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화. 광평 대군 권윤서 되기 (2)
“취토군은 화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염초를 얻기 위해서 함토를 채취하는 이들을 말하오. 그런데 이 함토란 것이 오래된 집의 지붕 밑, 부엌 바닥, 마루 아래나 뒷간의 벽 아래, 구들장 밑에서나 채취할 수 있는데, 함토 백 섬을 넘게 구워서 얻는 염초 양이 고작 백 근 남짓이오. 하아, 그러니 화포를 개량하고도 쏘아서 시험을 해보기가 마땅치가 않고.”
문종이 진짜 화포 덕후였다더니, 늘 진중하고 점잖은 이향이 이리 수염에 침까지 튀기며 말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는······.
낯선 이향의 모습에 빙글빙글 웃던 윤서가 문득 치미는 궁금증에 물었다.
“그런데 왜 함토를 그곳에서 채취한다는 말인가요? 무슨 성분 때문에요?”
“으응? 염초는 본시 땅의 서리인 지상(地霜)이라고 해서 땅 위에 서리처럼 희게 피어난 것을 걸러 만드는 것인데, 지상은 지붕 속의 증기가 모여 하얗게 엉킨 것을 말하는 거요. 바닷가의 증기가 햇빛을 쬐게 되면 희게 뭉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지상이 든 함토를 구우면 소금처럼 짠맛이 나서 염초라고 하고 또 초석이라고도 한다오.”
“···으응? 이,”
중요한 말을 할 때 습관처럼 부르던 대로 ‘이향’이라고 말하려던 윤서는 입술을 깨물고 숨을 삼킨 후 다시 공손하게 고하였다.
“증기가 엉켜서 흰 결정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에요, 저하. 바닷가의 흰 결정인 소금은 바닷물 속에 든 염화나트륨이란 성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에요. 정인지가 우리 왕실 소유의 어장에 짓고 있는 염전이 그래서 평평하고 얕은 바닥에 바닷물을 가뒀다가 햇빛에 수분인 물은 날리고 염화나트륨인 소금만 남기는 원리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함토란 흙을 구워서 염초가 나온다면 그건 지붕의 증기가 엉켜진 것이 아니라 바닷물 속의 염화나트륨처럼 흙 속의 어떤 성분이 나오는 것인데, 그 성분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 비슷한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염초를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
“!”
“!”
갑자기 천추전이 고요해졌다.
얼마나 갑작스럽게 고요해졌는지 홍위와 한참 장난치며 웃다가 지쳐 천 상궁의 품에서 게슴츠레 졸고 있던 금똥이까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엄마를 보았다.
그리고 희아는 조용히 일어나 윤서 곁으로 와 앉았다. 뒤이어 홍위도 광평 대군 옆에 와 앉았다.
화약은 이렇게나 조선에서 지대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 성분이 무엇이란 말이냐?”
세종께서 화급히 물으셨다.
“그, 그것은 제가 모르옵니다. 다만,”
어떻게든 기대에 부합하고 싶은 마음으로 말끝을 흐리며 윤서는 팽팽 머리를 굴렸다.
세종과 광평 대군의 얼굴에 한줄기 실망이 스쳤다.
원래부터 윤서의 불완전한 지식 형태에 익숙한 이향과, 무슨 일이 어떻게 있든 절대적 신뢰를 보이는 희아와 홍위는 여전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윤서를 보고 있을 뿐이다.
윤서는 불완전하나 최선의 답을 내놓았다.
“수양 대군이 천축국에 가 초석을 수입하려 하였다면, 그 초석 광산이 생겨난 조건을 보고 초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성분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지금 안평 대군과 임영 대군 자가께서 캐고 있는 석탄은 아주 먼먼 옛날에 초목이 땅에 묻힌 후 강한 압력을 받아 생겨난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초석도 생겨 나게 된 조건이 있을 것이니, 그 조건을 알아내면 인위적으로 초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세종과 그의 아들들은 ‘성분’이란 말이 함유하고 있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광평!”
“예, 전하. 수양 형님이 천축국의 초석 광산에 가려다가 실패하고 돌아오고 있는데, 필시 그 광산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 형님. 중국에도 초석 광산이 있지 않습니까?”
“산동 반도에 큰 것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사람을 보내시지요. 봄이 오니 뱃길도 그리 거칠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금성에게 함토와 비슷한 토양을 만드는 법을 연구하라 해야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참 멋지지 않습니까? 똥오줌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거름을 많이 만들어 식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니.”
광평 대군은 윤서가 제시한 시비법을 바탕으로 휴경 없이 계절에 따라 농지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였다.
“벼의 가을걷이 후 보리를 심어 파종하고 수확하는 이모작이 가능합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직 이모작이 보급 전인 것 같아 윤서는 고향에서 논에다가 겨울에 보리를 키우고 여름에는 벼를 키우는 방식을 슬쩍 언급하였다.
“오호! 이모작은 겨울에 춥지 않아야 할 터인데.”
역시 세종께서는 핵심을 바로 잡아내시고,
“예, 제가 형수님 말씀하신 시비법과 벼와 보리 이모작을 제가 가진 신안의 궁방전과 내수사 소유의 하삼도 궁방전에서 시도해보겠습니다.”
광평 대군은 책임지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실현해 보이겠다고 고하였다.
이런 식으로 농업 생산량을 늘릴 시비법, 모를 키워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과 작물을 두 번 키워내는 이모작, 날씨가 추운 북쪽 지방에서 화전을 통해 농지를 개간하고, 시비법으로 지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 등을 논의하고 부가적으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을 인위적으로 만들 기초 방법이 논의되었다.
한 시진이 지나자 홍위와 금똥이는 천 상궁의 옆구리에서 쌕쌕 잠들어 있고, 요새 눈이 부쩍 침침해지신 세종께서도 지치신 기색이 역력하셨다.
“저녁 수라 시간입니다, 아바마마. 오늘은 여기서 종료하고 내일 다시 모이지요. 그리고 여야.”
이향이 광평 대군을 불렀다.
“왜 아바마마께서 형수의 지식을 네가 물려받아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신지 알겠느냐? 이 사람이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던 기존 지식과 그 뿌리부터가 다르다. 아까 그 ‘성분’이라는 것도,”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였습니다, 형님. 모든 분야에서 ‘성분’을 찾아내는 기본 원리를 형수님께 배우란 말씀이지요? 일테면 혜민국에서 전순의가 말하길 ‘몸에 들어온 병균을 죽이는 성분이 약초 속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성분을 찾아내는 것이 혜민국의 장차 과제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기존의 오장육부와 기혈의 소통 등과 다른 치료적 접근법을 이야기를 하더이다. 이것 또한 약초에 든 특정 ‘성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두의 눈이 윤서에게로 향했다.
윤서는 과목별로 나눠 배우는 현대의 교육 방식에서 ‘화학’이라 통칭되어 칭해질 수 있는 기본 원칙을 저리도 쉽게 연관 지어 찾아내는 세종의 아들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역사에서 유럽이라 칭해지는 지역이 중국이나 우리보다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접근법입니다.”
“형수님, 제가 이따가 협경당으로 갈 터이니 그 성분 추출에 대해서 좀,”
“어허, 여야! 하루 이틀에 얻어질 지식이 아니니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윤서가 가진 기본 지식이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 4년에 그 이후 석사 박사 과정까지 이어진 긴긴 교육 기간을 통해 습득된 것임을 들어 알고 있는 이향이 질색을 했다.
“그리고 너 이틀 동안 여기 천추전에서 밤을 새우느라 궁에 돌아가지 않았지? 오늘은 돌아가서 제수씨와 수복이와도 시간을 보내야지. <육아보감>을 읽었으면서도 수복이의 정서 발달에 지금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느냐? 우리 부인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니 저녁 시간을 뺏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
“향아,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더냐?”
광평 대군은 멋쩍게 웃고, 세종께서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향을 바라보셨다.
천추전을 나와 사정전 뜰을 가로지를 때 이향은 궁인들이 보는데도 스스럼없이 홍위를 무등을 태웠다.
홍위는 이향의 목에 다리를 두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신이 나 “아바마마! 말 타는 것보다 더 신이 나옵니다!”
밝게 소리치고,
형아의 목소리에 잠이 깬 금똥이는 윤서 품에서 “아부! 아부!” 소리치며 자기도 무등 타고 싶다고 발을 동동거렸다.
희아가 작은 목소리로 윤서에게
“저도 아바마마처럼 다정한 사내를 가지고 싶어요.”
수줍게 속삭였다. 중전마마께서 자신의 혼사를 논의 중임을 아는 까닭이다.
윤서는 허리를 굽혀 희아와 눈을 맞추며 장담하였다.
“벌써 찾아놓은 것 같아요. 염려하지 마세요.”
윤서가 희아와 함께 밝게 웃을 때, 이향이 두 사람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둘이서만 하는 것이오?”
“여인들끼리 비밀입니다.”
“비밀이에요, 아바마마.”
“눈나와 어머니는 비미니 많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도 금똥이앙 비미이 많아요!”
이향의 손에 의지해 양팔을 높게 치켜올린 홍위가 소리쳤다.
봄기운을 실은 늦겨울 바람이 이향의 풍성한 수염을 쓸고 지나갔다.
*******
매일 오후 즉위 교서에 담을 내용을 위해 열리는 천추전 모임은 첫날처럼 진행되었다.
다만 윤서는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더 깊은 기본 지식을 적어 광평 대군에게 넘겨주는 일을 추가로 하였다.
이를테면 첫날 결국 화학에 연관될 ‘성분 추출’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대로 원소의 개념과 추출 방식을 적어 설명하고 지도와 함께 실제 적용 예를 덧붙였다.
[각 성분의 끓는 점의 차이를 이용해 따로 추출하는 방법 중 ‘연은분리법’이 있습니다. 지금 단천에서 내시부의 내관 셋을 보내 개발 중인 은광에서는 납과 은이 뒤섞인 은광석이 나옵니다. 종전이라면 납에서 은을 분리하기 어려워 출토량이 많지 않은데 지금은 납과 은의 끓는 점 차이를 이용해 쉽게 은을 분리해내는데 이것이 연은분리법입니다.
한남군을 대내전이 다스리고 있는 다다량포(多多良浦)로 옮겨가게 하는 것도 장차 그곳에 연은분리법을 전하고 그 대가로 그곳에 있는 은 광산의 개발을 함께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윤서는 대학 때 부모님과 함께 배편으로 시마네 현 등지의 온천 여행을 하면서 이와미 은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와이 은광이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였었다는 것과 이 지역을 다스렸던 오우치 가문이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과 긴밀하게 교류하길 소망하였고, 조선에서 연은분리법을 배워 은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한문학 교수셨던 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셨다.
이렇듯 윤서의 지식은 외교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미 소량의 초석을 싣고 대마도를 출발하여 인천으로 오고 있다는 수양 대군의 무역 활동과, 염초를 인위적으로 키워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이미 산동 반도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금성 대군 일행의 예가 증명하듯,
명나라만 적극적으로 사대하고 나머지 주변국을 오랑캐라 하여 소극적으로 교린하던 기존의 외교 정책에서 탈피하며 적극적으로 대외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월 초열흘째 되는 날.
앞으로 사흘 동안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이끌 교육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당에서 서원, 그리고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와 경학을 주로 묻는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임용 체계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볼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분야는 상왕으로 물러나신 세종이 계속 주도적으로 이끄실 분야이면서 동시에 변화된 교육체계를 바탕으로 사농공상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의 신분제가 그 근본부터 변화할 가능성이 농후한 분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세습 신분에 대한 역사적 근거와 고찰이 선행되어야 하고, 달라진 교육 체계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광범위하게 짚어봐야 하기도 하였다.
또 세종께서는 그간의 언행을 근거로 추론할 때 윤서가 아주 파격적이고 불온하기까지한 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셨다.
이런 이유로 세종께서는 처음으로 희아와 홍위는 참석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다. 금똥이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의 짐작이 옳았다.
윤서는 미리부터 이에 대해서 새벽 일찍 일어나 서재에서 정치사상사를 기억나는 대로 정리하며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중전이 될 윤서에게는 이향의 치세를 통해 반드시 실현하고 싶은 꿈이 하나 있었다.
[노비 세습제 폐지]
홍위가 다스리게 될 조선에는 ‘세습 노비’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