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53화 (153/255)

제 153화. 광평 대군 권윤서 되기 (1)

새해가 시작된 후 이틀은 그간 윤서가 세종께 넘긴 지식을 광평 대군이 익히는 수준이었다.

세종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았다.

늘 사람 좋게 싱글거리며 한문의 운율을 잘 맞춰 ‘소슬한 가을바람 잠자리 날개 위를 투명하게 빗기고’ 같이 정갈하게 번역되는 사(詞)를 즐겨 짓는다기에 학습 능력은 좀 덜할 줄 알았는데.

광평 대군은 윤서가 생각나는 대로 저술한 세계 역사에 세종께서 천 상궁을 통해 해당 범위에 고금의 서책 내용까지 보강해 넣은 막대한 양의 역사도, 화폐가 무엇이고 화폐를 유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지와, 나라 사이의 비교 우위에 입각한 무역의 이점까지 넣은 기초 경제도,

천추전에서 이틀간 밤을 지새우며 열독한 후 대강 윤곽을 잡았다.

이런 빼어난 인재는 거의 다 죽고 하필 살아남은 아들이 제 권력을 위해서 나라의 핵심 인재 절반을 거침없이 제거하고 그들의 재산과 처자식을 사사로이 나눠 가진 패륜적 수양 대군이나, 초요갱이란 기생을 서로 가지겠다고 다투는 술주정뱅이 서자들이라니.

윤서가 한탄할 만큼 빠른 진전이었다.

그리고 사흘째되는 날인 정월 초닷새 늦은 오후.

세종께선 천추전으로 이향과 윤서, 광평 대군만 불러 말씀하셨다.

“앞으로 보름은 내가 반포할 양위 교서와 향이가 반포할 즉위 교서에 담을 분야를 중점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향이의 치세에 우리 조선이 나아갈 기본 방향을 담고 있는 지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 즉위 교서의 핵심은 시인발정(施仁發政)이었다.”

시인발정(施仁發政).

어짊을 베풀어 이 땅 위에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게 한다.

세종께서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할 때 반포한 교서 속에서 앞으로 펼칠 치세의 핵심을 제시하신 어구였다.

세종은 이향과 광평 대군 이여(李璵)를 보시고, 또 이향 옆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윤서를 보신 후 다시 광평 대군을 보며 말씀을 이으셨다.

“여(璵)야, 네가 지난 이틀간 읽은 방대한 내용 거의가 다 윤서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예, 예?”

이틀 밤을 꼬박 새운 후 겨우 서너 시간 눈을 붙인 후라 잠이 덜 깨서 멍하니 답하던 광평 대군이 눈을 부릅떴다. 이제 막 스물한 살이 되어 청년의 티가 채 가시지 않은 광평 대군은 입까지 벌린 채 윤서를 보며 핏발이 선 눈을 연거푸 깜빡거렸다.

“너를 이렇게 따로 불러 윤서의 지식을 익히게 하는 것은, 장차 윤서의 머릿속 지식을 기반으로 정책을 세울 때 여 네가 마치 너의 지식인 양 지식을 설파하고 기존의 좁은 틀에 사로잡혀 있는 인재를 설득하고, 또한,”

“잠시, 잠시만요, 아바마마.”

이여가 방금 들은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휘젓더니 윤서에게 물었다.

“혀, 형수님은 대체, 정체가, 정체가, 무엇입니까?”

“······.”

윤서는 그저 침묵하고, 옆에 앉은 이향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신 대답했다.

“무엇이겠느냐? 장차 중전이 될 나의 여인이고 홍위와 금똥이의 어머니지.”

“아니, 아니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바마마, 점쟁이 지화가 제 운명에 대해 내놓았던 점사를 기억하십니까?”

“···으응?”

세종께서는 생각이 나신 눈치시면서도 입 밖에 내기 싫으신 듯 말끝을 흐리며 윤서를 바라보셨다. 네가 미래의 비극을 한사코 입에 담기 싫어하는 그 심정을 내가 알겠다는 눈빛이셨다.

“제가 스물을 못 넘기고 굶어 죽을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허, 여야!”

이향이 눈을 찌푸리며 만류하는데도, 흥분한 광평 대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그렇지 않아도 한양에 돌아오자마자 준치 가시가 목에 걸려 며칠을 밥을 못 먹고 고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순의가 의녀를 시켜 제 입을 한껏 벌리게 하고 얇은 쇳조각으로 혀를 누른 후, 등롱으로 입 안을 밝히게 하더니 핀셋이라는 얇고 긴 집게 같은 걸 목구멍 깊숙이 넣어서 가시를 뽑아냈지 뭡니까? 그런데 그 혀를 누르는 얇고 납작한 쇳조각도, 가시 같은 걸 콕 집어 뽑는 핀셋이라는 것도 형수님이 다 고안한 거라 하던데요.”

“······.”

“······.”

윤서의 옆에 앉아 있는 이향은 ‘두창에서도 구하고 가시로부터도 구했구려.’ 하는 표정으로 기특하다는 듯 윤서의 등을 한번 쓰다듬었고, 세종께서는 빤히 윤서를 보며 무어라 말씀하고 싶으신 듯 입술을 달싹이시다가 다시 꾹 다무셨다.

“아! 그거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요.”

윤서가 보니 칼 손잡이든 뭐든 마무리가 정교하지 않아 나뭇가시에 찔리는 이들부터 생선 가시까지, 여러 군데에서 가시에 찔려 벌겋게 붓다가 고름이 잡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전순의에게 가시를 뽑기에 편리한 핀셋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정말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청진기도 그려주었는데 그건 만들었나.

윤서는 대수롭지 않게 빙긋 웃는데, 광평 대군은 눈에 눈물까지 담으며 소리쳤다.

“아바마마! 제가 다 배우겠습니다. 형수님 지식을 제 것처럼 배워 앞에 나서시라는 뜻이 혹여라도 그 지식을 원망하거나 반발하는 무리가 생겨나면 대신 포화를 맞으라는 뜻이 아니십니까?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셈인데 제가 그걸 못하겠습니까?”

역시.

이향이 언젠가 자신의 심성을 가장 많이 닮은 동생은 광평 대군이고, 화포와 군사에 대한 관심사는 금성 대군이 제일 많이 닮았다고 말하더니.

정말로 광평 대군은 마음이 넓고 반듯했다. 살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가슴이 뻐근할 만큼 뿌듯했다.

“그래. 잘 알았구나, 여야. 맞다. 윤서의 지식이 어디서 왔는지 물을 필요 없다. 죽다 살아나면서 천상의 지식을 엿보았다고 하니, 나도 그런 줄 믿으련다. 중요한 점은 그 핀셋이란 것처럼 윤서가 펼쳐놓는 지식이 허황스러운 술법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실로 유용한 실체를 가진 지식이란 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지식을 힘써 익히고 또 후손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왕으로서의 치세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세종은 윤서의 지식을 공식적으로는 광평 대군이 옮겨 받되, 미래의 모든 경우를 대비하며 이향은 물론 고작 다섯 살이 된 홍위도, 그리고 천재적인 기억력을 물려받은 희아도 함께 천추전에서 배우라고 지시하셨다.

윤서를 통해 역사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짐작하신 후 세종께서는 짬이 날 때마다 홍위를 천추전이나 침전인 강녕전에 불러 무릎에 앉히시고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그리고 또 경회루 뒤 금군 훈련 장소에서 골프와 비슷한 보행 격구를 홍위와 함께 하시며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셨다.

귀한 것이나 맛있는 것이 생길 때마다 막내 영응 대군을 불러 먹이시고 나눠주시던 과거와 아주 달라지신 모습이셨다.

이를 두고 소헌 왕후께선 “염이야 이제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전처럼 자주 부를 수야 있겠느냐. 그러니 대신 손주를 어여뻐 하실 마음이 드신 게야.” 하고 말씀하셨지만, 윤서의 생각은 달랐다.

세종께서는 심하게 자책하고 계셨다.

자신의 우유부단이 장차의 비극을 불러왔다는 자책과, 그래서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기든 그 비극을 막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충만하셨다.

그 일환으로 곧 돌아올 수양 대군은 유구국과 그 너머 섬라곡국(태국)까지 오가며 여러 물품을 무역하게 하면서 차차 해양 항로를 개척해 최종적으로 호주까지 가게 할 계획이셨다.

그리고 또한 모든 경우를 대비해두기 위해 정사에 바쁜 이향을 대신해 홍위에게 직접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몸소 가르쳐주고 계셨다.

윤서로서는 홍위가 역사 최고의 성군이신 세종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이 무척 기쁘면서도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에게 너무 과중한 부담이 될까 염려도 되었다. 그래서 세손 강서원의 교육 과정을 총괄하는 성삼문에게 격구와 활쏘기 등 배동과 함께 하는 운동을 늘려주십사 부탁하였다.

정월 초엿새 되는 날, 신시(오후 세 시).

천추전에 정무를 일찍 마무리 지은 이향과 윤서, 광평 대군, 홍위와 희아가 모였다. 아니 두 사람 더, 천 상궁과 천 상궁 품에 안긴 금똥이도 있었다.

이제 생후 팔 개월에 들어선 금똥이 이윤(李潤)은 윤서가 승휘의 대외 공식 의복인 연두빛 장삼만 입을라치면 “음마, 음마아!” 대성통곡을 하며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정말로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은 마음도 컸지만 눈치가 아주 빨라서 그렇게 울면 마음 약한 홍위가 “어머니, 금똥이도 데려가요.” 하고 챙겨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추전에 온 금똥이는 또 눈치가 빨라 자신이 끼어들 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구석에 앉아 있는 천 상궁 품에 착 안겨서 엄지손가락을 빨며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쌔근쌔근 잠을 자는 것이었다.

이날부터는 양위 교서와 즉위 교서에 담을 분야를 정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하기로 되어 있다.

홍위와 희아는 천 상궁 옆에 편하게 마련된 푹신한 솜 의자에 편히 앉아 논의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로 하였고, 책상에 둘러앉은 이는 세종과 광평 대군, 윤서, 이향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이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기에 내 일찍부터 농사직설을 펴내 우리 실정에 맞는 농법을 보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굶어 죽는 백성이 적지 않으니, 무엇보다 식량을 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즉위 교서와 함께 펴내면 좋겠는데. 윤서야, 혹시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세종께서 윤서를 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문하셨다.

‘농대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준비한 바가 있다!’

원래 역사보다 더 일찍 즉위하게 된 이향의 성공적인 치세를 위해 윤서도 다방면으로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는 집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살던 홍성이 농업이 주인 충청도 지방이었다. 그래서 교과서에서 배운 기본 농업 지식과 함께 봄가을로 온 마을을 진동하던 닭똥 냄새를 생각해냈다. 농사 짓는 분들이 양계장에서 트럭으로 사온 닭똥을 논밭에 뿌려 기본 거름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농업 발달에 있어 가장 큰 혁신을 가져온 것이 농약과 더불어 화학비료의 발명이었으니.

“벼농사에서 먼저 판에 볍씨를 뿌려 모를 만들고 한참 자란 모를 논에 내는 것은 이미 아시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거름의 중요성입니다. 제가 한양에 와 가장 의아하고 염려스러운 것이 각 집마다 대소변을 본 것을 길에 그냥 버려서 온갖 냄새가 창궐하고 그로 인해 수인성 질병이 도는 것인데요.”

“잠시만, 잠시만, 부인.”

15세기 천재적 두뇌에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21세기까지의 기본 지식을 장착한 윤서의 말은 따라가기 힘들다.

“개념을 하나씩 정리하고 갑시다. 첫째, 거름이 무엇인지, 둘째, 수인성 질병은 무엇이고 왜 그것이 분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윤서가 미래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향이 의문이 드는 단어의 정의만 짚고 있을 때, 윤서의 말을 받아적던 광평 대군은 또 “정체가, 우리 형수님 정체가 대체······.” 중얼거렸다.

윤서는 거름이 주로 인분과 동물의 배설물, 생선 등과 풀과 볏짚 등을 함께 섞어 썩힌 것을 의미하고 또 수인성이란 오염된 물을 매개로 퍼지는 질병을 말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분변을 효율적으로 모으려면 지금의 요강 방식이나, 궐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재로 덮는 방식이 아니라 집집마다 변소를 만들고 저 외곽에 분변을 한꺼번에 모아 풀과 볏짚 등을 섞어 썩히는 퇴비장을 만들면 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광평 대군이 재빨리 윤서의 말을 받아 정리하며 생각을 펼쳤다.

“형수님의 수인성 질병이란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이질이 창궐하는 여름이면 우물에서도 오줌의 짠맛이 난다고들 투덜댑니다. 그러니 한양에 사는 백성들의 분변을 모아서 저 외곽에서 짚이나 풀을 섞어서 거름을 만든 다음 논밭에 시비하면 수인성 질병도 예방하고 작물의 생산량도 대폭 늘릴 수 있겠군요. 지방에서는 더 쉽겠구요. 그런데 그 많은 똥오줌을 어떻게 모은다······.”

광평 대군이 ‘똥오줌’이라고 말하자 천 상궁이 안고 있는 금똥이와 장난을 치고 있던 홍위가,

“똥이래, 금똥아. 네 이름에 들어 있는, 똥!”

하며 킥킥 웃었다.

형이 웃자 금똥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읏또, 읏또.” 하며 다리를 버둥거리며 까르르 따라 웃었다. 옆에 앉은 희아는 여느 때처럼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세종까지 너털 따라 웃으시자 진지하기만 하던 천추전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아이들은 어째서 시대를 불문하고 그렇게 ‘똥’이란 단어만 나오면 저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윤서가 초대박 베스트셀러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그림책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는데, 광평 대군이 “오!” 하며 붓을 놓고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취토군을 확 늘려 활용하면 어떨까요? 지금 취토군이 처마 밑이나 구들장 밑의 흙을 마구 판다고 다들 싫어하는데 골칫거리인 똥오줌을 치워주면서 취토를 겸하면 반발도 없어질 것입니다.”

“취토군이 무엇인가요?”

윤서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궁금하여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향이 열을 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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