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8화. 수양 대군의 새 아내 (2)
“오! 장차의 중전이 오셨군요.”
중궁전에 들었더니 중전마마께서 가장 상석에 앉아 계시고 동쪽 편에는 태종의 소생인 정순 공주와 경정 공주, 그리고 세종의 소생인 정의 공주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서쪽 편에 양녕 대군의 부인 수성 부부인과 효령 대군의 부인 예성 부부인, 태종의 후궁인 권 의빈, 세종의 후궁인 김 신빈, 양 귀인이 앉아 있었다.
명실상부 왕실 내외명부 최고의 여인들만 모여 있는 자리다.
특히 지난 제석 나례 연에서 ‘첩년에게 홀린 자들이 정실부인을 몰아내고’ 운운하며 중전마마의 권위에 도전했던 옹주들은 초대받지 못하였다는 데에서 한층 높아진 소헌 왕후의 권위를 엿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왕실의 최고 어르신만 모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윤서에게도 처음이었다. 그간은 왕실 연회 등에서 저 밑 승휘와 함께 있거나, 지난번 제석 나례와 신년 하례 연회에서는 여러 종친과 후궁, 옹주와 공주들까지 함께 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리는 명목상 수양 대군의 새 부인을 서보는 자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승휘에서 단숨에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 윤서가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윤서가 조심스레 고하고 희아와 함께 손을 모아 절을 올리자 엎드린 등 위로 매서운 관찰의 눈길이 쏟아졌다.
윤씨 소저는 아직 들어 있지 않았다. 들어오는 걸음걸이부터 절을 올리는 품새, 인사 올리고 답하는 목소리 등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다 꼼꼼히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늦게 들어오도록 시간을 잡아놓은 것이다.
“윤서야, 희아야. 저기 정의 공주 옆으로 앉거라.”
절을 올리자 소헌 왕후께서 자리를 동쪽 편의 공주 옆으로 잡아주셨다.
원래라면 선왕과 금상 전하의 후궁들이 앉아 있는 서쪽 편의 말석에 가서 앉아야 하지만, 중전마마께서 윤서의 권위를 세워주신 것이었다.
왕실의 일은 앉는 자리 하나에도 이토록 세심하게 위계가 정해져 있었다.
윤서는 그간의 부단한 연습으로 절을 올린 후 부축 없이도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윤서가 흠잡을 데 없이 차분하게 일어나 정의 공주 옆에 마련된 자리에 우아하게 앉자 매의 눈으로 지켜보시던 어르신들이 만족스럽게 “으흠”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보모 나인 시절 윤서가 얼마나 힘만 세고 투박했는지 잘 아는 양 귀인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윤서에게 소리 없이 웃어 보이셨다.
양 귀인은 표정이 아주 밝았다. 그간 신빈이 총애를 받으면서 덩달아 계양군 등 신빈의 소생 왕자들이 세종의 총애를 두터이 받았는데, 근자 들어 세종께서 부쩍 한남군 등 양 귀인의 소생을 중이 쓰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총애를 덜 받게 된 김 신빈의 얼굴은 좀 야위고 초췌했다.
‘업보로다’
윤서가 신빈을 보며 그리 생각하는데, 태종의 소생 둘째 딸인 경정 공주가 윤서에게 하문하였다.
“아직 중전 책봉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그냥 편하게 묻겠네. 협경당을 넓혀서 평창 군주와 세손 아기씨도 함께 거하기로 하였다 들었네. 장차 공주가 될 군주와 세자가 될 세손의 거처를 따로 두지 않겠다는 결정은 자네가 지었다는 그 <육아보감>에 따른 것인가?”
“예, 공주 자가. 세손 아기씨의 연치가 이제 막 다섯 살이 되신 터라 아직 긴밀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군주 자가께서도 하가하실 때까지 함께 지내시며 동기간의 정을 도탑게 나누는 것이 장차의 육아를 배우는 데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구먼. 나는 또 왕손의 안위가 근심이라 그러한 줄 알았지. 동궁에 오래도록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어졌다가 겨우 자네가 잇지 않았는가?”
말씀이 의미심장하셨다.
오늘 이 자리, 수양 대군의 두 번째 부인을 선보게 된 자리가 결국 윤씨가 동궁전의 왕손에게 손을 쓴 것을 잡아내 제거함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었다. 또한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중전이신 소헌 왕후는 매번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은근한 질책이기도 하였다.
경정 공주의 두 번째 사위 김중엄이 이향의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의 오라버니였던 까닭에, 휘빈 김씨가 폐빈이 되면서 둘째 사위의 벼슬길도 함께 막힌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궁전의 분위기가 단숨에 무거워지며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윤서는 답을 올리려다가, 경정 공주의 말씀이 향한 곳이 자신이 아니라 중전마마를 향하신 터라 고개를 돌려 소헌 왕후를 바라보았다.
소헌 왕후께서도 윤서를 보셨다. 눈이 마주치자 소헌 왕후는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시고는 정순 공주에게 덤덤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경정 공주. 그간 동궁에 세자빈 자리가 비어 있어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지요. 다행히 제 목숨보다 세손을 더 아끼는 우리 권 승휘가 동궁을 책임진 이래 불미스러운 일들이 사라지고 우리 세손도 한결 총명해지고 의젓해졌으니, 내가 이제야 큰며느리 복을 누립니다. 이제 작은 며느리 복도 보기 위해 이 자리가 마련된 것 아니겠습니까?”
“······!”
새로 중전이 될 권 승휘가 알아서 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새로 선을 보게 될 윤씨 소저나 잘 살피라는 뜻이었다.
늘 공손하던 소헌 왕후가 대차게 각을 세우며 말문을 막자 경정 공주는 일순 움찔하며 입매를 굳혔다.
“경정 공주 자가, 우리 둘 다 과거의 과오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 함께 잘 살펴보시지요. 공주 자가의 안목을 믿겠습니다.”
사위 가문을 잘못 본 공주나, 세자빈 가문을 잘못 본 자신이나 같은 처지니 앞으로 잘하자는 말로 소헌 왕후께서 달래신 후에야 경정 공주는 굳어진 입매를 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윤서를 살피고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하였다.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제가 관상을 좀 봅니다. 권 승휘는 눈빛이 맑고 콧등이 날렵하면서도 코의 볼은 보기 좋게 도톰하니 인복도 재물복도 많을 인상이지요. 또 입술은 도톰하고 입매가 단정하니 중전마마처럼 다복하게 다산할 상입니다.”
“오, 정말 그러고 보니 권 승휘가 중전마마의 코와 인중을 빼닮았습니다. 앞으로 여기 경복궁에 그 발발거리고 기어 다니며 이 늙은이한테도 덥석덥석 뽀뽀해 주는 금똥이 같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하겠어요!”
경정 공주가 윤서를 인정하고, 이제까지 꾹 입을 다물고 계셨던 왕실의 최고 어르신 정순 공주께서 맞장구를 치시자 중궁전의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아휴, 인정받은 것은 좋지만, 금똥이 낳은 지 이제 겨우 8개월인데.’
소헌 왕후처럼 더 많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공공연히 확인받은 윤서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타고난 왕족인 태종 소생의 두 공주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나서야 혼인으로 왕족에 편입된 웃어른들이 비로소 말문을 여셨다.
양녕 대군의 부인 수성 부부인이 새해 들어 한껏 소녀티가 완연해진 희아를 유심히 보며 말씀하셨다.
“평창 군주는 며칠 만인데도 숙녀티가 더욱 완연해졌네요. 이제 곧 무품의 공주가 되실 터인데, 슬슬 하가할 가문도 고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희아는 아직 어리지요. 요새 학당들을 다니게 되면서 혼인 시기가 좀 뒤로 늦춰지지 않습니까?”
“하긴 일찍 혼인하면 속만 일찍 썩지요.”
온갖 사고를 줄기차게 쳐대는 앙녕 대군의 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또 경정 공주가,
“공주야 속 썩을 일이 있나요.”
하고 노골적으로 양녕 대군 부인의 말에 초를 치는 것이었다.
“······!”
윤서는 샐쭉하게 입을 다무는 수성 부부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귀한 왕족들이 모이신다기에 고귀한 말씀만 오가는 줄 알았는데 시누이 노릇 톡톡히 하는 것이나 고된 결혼 생활 푸념하는 것이나, 그에 맞서 넌지시 돌려 까는 것이나, 현대의 대가족 모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양녕 자가께오선 한양에 돌아오셨는지요?”
효령 대군의 부인 정씨가 기분이 상한 수성 부부인을 위로하듯 조심스럽게 여쭸다.
그러자 양녕 대군의 부인 김씨는 더욱 속이 터진다는 듯 “신왕께서 즉위하시는 날짜에 딱 맞춰 돌아오시겠지요.” 퉁명스레 답하고는, 어조가 미안했는지 애써 미간을 펴며 변명하듯 물었다.
“아 참, 흥국사에 새로 모신 부처님이 무척 영험하시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며느리가 가서 기도하니 손주 귓병이 싹 나았어요. 나랑 같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할 겸 겸사겸사 가십시다.”
“예 같이 가요. 아 참, 유 승휘가 번역했다는 금강경 보셨어요? 그간은 부처님 말씀이 한문으로 쓰여 있어 뜻을 잘 몰라 답답했는데, 이젠 뜻을 알고 기도하니 얼마나 마음이 좋던지요.”
“천재이신 우리 전하 덕분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릴 적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시더니 기어이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까지 만드셨어요. 어마마마께서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언니.”
불경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며 열기를 띠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없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신빈까지 윤서에게 말을 걸었다.
“권 승휘, 유 승휘가 금강경 외에 다른 불경도 번역하면 좋겠어. 내 나인 하나가 범어에 꽤 해박한데 말이 경건하지가 않아. 그 아이를 유 승휘에게 보낼 터이니 다른 불경도 어서어서 정음으로 번역할 수 있게 하게나.”
“!”
“!”
다만 신빈이 곧 중전이 될 윤서에게 너무 대놓고 하대를 하자 중전마마를 비롯하여 정순 공주와 경정 공주가 날카로운 눈으로 신빈을 응시하였다.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신빈이 아름다운 얼굴을 붉게 붉히며 사과를 하였다.
“아, 아직 책봉식을 올린 것은 아니라서 제가 말이 짧았습니다. 권 승휘, 양해해줘요.”
“아닙니다. 아직 제가 승휘이니, 편하게 대하십시오.”
윤서가 정중히 말을 할 때였다.
“윤씨 소저 들었사옵니다.”
드디어 이날의 주인공 윤씨 소저의 등장을 알리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부터 모두의 눈이 나인 둘이 여는 문으로 향하였다.
윤서도 고개를 돌려 입구를 주시하였다.
문이 열리고 송화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들어왔다.
“!”
많이 닮았다.
특히 윤씨의 다부진 입매가 닮았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두 손을 올려 절을 올리는 윤씨 소저의 눈빛은 죽은 윤씨의 강한 눈빛과 달리 맑고 투명하였다.
‘그대와의 인연은 악연일까 선연(善緣)일까.’
부디 좋은 인연이길.
윤씨처럼 사특한 수를 쓰지 않고 수양 대군의 마음을 잘 사로잡아 이향과 홍위의 치세에 기여할 수 있길. 어미 잃은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길.
내가 또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일은 부디 없길.
윤서는 진심으로 기도하며 아직 됨됨이를 파악하기 어려운 윤 소저를 주시하였다.
절을 올리고 난 윤 소저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따라 들어온 유모가 정성스럽게 싼 붉은색 비단 보자기를 윤 소저에게 건넸다.
윤 소저는 꾸러미를 풀어 연분홍색 비단에 붉은색과 초록색의 실로 꽃을 수놓은 선물을 중전마마부터 차례로 올렸다.
“아유, 향이 참으로 좋네. 아니 이 자수 솜씨 좀 보세요.”
선물을 펼쳐본 호령 대군의 부인이 금사와 은사를 비롯해 여러 색으로 모란꽃을 수놓은 붉은 비단 향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당겨서 입구를 봉하는 하늘색 실에도 질 좋은 백옥이 동그랗게 달려 있는 것이 무척이나 정성을 많이 들인 주머니였다.
“권 승휘 마마님, 처음 뵙습니다.”
마지막으로 윤서 앞에 다다른 윤 소저가 희고 고운 손을 와들와들 떨며 선물을 바쳤다.
‘두려워하는구나, 나를.’
윤 소저는 윤서를 두려워해 손을 떨면서도 눈은 제대로 맞춰왔다. 강단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열여섯 살, 15세기 기준으로 꽉 찬 혼인 적령기였지만 얼굴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이.
웃어른들께서 흡족해 하시니 수양 대군이 돌아오는 대로 길일을 잡아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윤서는 백옥처럼 희고 차가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속삭였다.
“우리, 잘 지내요. 어려운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러자 윤 소서는 입술을 바르르 떨더니 울먹이며 답하였다.
“후흣, 황, 황공하옵니다.”
“······!”
때마침 문이 열리고 중궁전 지밀 최 상궁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 고하였다.
“수양 대군 자가께옵서 강령포에 들어 육로로 한양에 오고 계시다 하옵니다.”
윤 소저가 흡족한 소헌 왕후께서 반색을 하며 외치셨다.
“오, 이리 기쁠 데가. 윤 소저가 중궁전에 들었는데 우리 유가 마침 육지에 발을 딛었다니, 참으로 인연인가 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