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55화 (155/255)

제 155화. 교육과 노비 제도 (1)

“원칙적으로 난 찬성이오. 부인처럼 빛나는 인간을 키워낼 수 있는 체제의 것이라면 찬성할 수밖에.”

희아와 홍위도 유모와 함께 제 처소로 건너가고 금똥이도 고롱고롱 깊게 잠이 든 밤.

윤서가 이향의 상투를 풀고 긴 머리를 상아 빗으로 빗겨주며 ‘세습 노비 신분제 폐지’에 대해 물었을 때 이향이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향은 또한 15세기의 군주이기도 하였다.

“‘원칙적’이라 함은 노비 세습을 폐지하기까지 현실적인 문제가 첩첩이 쌓여 있다는 거요. 당장 정부의 각 관사나 지방의 관아도 공노비 없인 일이 돌아가지 않는 현실이오. 그러니 부인, ···윤서야.”

이향은 빗질하는 윤서의 손을 잡아끌어 앞에 앉히고 눈을 들여다보며 염려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부인과 몸과 마음을 나누며 쌓아온 이야기가 많아 부인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소. 그러나 아바마마는 다르오. 게다가 지금 아바마마께서 부인을 통해 엿본 미래의 비극을 무척이나 자책하고 계시오. 그러면서도 또한 혹여라도 생길지 모를 미래를 대비해 홍위와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고 계시오. 그러니 부인, 마음을 다하되, 서두르지 마시오.”

노비를 소유한 이들이 부와 권력을 쥔 사회 지배층이기에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며 이향은 조선 건국 후 오십 년이 되는 동안 노비를 둘러싼 제도의 변화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태종께서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노비종부법을 시행하여 양인과 천첩 사이의 소생이 모두 양인이 되어 노비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가 되었다 그러자 노비를 많이 소유한 유력 지배층이 여러 이유를 들어 반발하였고, 그에 따라 세종께서는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이 자동으로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으로 다시 환원하였다는 것이다.

“명분은 타당한 것이었소. 아버지를 따라 신분이 결정되니 노비의 아이를 밴 여인들이 양인과 또 잠자리를 하여 아이의 아비를 속이려는 일이 빈번하게 생기면서 도덕이 흐트러졌다는 비난이 많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노비종모법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로군요. 나중에는 일천즉천(一賤則賤)으로 부모 중 하나가 노비면 자식도 자동으로 노비가 되어 노비 숫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할 양인이 대폭 줄어드는 폐단이 생겼고요.”

윤서가 국사에서 배운 노비제의 폐해에 대해 말하자, 이향이 한 번 더 윤서에게 다짐을 받았다.

“아바마마께서 종모법으로 환원하신 것은 노비 신분의 세습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한계 내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하신 조치요. 그러니 부인, 모든 제도에는 그 나름의 현실이 배경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부인이 나와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 이런 한계들을 하나씩 넘어서야 하는 조선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시오.”

이향은 윤서가 세종께 강하게 말씀드릴까 봐, 조선의 현실을 넘어 너무 급진적인 잣대로 자칫 전하의 노여움을 살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향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제게 전하는, 세종 대왕은 무조건반사로 존경스러운 분이신걸요. 그리고 또 나는 당신을 무척 사모하니까, 현명한 중전이 되기 위해 힘껏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 함부로 말을 하여 전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은 없을 것이에요.”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조선, 이제 뼈를 묻어야 할 고향이 되었다.

이향의 여인으로서도, 아이들의 엄마로서도, 그리고 장차 중전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할 것이다.

*****

다음날 오후.

천추전에서는 이향의 치세 하에 세종께서 주도하실 교육 제도에 대해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기초 학당에서 여덟 살부터 열 살 사이의 아이들에게 기초 과목을 가르친 후 자질이 빼어난 이들로 하여금 상급 학당으로 진학하여 경학, 의학, 군사학, 산학, 농어업학 등의 고급 과목을 배우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윤서는 먼저 현대의 기본 교육 체계와 그 이후 상급 진학을 모델로 한 교육안을 제시하였다.

이미 윤서에게 역사를 배우신 세종께선 단번에 어떤 체제인지 이해하셨다.

“상급 학당은 그 유럽이란 데에 있다는 ‘대학’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각 분야에서 빼어난 이들로 고급 과정을 익히고 연구하게 하면 학문의 발달이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만, 당장은 고급 학당에서 가르칠 선생이 충분하지 않을 터인데.”

세종의 우려에 광평 대군이 답을 올렸다.

“기초 학당을 올해 여름부터 차차 시작한다고 하면 고급 학당 진학까지 3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사이 필요한 교수진을 구성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산학과 의술, 경학, 군사학 등은 이미 빼어난 자들이 있고 역사 등의 기타 분야는 제가 형수님께 배워 교수를 할 이들을 키워내면 될 것입니다.”

“좋다! 기존에 설립되어 있는 향교에 고급 학당을 통합하면 될 것이니, 3년 후에 한양과 전주 경주 평양 등지에 대학을 세울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행하면서 착오를 줄여가며 계속 쌓아갈 수 있으니.”

세종께서는 일단 시작하고 추후 보강해갈 것을 지시하였다.

“군사에 재능을 보이는 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당장 올해 여름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북방의 정세가 심상치 않고 또 수양과 한남군의 해양 무역을 보조할 수군 지휘부도 필요합니다. 시일이 급하니 신분에 관계 없이 무재(武才)가 빼어난 이들을 선발하면 좋겠습니다.”

이향은 현재 간단한 시험만 거쳐 뽑은 후 바로 현직에 배치하는 갑사 제도를 보완하여, 이제부터는 신분에 관계 없이 선발된 갑사 중 빼어난 이들 100인을 따로 정예로 선별하여 짧게는 일 년, 길게는 2년까지 체계적으로 진법과 화포 등 무기 다루는 법, 지형에 따른 전투법, 수군의 경우 항해술, 해양 전투술 등을 교육시켜 유사시에 지휘관으로 활약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황보인과 김종서, 조극관, 이양 등 조정의 대신 중에 북방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이들이 많고 해양 쪽은 이예 등이 있으니 이들이 교수로 활약하면 될 것입니다.”

“···기존 갑사는 모두 넉넉한 집안의 양인인지라 스스로 무기와 말을 마련하였는데, 신분에 관계없이 뽑으면 모든 것을 다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재원은 어찌 마련하려느냐?”

“관염을 본격적으로 생산하여 재원을 삼으면 될 것입니다. 정인지가 설계한 염전이 내년부터 제법 성과가 날 것으로 보이고, 지금은 석탄을 때 바닷물을 졸이면서 기존의 나무를 때서 소금을 구워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 한남군이 보고하길 일본에서 고급 도자기 수요가 많다고 하니, 관요의 도자기 생산을 대폭 늘려 면포와 더불어 일본에 팔아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시행할 것입니다.”

“그래, 일본에는 아직 목화가 재배되지 않아 늘 동을 바치며 면포를 무역해달라 청하였지. 그리고 윤서야, 네가 인삼을 재배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강화까지 배편이 불편해 김포 쪽에 부지를 마련하였고, 인삼은 또 지력이 중요하다고 하여 지금 한창 퇴비를 주는 중입니다. 그 일대에 크게 닭을 치면서 닭똥과 물고기 등을 풀과 섞어서 삭힌 후 거름으로 주고 있습니다.”

이건 박 상궁과 노산대가 감독하고 있었다. 그 일대 닭을 많이 치면서 계란도 팔고 있고, 닭털을 이용해 장차 겨울용 옷도 만들어 팔 계획이다.

“그리고 거름으로는 돼지 똥도 좋은데, 지금 우리 조선 돼지는 너무 빈약해서 마땅하지 않다고 합니다. 금성 대군께서 초석 광산을 보기 위해 산동 반도에 가신다니 돌아오실 때 씨돼지도 좀 데려오면 좋겠습니다.”

“그래. 향아, 금성에게 말해 두거라. 그리고 윤서야, 산삼 씨를 많이 받아서 다른 궁방전에도 인삼을 재배하거라. 명나라나 일본에서 우리 인삼을 고가에라도 사고 싶어 하지 않느냐? 앞으로 교육에 많은 재원이 필요할 것 같으니 인삼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지.”

분위기가 무리 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윤서는 세종께서 민감한 부분을 부러 언급하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마 그에 대해서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못한 듯하였다.

그래서 윤서는 에둘러 조심스럽게 이루고자 하는 바를 고하였다.

“중전마마께서 운영하시는 여학당에서 지난 가을 의녀들을 데려다 기초 의학 지식을 강의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천한 관노비 따위에게 무엇을 배우겠냐고 그만두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나중에는 호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윤서는 지난 제석 연회에서 귀부인들이 의녀들에게 배운 기초 지식, 이를테면 깨끗한 물을 마셔야 하고, 물의 질이 의심스러우면 끓여서 사용하고, 고기나 생선을 잘 익혀 먹고 손발을 자주 씻는 것만 실천했는데도 배앓이 등 자잘한 질병이 많이 줄고, 특히 출산할 때 술을 강하게 증류한 주정으로 손을 깨끗이 소독한 결과 산후병에 훨씬 덜 걸리게 되었다고 말한 사실을 고하였다.

“오호, 그래?”

“예, 전하. 그래서 제가 생각해보니 기초 학당은 고급 학당과 달리 전국 현 단위에 생기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닭을 치는 것처럼 지역 실정에 맞게 가축 기르는 법, 또 새로 개발된 농업과 어업 지식, 누에치기 등의 잠업, 기초 의학 지식도 아울러 가르치면 백성들의 삶의 질과 경제 여건도 비약적으로 좋아질 것입니다.”

“윤서 말이 타당합니다, 아바마마. 그런데 전국 각지에 우리 궁방전이 있어 농사를 짓고 어업에 종사하는 노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앞으로 화폐와 함께 여러 산물이 유통되면서 모든 백성이 기본적인 셈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거래가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문서도 작성해야 하니 정음도 배워야겠지요. 그러니 기초 학당도 필요한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향도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으흠······.”

말 속에 담긴 의도를 모르시지 않는 전하께서 생각에 잠기셨다.

그때 광평 대군이 평소와 달리 요란스럽게 손뼉을 짝 쳤다.

“왜 아바마마께서 형수님의 지식이 제 것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 발언하라 하신지 그 의도를 이제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형수님께서는 천민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계시군요. 이야, 이거, 잘못하면 성균관의 유생들과 지방 향교의 유생들 모두 동맹 휴학을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갈 일인데요.”

“!”

“!”

애써 에두른 뜻을 정확하게 고하는 광평 대군을 윤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광평 대군은 윤서를 보며 눈을 찡긋하고 한술 더 떴다.

“어, 형수님. 혹시 천민의 신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형수님 목 공장과 비누 공장 일대의 노비들 모두 십몇 년 후에는 양민으로 속량 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월봉에서 얼마씩 제한다면서요. 이야, 그럼 이 기회에 내수사 소속 노비들도 한 십 년 넘게 일하면서 속량 값 쌀 이십 석 마련하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

“하긴 노비 하나 값이 말 한 필 값이니, 몇 년 떼어 모으면 속량 못 할 일도 없지요. 원래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노비가 제일 많지 않습니까, 아바마마?”

“···으응?”

“하삼도가 하천이 많아 이앙법 하기도 좋고, 바다가 가까우니 생선 잡아다가 들의 풀 베어 거름 만들기도 좋겠지요. 또 날씨도 따뜻해 겨울에 보리 심어 이모작 하기도 좋으니 식량이 한결 넉넉해지는 데다가 두창 예방 침을 다들 맞았으니 앞으로 인구가 쑥쑥 불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바마마, 백성을 사랑하시는 애민 군주이신 아바마마 성덕으로 이렇게 인구가 늘어날 터인데, 그 열매는 어째 다 노비 주인 좋게만 가네요.”

아아, 진짜.

광평 대군을 살린 보람이 충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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