 윤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온갖 음식과 술을 준비해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령포에는 고작 새 아내로 거론 중인 윤희의 집안 사내 몇몇이 나와 있을 뿐 선왕 태종의 사위 윤씨들이나 세종의 딸 정현 옹주의 남편 윤사로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확의 가문 사람들이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와 너무 다른 풍경에 새삼 부인의 빈자리가 통곡이 치밀도록 한스러웠다.

“얼마 전 제석 나례가 열렸을 때 중전마마께서 불온한 발언을 하였다며 옹주 자가들께 근신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바람에 부군되시는 부마들께옵서도 덩달아 몸을 사리고 계시옵지요. 또한 정현 옹주께옵선 부쩍 협경당의 권 승휘와 교류가 잦으시다고 하옵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섬겨온 명례궁 총괄 내관 한이조가 남들 귀에 안 들리도록 한껏 낮춘 목소리로 ‘권 승휘’를 말할 때 굵은 주름 속 백태 낀 눈동자를 번득거렸다. 일평생 모셔온 윗전의 안위가 권 승휘 손에 무너졌고 그에 따라 자신의 처지도 덩달아 추락하고 있다는 분노였다.

그러나 태조 시절에 궐에 들어와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과 태평성대 금상 전하의 치세를 살아온 한이조는 대세를 읽을 줄 알았다.

“자가, 지금은 엎드리소서. 저 말만 봐도 세자 저하의 치세가 얼마나 강건할지 보이지 않습니까?”

한이조가 수양 대군이 타고 갈 말을 가리켜 보였다. 유달리 잘 잡힌 근육에 풍성한 검은색 털은 흑요석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명마였다.

“세자 저하께서 자가께 하사하시는 말이옵니다. 금년 원단에 북방 여진의 여러 부족이 바친 최상급 말 중 한 놈이옵니다. 두창 예방 침과 앞으로 세워 줄 학당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식이옵지요.”

그러니까 한이조는 지금 북방의 근심거리였던 여진족조차 자발적으로 굽히고 들어오는 형세에 대세를 거스르려는 야심을 드러내지 말라는 충언이었다.

“자네······.”

수양 대군은 늙은 내관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홀로 사가에 나가서 의탁해 있을 때도, 다 커서 궐에 돌아왔을 때도, 봉작과 궁을 받아 부인과 일가를 이루었을 때도, 한결같이 곁을 지키던 이였다.

“···알겠네. 자네가, 참으로 고마우이.”

길게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욕망과 분노를 품고 있는지 공유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2월이 가까워 오고 있다곤 하나 서해를 건너온 바람은 여전히 뼈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실어 온 모든 물품을 일단 내수사의 창고로 옮기게.”

수양 대군은 세상의 비정함과 그 와중에도 여전히 곁을 지키는 이들의 충심을 곱씹으며 배에 실어 온 물자를 모두 우마차에 옮겨 운반해 오란 지시를 한이조에게 내린 후 곧바로 세자가 내린 말을 달려 궐로 향했다.

쉴 새 없이 궐에 달려오는 길도 그닥 유쾌하지 않았다.

배의 항해를 실질적으로 책임진 선원들도, 또 지금 수양 대군을 호위하는 다섯의 병사도 모두 한양의 수륙군 출신이었다.

수륙군은 한강 일대를 지키며 물과 뭍에서 모두 빼어난 전투 능력을 선보이는 집단으로, 특히 지난 여름 한강에서 수영과 선상 모의 전투를 통해 달라진 수군 역량을 선보인 집단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종의 귀양으로 유구국을 거쳐 천축국까지 초석과 황동을 구하기 위해 항해하는 수양 대군에게 결코 무례하지 않았고, 유구를 지나 무수히 많은 섬을 지나쳐 가는 동안 물을 구하기 위해 잠시 들른 작은 섬에서 독을 바른 화살이 비처럼 쏟아질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나 충성을 바쳐야 할 상관으로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저들의 태도에서 수양 대군은 감옥처럼 갑갑하고 서러웠다.

‘대체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

새삼 치미는 울분에 형님이 하사한 말을 마구 채찍으로 내리치며 분풀이를 하였더니, 검은 말은 더욱 힘차게, 지치지도 않고 남대문까지 내쳐 달려 수양 대군의 속을 더욱 뒤집어놓았다.

더 억장이 무너지게 한 것은 아들 도원군의 비루함이었다.

짙은 어둠을 관솔로 환하게 밝힌 광화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바로 궐문이 열리고 대전 내관 조창의가 등롱을 높이 든 무리와 함께 마중하고 있었다.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께옵서 세자 저하와 함께 강녕전에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탐욕스러웠던 전균과 달리 속을 알 수 없이 정중하기만 한 조창의의 뒤를 따라 강녕전에 들었다.

안마루에 서서 조창의가 안에 자신의 도착을 알렸을 때.

나인 둘이 문을 밀어 여는 것과 동시에 비단 치맛자락이 사르락 빠르게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백단향 짙은 향기가 훅 코끝에 달려들며 어마마마께서 와락, 자신을 안으셨다.

“유야, 유야.”

아내를 잃은 후 처음 느껴보는 사람의 따스함이었다.

수양 대군은 저도 모르게 “어마마마!”를 외치며 아이처럼 후흑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어머니 품속에서 서러움을 풀어낸 뒤 고개를 들어보니, 상석에 앉으신 아바마마께서 무연히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런데.

늘 엄격하나 자애로우시던 아바마마의 눈빛에는 등을 서늘하게 하는 한 줄기 한기가 들어 있었다.

“어마마마, 유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셨으니 이제 다시 자리에 앉으시지요. 유야, 어서 앞으로 가 아바마마께 예를 갖추거라.”

어느새 다가온 형님 저하가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하며 어마마마를 부축해 상석으로 돌아갔다.

수양 대군 이유는 부모님께 네 번의 절을 올려 예를 갖춘 후에야 강녕전에 들어 있는 이가 세 명 더 있음을 알아챘다.

형님 저하 옆으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이는 아우 광평 대군, 그리고 자신의 아들 여덟 살 도원군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절을 올린 바로 옆 구석에 두 손을 모은 채 석상처럼 서 있는 여인이 하나가 있었다. 침전의 부드러운 불빛 속에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입매가!

“부, 부인!”

수양 대군은 저도 모르게 여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섬섬옥수, 백옥처럼 흰 여인의 손은 늘 따스한 온기를 가졌던 부인의 손과 달리 싸늘하기만 하였고, 놀란 듯 응시하는 눈빛은 지나치게 맑고 투명했다.

“!”

이제야 이 여인이 아까 강령포에서 한이조에게 들은 윤씨 소저, 죽은 아내의 5촌 조카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 미안하다.”

“···아니옵니다.”

여인은, 아니 여인이라 하기엔 아직도 앳된 소녀가 슬쩍 손을 빼며 수줍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앉거라, 앉아. 어떠하냐? 아주 많이 닮지 않았느냐? 마음씨도 얼마나 따스한지 예분이도 아주 잘 따른다. 윤서가 홍위와 희아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처럼 예분이와 여기 현동이도 아주 잘 돌봐줄 것이야.”

어마마마께서 기대에 찬 목소리로 수양을 보며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위로는커녕 칼처럼 수양 대군의 가슴을 찔렀다.

광평 옆에 서 있는 아들의 몰골이 너무 비루했기 때문이다.

아이답지 않은 오만함마저 왕재(王才)를 타고난 것처럼 눈이 부시게 빛을 내던 아들이었다. 그러했던 아들이 불과 몇 달 만에 제 아비를 보고도 선뜻 달려와 안기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왕실 어른들 눈치를 살피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억장이, 또 무너진다.

“현동아, 이리, 아비한테 오려무나.”

수양 대군은 비로소 달려와 말없이 도포 자락 안으로 얼굴을 파묻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은 채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현동이는 세 살배기 아이처럼 아비의 목을 감은 채 안겨 있었다.

아들의 풀죽은 모습이 예전 세손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자 지금의 아들처럼 어미를 모른 채 비 맞은 사슴처럼 발발 떨던 어린 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오만하던 아들보다 더 당당하게 빛을 내던 모습도 덩달아 떠올랐다.

권가 그 천한 나인의 품에서!

“곧 중전이 되실 형수님께선 어째 아니 보이십니다.”

그래서 기어이 권가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재워야 해서. 안부 전해 달라고 하였다.”

조선의 지엄한 세자이면서도 여염의 사내처럼 아내는 아이를 재우느라 건너오지 못하였다 말하는 형님 저하를 보며, 수양은 또 타는 듯한 원한을 느꼈다.

그 여인이 등장하면서 목석처럼 완벽한 세자이기만 하던 형님은 얼마나 여유 있게 당당한 사내가 되었는가. 그 여인이 등장하면서 비루 먹은 개 같던 그 꼬맹이는 또 얼마나 찬란하게 피어났던가.

그런 여인이 내게도!

수양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그림처럼 앉은 소녀를 훑었다.

저 아이도 그 여인처럼 내 아이들을 목숨을 다해 아낄 것인가.

형님을 바라보는 그 여인의 눈길 속에 담긴 따스함과 농염함으로 그들의 밤이 어떠할지 남몰래 상상하게 만드는 그러한 강렬한 애정으로 저 아이도 나를 연모할 것인가.

강렬한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열여섯 소녀도 고개를 돌려 수양을 보았다. 새카만 눈동자를 떨면서도 어린 여인은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단단히 결의를 담은 눈동자가 수줍게 시선을 얽어오자 수양 대군은 한 줄기 따스한 희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랫동안 거친 숨결의 욕망을 나눠 품 안의 현동과 딸 아이를 만들고, 보위를 향한 자신의 은밀한 야망을 힘써 뒷받침해 온 아내의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있으리란 확신은 아직 주지 못했다.

그렇게 끓어오르는 원망 속에 한 줄기 희망을 본 순간이 지나고,

어마마마는 윤 소저와 아들 현동을 데리고 중궁전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강녕전에는 전하와 세자, 광평 대군과 수양 대군만 남았다.

수라간에서 정성껏 준비해 올린 온반과 전약, 산적 등을 앞에 두고 술잔을 나누며 항해 길에서 겪은 모험을 고한 후,

수양 대군이 내심 회심차게 준비한 ‘똥’ 이야기를 올리려 할 때였다.

의미를 해득할 수 없는 한기 한 줄기를 여전히 눈에 담으신 아바마마께서 먼저 하문하셨다.

“유야, 내가 네게 서신으로 물은 주역의 마흔두 번째 괘 풍뢰익(風雷益) 괘의 뜻을 연구하였더냐?”

온갖 경서와 주역의 뜻까지 깊게 연구하신 아바마마나, 그 아바마마께 직접 주역을 배운 형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수양도 나름 주역을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전하께서 먼 이국에 머물고 있는 자신에게 대전 내관을 보내 그 뜻을 하문하신 것이 일종의 경고라는 것을 알기에 수양은 순진한 아들과 충성스러운 신하의 얼굴로 공손히 고하였다.

“풍뢰익의 익(益)괘는 바로 앞 마흔한 번째 산택손(山澤損)의 손(損) 괘를 뒤집은 모양새로, 덜어내야만 비로소 더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소자에게 익(益)의 의미보다 오히려 산택손의 손(損)의 뜻을 곱씹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옵니까?”

“맞다, 유야. 잘 이해하였구나. 그러면 내가 네게 무엇을 덜어내길 원하는지도 고하여라.”

추궁하시는 전하의 음성이 서릿발처럼 차가워 수양 대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아바마마. 유가 찬바람 속 먼 길을 달려와 이제 좀 따스하게 속을 데우는데 너무 엄격하게 하문하지 마옵소서. 아바마마께서 익괘를 물으실 때 손괘의 뜻까지 음미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물음을 통해 아바마마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어심을, 유도 잘 알아들었을 것이옵니다.”

하고 세자가 위로하여, 이유는 더욱 속이 꼬이고 말았다.

그리하여 수양은 전하께서 원하시는 답을 툭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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