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9화. 홍위와 사촌 이준과, 똥
“좋은 사람 같아요?”
“···응?”
“윤씨 소저, 어때 보였는지 궁금해서요.”
윤서와 함께 협경당으로 돌아오던 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서는 때마침 얼어붙은 한강을 넘어 한양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수양 대군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종께서도 원래 역사 속의 비극을 짐작하신 지금, 수양 대군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실질적인 세제(世弟) 대접을 받으면서 이향에게 계속 자손이 없으면 아들 도원군이라도 기어이 보위에 올릴 꿈을 함께 꾸던 부인을 잃고 먼 바다의 항해를 거쳐 되돌아온 지금.
눈이 맑은 열여섯 소녀를 다시 부인으로 맞게 된 그는 혜민국에서 잠시 함께 일할 때 내보였던 그 지독한 콤플렉스, 완벽한 세자의 전형인 형과 학문과 예술에 빼어나 조선의 상류층 전반과 중국 사신마저 매료시키는 동생 안평 대군 사이에서 키워온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세종과 이향이 만들 새 조선에 기여할 것인가.
“윤씨 소저는, 무척 부담감을 느끼는 듯 보였어요.”
윤서는 아직 열 살인 소녀에게 복잡한 어른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였지만 이미 복잡한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동생의 안위를 근심해 온 당찬 소녀에게 짐작한 바를 털어놓았다.
수양 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가장 꽃을 피우게 된 가문이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청주 한씨와 세조의 부인을 비롯하여 여러 왕비를 배출한 파평 윤씨 가문이다.
전하를 비롯해 거의 모든 이들이 점술 등을 통해 미래를 짐작하는 술법이 크게 유행하고 있으니, 요 몇 년 새 고초를 겪으면서 윤씨 가문에서도 윤 소저를 통해 다시 수양 대군과 혼맥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윤 소저는 가문의 기대를 받고 있는 데다가 5촌 종고모님의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까지 지고 있으니, 아직 어린 소녀로서 두렵겠지요.”
“···하지만 어머니도 열여덟에 아바마마의 후궁이 되셨잖아요.”
하지만 그때 속 나이는 서른이었어요, 공주 아가씨!
“전 어릴 적부터 궐에서 나인으로 굴렀잖아요. 게다가 우리 홍위와 자가의 절대적인 애정을 받고 있고요. 사랑을 확신하는 이들은 두려움 없이 용감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이다음에 자가도 아이를 낳게 되면 무조건 많이, 절대적으로 다정하게 사랑해줘야 해요.”
왕가의 혼사는 여염보다 일찍 결정되는 편이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광평 대군과 평안 대군을 잃지 않게 되신 소헌 왕후도 건재하시니 희아도 원래 역사보다 일찍 혼사를 올리게 되겠지.
역사와 현실이 겹칠 때마다 습관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윤서는 희아의 손을 잡고 협경당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와하하하! 옆으 때여야 한다니까!”
“때이고 있어요! 소이 좀 치지마요. 귀 따가워, 죽겠네!”
“지면, 그 아기 고양이 나한테 주기오 한 거, 잊지 마!”
“안 져요, 안 져! 난, 한 번도, 안! 져!”
협경당을 넓히면서 낚시 놀이 좋아하는 홍위를 위해 뜰 한가운데에 얇고 넓게 연못을 파고 물을 채웠더니 홍위가 또래 친우 하나를 데려와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팽이를 치며 노는 중이었다.
두 꼬마는 똑같이 ‘리을(ㄹ)’ 발음도 제대로 못 하는 말로도 서로 투덕거리고, 연못 가장자리엔 매금이가 금똥이를 안고 지켜보고, 홍위의 내관 자선이는 혹시라도 팽이 채의 끝이 홍위의 몸을 스치기라도 할까 언제든 뛰어들 자세로 바로 옆에서 감시 중이었다.
‘3월부터 세손 강서원이 세자 시강원으로 재편되면서 배동도 비슷한 또래의 다양한 계층 아이들로 바꾸기로 하였는데.’
기존의 세손 강서원은 천자문을 떼고 소학을 읽기 시작한 홍위의 학문 수준에 맞춰 수양 대군의 장남 도원군, 정의 공주의 장남 안여달, 신숙주의 차남 신면 등 홍위보다 서너 살 위까지를 배동으로 구성했었다. 그러나 학문의 수준은 맞지만 승마나 격구, 활쏘기를 할 때 신체 능력의 차이가 너무 나는 단점이 농후했다.
게다가 전국의 학당이 양민뿐 아니라 천민 중 빼어난 아이들에게까지 문호를 차차 개방하기로 결정되면서, 이향은 새로 꾸려지는 세자 시강원도 나이는 위아래 한 살 차이까지, 그리고 종친과 조정 관료뿐 아니라 무인 가문에서까지 다양한 아이들을 배동으로 뽑기로 결정하였다. 일종의 왕실 남학당 같은 기구가 되는 것이다.
‘저 아이가 새로운 배동 중 한 명으로 결정된 임영 대군의 둘째 아들 이준이구나.’
임영 대군이 탄광 개발을 감독하기 위해 속초로 떠나면서 부인 최씨도 함께 따라갔다. 그 바람에 홍위의 세손 강서원 배동이었던 형 오선군과 함께 한양에 쓸쓸히 남게 된 이준은 형이 세손 강서원에 올 때 함께 수업에 참석하면서 동갑인 홍위와 유달리 친해졌다.
아명이 계동인 이준은 곧 세자가 될 세손을 상대로도 봐주는 법 없이 매서운 눈길로 팽이를 노려보며 채를 팽팽 힘차게 휘둘렀다.
‘홍위가 누굴 데려와 저렇게 즐겁게 논 적이 없었는데.’
그간 홍위의 공식 거처는 이향의 공식 거처인 자선당의 서온돌이었다.
윤서가 보모 나인으로 함께 머물 땐 홍위도 자선당을 꺼려하지 않았지만, 승휘로 후궁 품계를 받아 협경당에 머물게 되면서 홍위는 자선당에서 떨어져 자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낮에는 주로 금똥이와 윤서의 침전에 머물고, 잘 때는 협경당 안 작은 전각으로 건너가 유모 이씨 부인과 잠을 잤다.
그렇게 거처가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배동 중 몇몇과 친해졌어도 한 번도 자선당으로도 협경당으로도 따로 데려오는 법이 없었는데.
‘넓어진 협경당에 거처를 정식으로 가지게 되니 친구를 데려오는구나.’
이렇게 경복궁이 넓은데도, 원하기만 하면 어느 전각이든 다 가질 수 있는데도.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이 함께 한 담벼락 안에 모여 사는 공식적인 거처가 생기고 나서야 우리 홍위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친구를 데려올 여유를 느끼는 것이다.
문득 양 귀인의 거처 작은 연못에서 낚시 놀이를 하던 중 불현듯 들이닥친 도원군 무리에게 머리를 맞고 “아나저, 아나저.” 울먹거리며 안기던 첫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 몸으로 품에 안겨 서럽게 떨던 세 살 꼬마 모습과 오늘 얼어붙은 연못에서 저리 즐겁게 깔깔거리는 홍위의 모습이 겹치면서, 코끝이 찡한 감동으로 붉어졌다.
이전의 삶에서 상담을 하러 온 내담자 중 몇몇 어머니는 직장 생활의 힘겨움으로 심각한 우울증을 토로하시는 중에도 “그래도 우리 아이와 함께 했던 몇몇 순간의 행복이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을 힘이 되어 주는 것 같아요.” 하고 문득 배시시 웃으시는 경우가 많았다.
‘내게도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새털처럼 많은 행복한 순간 중 하나로 선명하게 남겠구나. 힘들 때마다 더욱 열심히 삶을 꾸려갈 원동력이 되겠구나.’
윤서가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이는데, 옆에서 희아가 계동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팽이는 저렇게 무조건 세게 치면 안 되는데. 강약으로 힘을 조절하며 채 끝이 팽이의 옆면 중 어딜 때릴지 계산이 필요한데.”
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동이의 팽이가 채의 힘을 못 이겨 팽그르 굴러 연못 밖으로 튕겨 나갔다.
“와하하! 거 봐. 또 나아갔다! 금똥아, 헝아가 또 이겼다!”
“허아, 허아, 아바바! 아바!”
신난 홍위에 금똥이도 매금이 품에서 덩달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뜻 모를 말을 옹알거리고.
“아우! 아우! 홧 쏘기는 내가, 훠씬 자하잖아요! 격구도 훠어씬 자하고!”
계동이는 진 것이 분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홍위는 짓궂게 빙글거리며 친구를 계속 놀렸다.
“그애도! 팽이는 내가, 이겨! 아기 고양이도, 내 꺼야!”
“아우! 진짜, 이깟 팽이이!”
곧 세자가 될 홍위에게 저렇게 격 없이 성질을 마구 내는 계동이를 보니, 둘은 신분을 떠나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지존의 삶을 살아간다 하여도 마음을 터놓을 친우 하나는 있어야 한다.
윤서는 활짝 웃으며 둘을 불렀다.
“세손 아기씨! 계동 아기씨! 출출하지 않으세요? 군밤 구워 줄까요? 공주에서 진상 올라온 씨알 굵은 밤이 있어요!”
“어먼니! 까배기앙 팟 도너츠 해 주세요! 계동이도 좋아핫 거에요!”
“안녕하세요, 마마님. 까배기가, 머에요?”
아직 어려서 찹쌀 반죽해 기름에 튀겨주는 꽈배기랑 팟 소를 넣고 튀긴 도너츠를 제일 좋아하는 홍위와, 처음 들어본 꽈배기가 무엇인지 스스럼없이 묻는 계동이의 밝은 목소리에,
수양 대군의 귀환 소식이 가져온 한 줄기 불안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
“수양 대군은 어땠어요?”
이날 이향은 아주 늦게, 괘종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도 반 시진은 더 지나서 술 냄새를 짙게 풍기며 협경당으로 왔다.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불과 백 미터 조금 넘는 거리를 연을 타고 올 지경이었다.
윤서는 홍 내관의 부축을 받아 방에 들어서는 이향을 보료 위에 앉히고, 머리에 쓴 익선관을 벗긴 후 미리 기별을 받고 만들어준 숙취 해소 탕약을 먹이며 물었다.
“윤 소저는 마음에 들어 하던가요?”
수양 대군은 궐문이 닫힌 지도 한참 지난 해시(밤 9시) 넘어서야 특별 허락을 받아 궐 안에 들어와 곧장 세종과 소헌 왕후를 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궁전에 머물러 있는 윤 소저와, 세자인 이향도 참석한 알현 자리였다.
윤서도 참석하란 명이 있으셨지만, 중전마마께 오늘은 제가 없는 편이 수양 대군의 마음에 더 좋을 것이란 이유로 사양의 말씀을 올렸다.
“별로, 쳐다보지 않았어요. 곧, 내보내고, 아바마마와 셋이, 여러, 이야기를 나눴어요.”
술에 취한 이향은 혀가 꼬이지는 않는데 말이 느려졌다.
윤서는 푸푸 거칠게 숨을 쉬는 이향의 붉은 용포를 벗기고, 안 두루마기도 벗긴 후, 상투를 풀어내고 망건을 벗겼다.
“누워서 주무세요.”
윤서가 권하는데, 이향은 휘청거리면서도 눕는 대신 눈을 떠 윤서를 바라보았다.
“똥, 이었어.”
“···으응?”
“똥, 이었어요, 부인.”
“뭐가요? 수양 대군과의 재회가요?”
깊은 밤에 난데없이 ‘똥’을 말하는 이향의 뜻을 몰라 윤서가 묻는데, 이향이 와락 윤서를 당겨 안고 어깨에 턱을 척 올려놓으며 껄껄 웃었다.
이분, 이렇게 취한 모습 처음 보는데.
“저하, 주무시고 내일 말씀하세요.”
윤서가 밀어내는데도 이향은 더욱 세게 당겨 안으며 중얼거렸다.
“부인이 말한, 그, 거름 밭에 똥 섞는, 것처럼,”
“네?”
“똥 밭, 이오, 똥 밭.”
“······?”
“유가, 알아 왔어요. 우리 금성 대군은, 괜히 갔어. 고생스럽게. 파도도, 세다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러다 윤서는 문득 금성 대군이 며칠 전 초석 광산을 둘러보기 위해 북쪽 선천에 가 배를 타고 산동 반도로 떠났던 사실을 떠올렸다.
“염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똥 밭을 만드는 거라고요?”
“맞, 소. 유가, 들었다고. 저기, 멀리, 천축국의 상인들한테. 하하, 이제, 마음껏, 화약을 만들어서, 포를 쏠 수 있소. 우리 임영도, 금성도, 얼마나, 좋아, 할까.”
사내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