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51화 (151/255)

제 151화. 경혜 공주와 문종의 후궁들

열 살이 좀 넘어 보이는 딸과 함께 중전마마 앞에 선 정충경의 처 민씨는 윤서가 평창 군주를 부르자 의아한 기색이었다.

딸 가진 부모여서 그런가, 윤서는 민씨에게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경위를 설명했다.

“따님이 무척 총명하여 학당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들었습니다. 하여 우리 군주 자가와 친우가 되면 좋을 듯하여 이리 초빙한 것입니다.”

“아, 그래서 초대장을 보내주셨군요. 우리 딸 연화가 활달하고 친근하여 자가께 좋은 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 정충경이 작년 초 세상을 떠나면서 정경부인이란 작첩을 회수당했는데도 제석 나례 연회에 초대를 받은 의문이 풀리자 민씨는 차분하게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를 올렸다. 크게 당황하지도 요란스레 기뻐하지도 않는 절제된 모습이었다.

이를 눈여겨보신 소헌 왕후께서 윤서를 향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윤서의 부름을 받고 올라온 희아는 정종의 누이를 보자 대뜸 “학당에서 배우는 것 중 무얼 제일 좋아해?” 하고 물었다.

정종의 누이 정연화는 학당에서 산학을 가르치고 있는 정의 공주의 눈치를 살피더니, 씩씩하게 말하였다.

“산학을 제일 좋아하는데, 조금 더 고급으로 올라가지 못해 아쉬워요”

“오!”

정연화의 대답에 희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윤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저기 자리로 함께 돌아가서 말해도 돼요?”

“예, 그렇게 하세요.”

윤서의 허락에 희아는 정연화에게 “우리 저기 가서 함께 이야기해.” 친근하게 말하며 좀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로 끌고 갔다.

늘 새침한 희아가 대뜸 마음을 풀어놓자 정의 공주가 “둘이 잘 맞긴 할 것 같았지만 저리 스스럼이 없을 리가 없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부군을 보내고 살림이 어렵지는 않으신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시던 소헌 왕후께서 민씨에게 하문하셨다.

“그리운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은, 고모님 예성부부인께서 힘껏 살펴주시는 은혜 덕에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예성부부인은 정충경의 누이로 효령대군의 부인이다. 왕실의 혼맥은 이렇게나 겹겹으로 겹쳐 있었다.

“약소하나마 중전마마를 위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희아의 배필로 정종을 고려해 보시라는 청을 미리 이향에게 받으신 중전마마께서 꼼꼼하게 뜯어보고 계시는데도 민씨는 기품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준비해온 선물을 올렸다.

정성껏 수를 놓은 버선 두 켤레였다.

소박하면서도 마음이 듬뿍 담긴 선물을 바치는 민씨를 보며 윤서는 며칠 전 이향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사내가 다정하기만 해서 무엇에 쓴다고.”

윤서가 이번 나례 연회에 정종의 모친과 그 누이를 초대해 희아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고하며, 지난 역사에서 정종이 희아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다정남이었다고 말했을 때 이향이 한 말이었다.

꼭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으레 사위 후보라면 반대부터 하고 보는 세상의 모든 딸 바보 아빠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면서도 이향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윤서는 역사 속에서 홍위와 희아에게 일어났던 참혹한 일을 상세히 입에 담는 것을 의식적으로 꺼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너무 아픈 데다가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올 때 그 말에 의념이 실려 조금이라도 원래 역사에 가깝게 실현될까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윤서는,

“여러 역경에도 끝까지 다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희아가 외롭게 자라서 저는 희아의 배우자는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라고만 말했다.

희아가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지만 속에 얼마나 격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익히 경험한 윤서는 그래서 희아에게 따스한 인연이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리미리 알게 해주고 싶었다. 나이 차 많이 나는 홍위와 금똥이 외에 마음 터놓을 또래 자매가 없다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정종의 누이도 꿋꿋한 여인이었습니다. 우리 희아는 혼인을 하고서도 산학과 여러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할 터인데 가풍이 여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장려하는 분위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서는 정종의 누이 정연화가 영응 대군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가 이혼당한 후 스스로를 ‘기별부인(棄別夫人, 버림받은 부인)이라 당당히 칭하며 경혜 공주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 이야기만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만으로도 딸의 기막혔던 처지에 너무 가슴이 아픈 듯 윤서를 끌어안고 거친 숨을 내쉬던 이향은 “정연화는 이번 생애에서 염이(영응 대군)와 혼인할 일은 없다.” 하고 지난 역사와의 결별을 확실히 선언하였다.

******

무품의 공주, 옹주부터 빈과 귀인, 대군 부인 등 품계에 따라 차례로 인사를 드리고 선물을 받는 긴 순서 끝에 오늘 참석한 여인들 가운데 가장 낮은 품계인 승휘의 차례가 왔다.

정 승휘를 필두로 양 승휘와 작은 권 승휘, 문 승휘가 차례로 올라와 중전마마와 윤서 앞에 허리를 깊게 굽혔다. 선아를 낳은 양 사칙과 아이가 없는 장 사칙은 정식 후궁의 품계를 받지 못해 단상에 오르지도 못했다.

소헌 왕후께서는 남몰래 찾아와 울던 정 승휘와 문 승휘의 굳은 얼굴과, 밝은 얼굴로 윤서를 보면서 웃고 있는 유 승휘와 권 승휘 얼굴을 살피셨다.

’둘은 윤서를 원망하고, 둘은 윤서를 제법 좋아하는구나.‘

후궁들 사이에 확연히 갈리는 호감의 차이를 살피며 소헌 왕후는 윤서가 너무도 연모하기에 세자를 다른 후궁과 나눠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한 후, 세자가 따로 찾아와 고한 말을 되새김 하였다.

“제가 이미 들인 후궁을 품지 않는 것이 지아비 된 자로서 매정하고 박정한 처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윤서와 관계없이 제 마음이 그러한 것입니다, 어마마마. 제가 본시 여색에 관심이 없어 어마마마의 근심이 깊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던 소자가 유일하게 마음에 품어 연모하게 된 여인이 홍위의 목숨을 구하고 희아를 따뜻하게 보살피고 금똥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모로 우리 왕실과 조선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제 여인을 위해 어미인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 옛날, 선친과 숙부께서 혹독한 고신 끝에 돌아가시고 그 딸인 자신마저 폐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빗발칠 때 곡기를 끊고 누워 있던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키던 전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였다.

물론 그 이후 전하는 쉴 새 없이 수많은 여인을 안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누가 알겠는가.

소헌 왕후께선 전하도 선왕 태종께서 승하하신 후에야 본격적으로 여색을 탐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향이도 훗날 어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제가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간곡히 고하는 세자에게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다만 왕손이 더 있어야 하니 그 점만 신경 쓰거라.” 말씀하였던 것이었다.

소헌 왕후는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받으신 후 덕담과 훈계의 답례 말을 꺼내셨다.

“새해가 되면 여기 권 승휘가 중전에 오르고 너희도 새 품계를 받아 내명부의 주요 일을 맡게 될 것이다. 동궁의 후궁으로 있을 때는 그저 윗전의 명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지만, 숙의니 소용이니 하는 임금의 후궁 직책에는 궐 내의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그에 필요한 예산을 차질 없이 집행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따른다. 그러니 마음을 다해 일을 익히고 또한 충심으로 전하와 중전을 보필해야 할 것이다.”

“예, 중전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중전마마.”

“심려 마옵소서, 중전마마. 마음을 다해 보필하겠나이다.”

모두 대답은 시원시원하였다.

그간 동궁의 후궁 모두 혜민국에 나가 장부 보는 법, 사람 쓰는 법 등을 배웠다고 하니 임금의 후궁으로 승진해서도 잘 할 수 있으리라.

소헌 왕후께서 그리 생각하시며 마음을 놓으실 때 마침 근정전 월대 위에 높게 세워진 괘종시계가 해시(밤 9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이제 경회루 앞에서 처용무를 추고 악귀를 쫓아내는 포를 세 발 쏘는 마지막 순서가 곧 시작될 것이다.

“그럼, 장차의 중전께서도 할 말씀이 있을 것이니, 듣고서 건너들 오너라. 나는 먼저 경회루로 갈 것이니.”

윤서에게 말할 기회를 만들어주신 중전께서 자리에 일어나려 하자 뒤에 서 있던 중궁전 지밀 최 상궁이 재빨리 손을 부축했다.

이것이 신호가 되어 공주와 옹주, 다른 대군 부인과 종친의 부인들, 관료의 부인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경회루로 옮겨 갈 차비를 하기 시작했다.

발밑을 밝히기 위해 등롱을 든 나인과 내관이 앞장서고, 그 뒤를 중전마마와 정의 공주를 필두로 서쪽으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어느새 사정전 뜰과 단상에는 윤서와 네 명의 후궁,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궁인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

“잠시 앉으시지요.”

윤서는 자신만 앉아 있기가 뭐해 옆에 빈자리에 앉으라 말하였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 승휘가 덥석 차가운 판자 위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

윤서가 놀라 일어서라고 말하려 하자 유 승휘가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권위를 세워야 할 땐 확실하게 세우셔야 합니다!‘

반짝이는 유 승휘의 눈이 그리 고하고 있었다.

유 승휘의 모습을 본 작은 권 승휘도 재빨리 옆에 꿇어앉았다.

네 명의 승휘 중 둘이 공손히 꿇어앉자 정 승휘도, 문 승휘도 마지못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 않아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 하던 차입니다.”

윤서는 네 명의 눈을 차례로 맞추며 천천히 심중의 말을 꺼내 놓았다.

“내명부에서 여러분은 각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맡게 될 것입니다. 권한과 예산과 인력은 확실하게 보장하고 잘할 때의 보상도 확실하게 할 것입니다. 물론 잘못되었을 때의 책임도 혹독하게 물을 것입니다. 제가 중전으로 즉위한 직후 받으시는 품계에 따라 맡게 된 일은 보름 내에 파악하여 보고서 형태로 내게 제출하세요. 그러면 거기에서 뺄 것과 더할 것을 함께 정할 것입니다.”

윤서의 말이 이어지자 유 승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머지않아 궐을 나가게 될 작은 권 승휘는 빙긋빙긋 웃기만 하는데,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있던 정 승휘가 흐흑, 울음을 터트렸다.

“왜 진정 나누어야 할 임무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

“!”

“!”

나머지 세 명의 승휘가 일제히 정 승휘를 응시하였지만 그 눈빛은 각자 다 달랐다.

“여러 학식이 높아 천추전에서 전하와 독대까지 하시지 않습니까? 성현의 말씀에 따라 마땅히 저희 후궁과 나눠야 할 임무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문 승휘는 격렬하게 동의를 표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유 승휘는 흥미진진, 자신이 즐겨 쓰는 궁중 암투에 등장할 법한 장면이라고 흥미로 번뜩이는 눈빛으로 윤서와 정 승휘를 번갈아 주시하였다. 이미 정인이 따로 있어 궐 생활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작은 권 승휘는 피곤한 듯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였다.

“성현께서 말씀하셨다는 그 임무가 무엇이오? 아니, 그 임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정 승휘.”

윤서는 자신이 매정하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처사는 저들이 역사에서 우리 홍위와 희아에게 매정하였던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조차 되지 않는 점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급변할 조선의 정국에서 서로 이익과 권력을 두고 맹렬하게 부딪칠 여러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이향의 또 다른 핏줄이 있어 불온한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윤서는 기꺼이 매정을 넘어 잔혹해지기로 하였으니.

“정 승휘는 정 승휘 한 개인뿐 아니라 정씨 가문 전체의 명운도 함께 짊어진 것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 세자 저하의 조선에서 정 승휘가 어떻게 자신의 임무를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 승휘 개인의 안락뿐 아니라 가문의 영화까지 함께 달라질 것이니, 신중하게, 오래, 부디 잘 생각하고 말씀하세요, 정 승휘. 그대가 진실로 그 임무를 감당할 역량이 되는지. 그것이 꿈꾼다고 하여 과연 손에 쥘 수 있는 임무인지. 오래, 신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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