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화. 평민이 왕족이 된다는 것 (2)
윤서는 눈을 꾹 감았다.
지존의 중전마마 앞에서 한낱 승휘 따위가 눈을 꾹 감고 대꾸하지 않는 것은 예나 21세기나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라고 욕을 들을 행위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을 상담하는 일을 해오면서 목격한 진리 하나는,
간절한 바람을 자신마저 외면할 때 정신과 육체는 여러 가지 징조로 일종의 복수를 해온다는 사실이다. 갖가지 질병이 온다든가, 우울증이 온다든가, 어딜 다치게 된다든가.
그리하여 삶은 그 특유의 생기를 잃고 흐릿한 잿빛의 나날로 퇴색하게 된다.
지금 윤서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타협해서도 안 되는 마지노 선이 어디인가를 들여다봐야 할 때였다.
무엇을 가장 크게 욕망하는가.
인간은 가장 큰 욕망을 위해 다른 작은 욕망들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존재다.
왕이 되기 위해, 권력자가 되기 위해 형제와 아버지와 아들을 죽이는 것, 어여뻐 살까지 섞어 자식을 만든 이까지 죽일 수 있는 것 모두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 모든 욕망을 절대적으로 압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윤서는 자신에게 묻는다.
‘중전이 되고 싶은가.’
15세기 조선에서 중전이 되는 요건이 내 사내의 다른 여인들까지 포용하는 것이라면, 세종의 명에 의해 이향과 동침하게 되었을 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몸을 씻고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천 길처럼 멀어만 보이던 비현각까지 어두운 길을 걸어가 단 하나 요구하였던 ‘다른 여인과 당신을 나눌 수 없다’는 조건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윤서는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다른 여인과 이향을 나누면서까지 중전이 되어야 하는가. 나의 가장 큰 욕망이 ‘중전의 지위’인가’
욕망은 때로 가장 지키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 지키고 싶은 신념을 위해서 자신의 강력한 바람을 포기하는 형태를 가지기도 한다.
그럼 다시 물어야 한다.
‘나만큼 혹은 나 이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중전이라는 권력이 반드시 필요한가.’
우리 홍위는 곧 세자가 될 것이다.
원래 역사보다 5년 일찍 세자가 될 것이고, 그리고 원래 역사보다 이향이 훨씬 더 강력한 군주로 오래오래 살 것이다.
무엇보다 이향은 미래의 비극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천재 세종께서는 대강의 모습을 추론해내셨으니. 게다가 이향은 여색에 빠져 늦게 태어난 아들을 위해 홍위를 위태롭게 할 유형의 성품이 아니다.
그러니 원래 역사와 비교하여도, 역대 다른 왕에 비해서도 홍위의 지금 입지는 절대 흔들릴 수 없이 굳건하다.
‘그리고 내겐 조직이 있다.’
아직 매금이의 조직이 완전히 해체한 것이 아니고, 순덕이 이끄는 의녀 무리가 있다. 그러니 정말로 필요한 순간이 오면 서슴없이 손을 써 홍위를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할 것이다.
우리 홍위가 “어먼니” 하고 부를 때마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기분에 휩싸이지만, 혀짤배기 발음으로 “거가 나잉야”하고 불렀을 때도 여전히 가슴 벅차게 따스해 이 낯선 조선 땅에 마음 붙이고 살 용기를 주었으니,
앞으로 “어마마마”가 아닌 여전히 “권 숙의”든 아니면 그냥 “권가”든 그 무엇으로 부르든, 불러주는 음색과 시선의 따스함으로 여전히 행복할 것이다.
그럼 우리 금똥이는.
윤서가 중전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금똥이는, 아니 이제 새해가 되면 ‘이윤(李潤)이란 휘를 받기로 되어 있는 금똥이는 처음부터 왕가의 서자였다.
15세기 왕가의 서자란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만 받지 않는다면 고귀하고 풍요롭게, 왕과 정치의 영역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되고 싶은 한량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천하의 가장 좋은 상팔자.
현대에서라면 아이의 성장 환경을 위해 배우자의 외도를 한 번 더 재고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의 왕실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어미의 신분이 무엇이든 왕의 서자는 이미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이기 때문이다.
궁중에 음험한 촉수를 심어놓았던 윤씨가 사라진 지금 금똥이는 군주의 고단한 의무를 짊어져야 할 홍위보다 훨씬 더 큰 행운을 걸머쥐었다는 것이 윤서의 판단이었다.
홍위와 금똥이, 얼마 있다가 혼인하여 하가 할 희아, 그리고 곧 지존의 될 이향을 제외하고 윤서에게 지켜야 할 다른 가족은 없다. 중전이 되길 거부하고 직책뿐인 후궁으로 남길 주장한다고 하여 금똥이를 빼앗아 가진 않을 것이니, 결국 남편으로서의 이향만 잃게 되는 것이다.
아니 박 상궁 마마님과 매금이가 있지만, 그 둘은 중전이 되고 말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맺어진 관계이니.
그리하여 윤서는 또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은 무엇이었는가?’
윤서가 가지고 싶은 가정의 모습은, 부모님과 자신이 살아온 것 같은 가정의 모습이었다.
가족으로 묶여 있어도 함부로 개인의 영역까지 침범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집이 사회적 가면을 벗고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평안히 머물 공간이 되는 것. 세상의 모두가 나를 저주한다 하여도 가족만큼은 두 팔 벌려 안아주며 그저 토닥여주시리라는 믿음이 주는 강력한 심리적 지지대.
부모님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 세상 전체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더 무너지면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슬퍼하실 것이기에 결국 추스를 수 있었던 그 단단한 심리적 안전지대.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인 요건도 정신적인 요건도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전형적인 중상의 삶을 조건을 가진 자가 누리는 일종의 특혜였다는 것을 윤서는 모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무엇으로 살고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
윤서가 아는 행복은, 삶의 의미는 결코 권력에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순교를 택하듯,
윤서는 사내를 나누면서까지 권력의 삶에 올라서는 대신 사내를 포기하고 최소의 평안을 지키기로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향을 사랑하는지와 별개의, 인간으로서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한 줌의 신념과 존엄 같은 것이었다.
실은 이 생각의 흐름은 여러 번 글로 정리하여 철제의 금고에 넣어둔 것으로,
이미 열 장이 넘는 다양한 상황의 시나리오 속에서 매번 번번이 같은 결론으로 지어졌던 문제였다.
누군가 요구해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요구하기 전부터 이미 선명하게 결론이 내려져 있던 문제.
중전이 되고 난 후라면 한참 곤란하였을 터인데 아직 일개 후궁의 자리, 아직은 무리 없이 물러설 수 있는 자리, 그리고 이미 음험한 정적은 제거한 상태에서 요구받게 되어 다행이다.
생각하며 권윤서는 눈을 떴다.
“······.”
중전마마께서 물끄러미 윤서를 바라보고 계셨다.
때마침 마차는 달각달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광화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윤서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아뢰었다.
“중전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는 그냥, 후궁으로 혹은 상궁으로, 그 무엇으로 살고 싶습니다.”
“!?”
소헌 왕후는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가, 노여워지고 말았다. 세자의 절대적인 총애를 믿고 감히 중전인 자신에게까지 오만방자하게 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왕실에 버금가던 막강한 명문가 출신으로 왕비에 오른 여인으로서는 신념을 위해 왕비 자리, 아내의 자리를 마다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아예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21세기 대개의 여인이 권력을 위해 남편을 다른 여인과 나눌 수도 있다고 차마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범주의, 각자 시대의 한계라는 것을 윤서는 잘 알았다.
그래서 윤서는 다시 공손하게 고하였다.
“한미한 출신으로 이만큼 오른 것만도 감읍할 일이오니, 이대로 뒤로 물러서 왕실을 보필하는 데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하!”
실은 다른 후궁을 용납할 수 없어 저리 겸손한 듯 포장하는 것을 내 모를쏘냐!
소헌 왕후는 뒷목이 짜르르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서도 이 마차에는 손주들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
마침 격하게 내지른 탄식에 눈을 비비는 홍위와, 또 옆에서 슬그머니 몸을 떼어내는 희아가 있었다.
그래서 소헌 왕후는 ‘네가 감히 중전인 나를 능멸하려 드느냐!’ 외치시는 대신 이 일의 최종결정권자 세종을 소환했다.
“이따 전하 앞에서 고하거라.”
“예, 중전마마, 송구하옵니다.”
때마침 마차는 광화문을 통과하여 흥례문 앞 광장에 도착하였다.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중전마마의 환궁을 알리는 장엄한 징 소리와 함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마차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두 줄로 언 땅 위에 엎드려 있는 중궁전의 궁인과, 마찬가지로 엎드린 궁인을 뒤에 두고 허리까지 깊게 고개를 숙인 신빈 김씨, 양 귀인 등 아홉 명의 임금의 후궁과, 정 승휘, 민 승휘, 유 승휘 등 이향의 후궁들이 보였다.
중궁전 지밀 나인 둘이 발 받침대를 놓았을 때, 중전마마께서는 굳어진 얼굴로 먼저 마차에서 내리셨다.
윤서도 받침대를 딛고 내려 아이들을 차례로 안아 내렸다.
무표정하게 내린 희아는 뒤따라온 유모 백씨와 제 나인에게 가지 않고 윤서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금똥이는 두 팔을 활짝 핀 매금이 품에 폭 안겨 방싯방싯 웃는데, 가장 나중에 내린 홍위는 윤서 품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홍위는 ‘거가 나잉’에게 하였듯 윤서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잠에서 깨지 않은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들었구나.’
국대부인 사가에서 심회의 아들들과 자치기를 하며 한참을 논 참이라 곤하여 깊게 잠이 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어릴 적 엄마와 아빠 사이의 아주 드문 냉랭함을 윤서도 예리하게 알아차리곤 했다. 평소처럼 말을 하고 웃으셔도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알아차리는 비상한 재주가 아이들에겐 있다. 어른들에게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진화의 조건이 그리 만드는 것이리라.
“세손 아기씨.”
윤서가 부드럽게 부르자 홍위는 오히려 더욱 목을 당겨 안으며 품을 파고들었다.
벌써 궁중 여악(女樂)은 색색의 종이로 만든 꽃을 뿌리며
[만백성의 어머니 궐에 돌아오시니
오색 무지개가 걸린 듯 사방이 환해집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노래를 하는데, 다른 때 같으면 세손다운 위엄을 팍팍 풍기며 의젓하게 엎드린 궁인의 인사를 받을 홍위가 아기라도 된 듯 윤서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
“······!”
게다가 평소 얼음처럼 냉정한 희아까지 옆으로 와, 윤서의 한 손을 찾아 쥐었다.
그것은 생겨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사랑을 잃어본 적 없기에 매금이의 품에서 여전히 방싯거리며 음악에 맞춰 발을 까딱이고 있는 금똥이와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위기를 느낀 포유류가 동료의 곁을 파고들어 온기를 구하듯,
두 아이는 겨우 가지게 된 ‘어머니’란 존재를 다시 잃을 수 없다는 듯 윤서의 손을, 품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두 적통 왕손을 앞세워 벌써부터 톡톡히 유세를 부린다는 시기와 부러움 짙은 추앙의 날 선 시선 속에서
윤서는 숨이 턱턱 막히도록,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윤서는 마음을 다잡고 유려하게 흐르는 노랫가락 사이로 두 아이에게 속삭였다.
“제가 무엇이 되든 또 어떻게 되든 두 분은 언제나 제가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우리 아기씨’예요.”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목을 죄었던 홍위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나 많이 컸다고 해봐야 고작 다섯 살, 어린 홍위는 윤서의 귀에 울먹거리며, 더듬더듬 속삭였다.
“···그치만, 어먼님이 아니잖아. 난, 금똥이처염, ···어먼니가, 갖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