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화. 수양 대군 이유의 가면
제석 나례 연회도, 신년을 맞은 정월 설의 행사도 모두 성대하게 끝이 났다.
묵은 해를 보내고 많은 변화가 예고된 새해를 맞이하는 내내 달이 기운 그믐 즈음의 캄캄한 밤하늘 북쪽으로 북극성과 천을성, 태을성이 유난히 환하게 빛을 내었다.
고래로 천문서는 이들 별이 환하게 빛을 내면 음양의 조화가 순조롭고 만물이 번성하는 가운데 임금과 나라에 기쁜 일이 생긴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조정 대신은 물론 일반 백성과 신년 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조한 북방 여진족 추장들까지 세자께서 보위에 오르시는 새해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그러나 별이 예고하는 신왕 치하의 미래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자들도 있었으니, 유구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상송포(나가사키)의 방박량진(사쓰마)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대전 내관 조창의에게서 한양의 소식을 듣게 된 이유가 그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국 대군 이유는 어명을 받들라. 다가오는 이월 초하루, 세자께서 보위에 오르시니, 이유는 한양에 상경해 신하 된 자의 예를 표하라.”
더운 나라의 강렬한 햇살과 거센 바닷바람에 새카맣게 그을리고 광대뼈가 움푹 드러날 정도로 야윈 수양 대군에게 조창의가 어명을 전하였다.
조창의의 눈이 엎드려 어명을 받는 수양 대군을 날카롭게 살폈다. 근자 들어 성정이 널을 뛰듯 급변하시는 전하께서 이유의 속내를 살피고 돌아오란 명을 따로 내리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라의 경사를 맞아 강상죄를 지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를 방면하는 바, 이유 또한 박탈당했던 ’수양 대군‘ 직첩을 다시 돌려받게 되었으니, 귀국 후 거제가 아닌 한양의 명례궁에 거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수양 대군 이유 망극한 마음으로 어명을 받잡습니다.”
엎드린 채 도진(시마즈) 가문에서 한남군 이어에게 제공한 화려한 거처의 다다미 바닥을 노려보던 수양 대군은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북쪽 한양을 향해 네 번의 절을 올린 후 조창의의 손에서 대군 직첩을 적은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어명을 전한 조창의가 비로소 절을 올리며 대군에 대한 예를 갖췄다.
“고초가 심하셨습니다, 대군 자가. 전하께서도, 또 중전마마께서도 늘 자가를 염려하시며 그리워하십니다.”
흥, 그리 그리워하시는 분들이 뒤통수 치듯 형님을 보위에 올리신단 말이냐.
다른 시기도 아니고 권가의 사특한 모함에 아내도 잃은 내가 초석을 구하기 위해 거친 바다를 헤치고 떠다니는 동안에!
수양 대군은 그간 들르는 곳마다 교류하며 일본과 중국 남부의 무역 교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하여 전하께 보고서로 올려왔다.
일본이 오래전부터 유구국을 경유지로 하여 해금령 하의 중국 남부 여러 도시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고, 중국 남부 해양 무역을 주도하는 이들이 저 먼 서역의 회회인 계통이라는 사실도 빠짐없이 적어 올렸다. 그리고 원거리 항해에는 배의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보다 바닥이 좁은 첨저선이 더 낫다는 사실과 계절에 따라 바람이 부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항해로도 그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까지, 장차 조선이 바다를 통해 무역한다면 어떤 경로를 이용해야 하는지를 적어 올리며 자신의 공을 호소해왔다.
거센 바닷바람과 배를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파도의 으르렁거림 속에서 자신이 먼저 부인을 버리며 살길을 도모하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망각 속으로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빈 기억의 자리를 세자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권윤서가 일을 꾸몄고, 그 요녀에게 홀린 세자가 동조하며 부인은 억울하게 죽고 자신은 바다를 떠돌게 되었다는 거짓 믿음으로 채워 넣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머리라도 꽝꽝 찧으며 아내를 살려만 달라고 애원하였더라면 마음 약한 어마마마께서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주셨으리란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항해를 떠나오기 전 포목점 직원으로 위장하여 찾아온 한명회가 한 말도 수양 대군의 왜곡된 기억에 지대하게 기여하였다.
“시기가 한동안 어려울 것입니다. 대군 자가께서는 부디 쓸개를 핥으며 기어이 대업을 이루고야 만 구천의 와신상담을 잊지 마소서.”
그래서 수양 대군은 귀국하면 거제에 유배되는 것이 아니라 한양의 중앙 정치에 복귀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해왔다. 심지어 초석을 구하러 천축국에 가는 길에 만난 중국의 무역상과 섬라곡국의 상인에게서 초석이 주로 나는 곳이 여러 조류의 똥이 쌓인 곳이라는 기막힌 비밀까지 입수하게 된 것이었다.
이 비급을 전하를 뵙고 직접 고하여 그 공으로 화려하게 대군의 작첩을 다시 회복하고, 왜구를 물리쳐 백성의 추앙을 얻은 태조처럼 자신도 무역을 통해 국부를 일구며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것이 수양 대군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런데 형님이 보위에 오르다니.'
형님이 벌써 왕이 되면 태어날 때 대전의 촛대가 부러지며 불운을 예고한 홍위 그놈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권가에게 홀린 형님이 왕이 되면 내 안위가 보장이 될 것인가. 내 가여운 아내는 헛되이 죽었구나.
터져 나오는 한과 분노를 수양 대군은 이를 악물어 억눌렀다. 왜곡된 원망의 나날은 마음 깊숙이 복수의 념을 키우게 하였지만, 그만큼 음습하게 자신의 본심을 위장하는 법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스물아홉, 이십 대의 마지막 해를 맞이한 수양 대군은 무가이가 예언하고 한명회도 누설한 훗날의 기회를 위해 본심을 감추고 눈물을 흘리며 애틋하게 물었다.
“우리 현동이는 어찌 지내고 있는가?”
“도원군께오선,”
그 눈물에도 동요하지 않고 조창의는 두 손으로 세종께서 따로 쓰신 사적인 서신을 두 손으로 수양 대군에게 건넸다.
“신빈 자가의 양화당에서 잘 지내고 계십니다. 중전마마께서 때때로 중궁전으로 부르셔 각별하게 신경을 써 주시고, 전하께서도 좋은 말 한 필을 내려주셨습니다. 또한 전하께서 따로 서신을 보내셨으니, 읽어 보소서.”
“···신빈께 또 신세를 지는군.”
어릴 적 나를 돌본 신빈이 우리 아들까지 돌봐주시다니, 중얼거리며 수양 대군은 조창의를 물렸다.
“수양 형님, 형님께서도 대전 내관과 함께 곧 출항하셔야지요. 먼 길 돌아오셨는데 몸 추스르실 시간도 없이 다시 항해에 나서게 되어 고단하실 것이나 한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이 아우의 마음이 참으로 기쁘옵니다.”
양 귀인의 소생 한남군 이어가 앳된 얼굴에 환한 웃음을 가득 채우며 그리웠던 조선의 음식을 한 상 가득 들여오게 하였다.
‘이 잡놈이 지금 내 처지를 조롱하는 것인가.’
한번 꼬인 마음은 모든 걸 왜곡하게 듣게 하였다.
권가가 세자를 사로잡으면서 궐의 내명부에서도 이상하게 귀인 양씨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권가를 단장하여 형님의 처소에 밀어 넣은 것이 양 귀인이라더니, 과연 그 공을 인정받아 양씨의 큰아들 저 애송이도 지금 여기 도지 가문의 영토 상송포에 큰 저택을 점유하고 일본과 조선 사이의 무역을 책임지고 있다.
처음 도지 가문과 친분을 개척한 사람이 바로 나, 이유거늘!
그에 비해 자신을 키워주고 이제 아들까지 돌봐주고 있는 신빈의 세력은 날로 약화되어 신빈의 장자 서동생 계양군도 안평의 밑에서 석탄 광산을 관리하는 수모를 겪고 있으니. 대체 어찌하여!
“동생이 참으로 공이 많구나. 도지 가문의 후원 하에 동과 유황 등을 무역하여 조선으로 실어 보내고 있다고?”
“예, 형님. 그런데 형님 저하께서 여기는 차차 다른 이에게 맡기고 저는 대내전의 다다량포((多多良浦)로 옮겨가라 하셨습니다.”
수양 대군은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며 처치 곤란한 코끼리나 바치는 우스꽝스러운 대내씨 지역으로 세자가 왜 한남군을 옮겨가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선 여기, 중국과 유구국 등의 교역의 중심이 되는 상송포 거점을 자신의 인사로 다시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기뻐하면서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먼 이역에서 네가 고생이 많구나. 제수씨도 없이 얼마나 쓸쓸하겠어?”
“다다량포로 가면 안사람도 그리로 올 것입니다. 허나, 제 처지가 어찌 형님만 하겠습니까? 중전마마께서 곧 형님을 위해 좋은 인연을 찾아주실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란 위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
한남군은 아내를 잃은 형님을 위로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수양 대군은 또 깊게 깊게 원한을 쌓았다.
한남군과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한 후.
수양 대군은 늘 지근거리에서 보호를 구실로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는 수륙군 출신 호위를 모두 물리고 홀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 전하께서 보내오신 서신을 펼쳤다.
[둘째야.
종사에 큰 죄를 지었다 하나 네게는 애틋했던 이를 보내고 나라를 위해 떠난 항해 길이 고단했을 것이다. 들끓는 심사로 괴로울 너를 생각할 때마다 이 아비의 마음도 무척 아팠느니라.]
서신은 아바마마께서 창제하신 정음으로 쓰여 있었다.
음과 훈을 한 번 더 곱씹어야 하는 한문이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말하듯 읽히는 정음으로 다정하게 쓰인 서신의 서두를 읽는 순간, 수양 대군의 심장이 쿵쿵,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바마마께서 드디어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시는구나.‘
수양 대군은 서둘러 그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환해졌던 표정은 점점 굳어진 얼굴로 변하였다.
서신의 내용이 처음의 다정한 위로와 다르게 점점 더 의미심장하게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어찌 그냥 일어나겠느냐. 이 일의 처음이 죽은 이의 잔혹함에서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네 형에게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기 위해 직접 주역을 가르치는 것을 네가 알고 너 또한 따로 스승을 통해 주역을 공부한 줄을 내가 안다.
유야.
정치에 관한 논어의 가르침을 단 하나로 정리한다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듯, 주역의 예순네 개의 괘 중 이 아비가 네게 주고 싶은 괘는 마흔두 번째 괘인 풍뢰익(風雷益)이다. 이 익괘의 뜻을 궁구하여 한양에 와 나를 볼 때 왜 내가 네게 이 괘를 깊게 사유하도록 명했는지 네 해석을 고하거라.]
수양 대군은 형편없이 얼굴을 구겼다.
굳이 풍뢰익 괘의 해석까지 가지 않더라도 신하로서, 아들로서의 본분을 잊지 말라 경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무엇을 행하였다고! 무엇을!”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거늘! 행동은 지극히 효성스러운 아들이자 순종하는 동생이었거늘, 대체, 무엇 때문에!
수양 대군은 넘실거리는 바다 너머 북쪽을 향해 악을 썼다.
권윤서도, 그리하여 이향도 세종도 모두 자신이 역사에서 지었던 대역죄를 미리 경계하고 징치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징치가 미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저 먼 이역의 땅에서 스스로의 기회를 개척할 기회를 주는 것임을 알 도리가 없는 수양 대군은 목이 쉬도록 억울함을 토해낸 후에야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가면을 쓰듯 표정을 다시 골랐다.
바라시는 대로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이자 효성스러운 아들의 표정이었다. 이것이 끝내 가면으로 머무를지 아니면 진실로 자신의 표정으로 자리 잡을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의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언덕길을 되짚어 내려갈 때까지 수양 대군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왕가의 그림자로 계집이나 후리며 글씨 나부랭이나 끼적이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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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대군이 바다를 향해 광인처럼 원망의 포효를 쏟아내며 새롭게 결의를 다잡을 때.
천추전에 불려와 전하로부터 권윤서의 지식 대행자가 될 운명을 부여받게 된 광평 대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만 벙싯거리다가 이윽고 부르짖었다.
“혀, 형수님은 대체, 정체가, 정체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