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44화 (144/255)

제 144화. 평민이 왕족이 된다는 것 (1)

연희궁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하는 길, 소헌 왕후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친정어머니 국대부인 안씨의 저택에 들르시길 원하셨다.

“저도 함께 가서 뵙고 싶어요. 증손주들도 함께 가서 인사드리면 더 기뻐하실 것 같은데요.”

윤서도 아이들과 함께 병문안을 할 수 있게 부탁드렸다.

궐에 돌아가면 이향이 즉위식을 올리기까지 짬을 내기 어려울 것인데, 견습 의원이 되어 국대부인의 치료를 보조하고 있는 작은 권 승휘가 내년 봄을 넘기시기가 어려워 보인다고 윤서에게 서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마차가 저택 앞에 이르렀을 때 소헌 왕후의 남동생이며 집안 식솔 모두가 나와서 언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소헌 왕후는 남동생 심회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실 때부터 눈물을 흘리셨다. 자신이 왕비가 된 탓에 풍비박산이 났던 친정이 역설적으로 왕비인 덕에 어머니와 남동생이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심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신 듯했다.

“진외증조모님을 뵈면 절을 하셔야 해요.”

윤서는 한 손으로는 금똥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홍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따라 들어가며 속삭였다.

“신분은 세손과 자가께서 더 높다고 하나, 여긴 사가이니 예를 갖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그여게 하께요, 어먼니.”

홍위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홍위의 다른 쪽 손을 잡은 평창 군주 희아는 골똘하게 생각한 후,

“법도에는 어긋나는데, 할마마마께서 계시니 괜찮을 거야.”

하고 신중하게 말했다.

진외증조모 국대부인의 신분은 회복되었지만, 진외종조부 심회 등의 신분은 여전히 벼슬에 나서는 것을 금지당한 역적 가문의 후손이란 걸 말하는 것이었다.

“······.”

윤서는 때로 태어날 때부터 왕족인 이들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신분 의식에 놀라곤 한다.

“어머니, 어머니.”

안방에 들어간 소헌 왕후가 조심스럽게 친정어머니 안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자글자글한 주름 속에 깊게 파묻혀 있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가고, 탁한 회백색 눈동자가 공허하게 천정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옥이가 왔어요. 증손주들도 함께 왔어요.”

소헌 왕후가 버썩 마른 손을 붙들고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고개가 천천히 딸의 얼굴로 향하였다. 이윽고 죽어 있던 눈동자에 반짝 희미한 생기가 돋았다.

“···옥이, 우리 애, 기.”

칠십이 넘은 노모가 오십이 넘은 지존의 여인을 ‘애기’라고 부르며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보이셨다.

“예, 어머니. 애기, 왔어요.”

소헌 왕후는 친정어머니 손을 뺨에 가져다 댄 채 울음을 삼키기 위해 어깨를 떠셨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애달파 보여, 윤서도 눈물이 나, 잡고 있던 홍위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엊그제 어의가 또 와서 진맥을 하고 탕약을 지어주었습니다. 또 권 승휘 마마님이 때때로 의녀와 함께 약초 달인 물을 수건에 적셔 부드럽게 닦아주시니, 한결 더 평안해하십니다, 중전마마.”

소헌 왕후의 남동생 심회가 함께 눈물을 글썽이며 누이를 위로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눈물을 그친 소헌 왕후께서 윤서와 세 아이들을 가리켜 보였다.

“어머니, 증손들도 왔어요. 장차 중전이 될 제 며느리도 왔고요.”

문가에 서 있던 윤서는 아이들과 함께 소헌 왕후 뒤로 갔다. 그리고 바닥에 금똥이를 내려놓고, 홍위와 희아와 함께 절을 올리려 하였다.

“세손 각하께선 절을 하시지 마시옵소서.”

심회가 화급히 홍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한 어조로 고하였다.

“예에 어긋나 감당할 수 없음이옵니다.”

“···하오나 여긴 궐이 아니온데,”

윤서가 말하려는데, 소헌 왕후께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시며 고개를 흔드셨다. 더 말하지 말라는 명이셨다. 여기서 더 책을 잡히면 벼슬도 못하고 있는 우리 가문이 더욱 위태롭게 된다는 뜻이셨다.

“홍위야, 너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드려. 절은 내가 올릴 터이니.”

늘 판단이 명철한 희아가 나서서 사태를 정리했다.

“응, 그여케 하께.”

눈치 빠른 홍위가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이며 외쳤다.

“진외증조모님, 건강하시옵소서. 저는 세손 홍위옵니다.”

홍위가 씩씩하게 외쳐준 덕분에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풀렸다.

윤서는 희아와 함께 두 손을 이마에 모으고 절을 올리고, “건강하시기 바라옵니다.” 하고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국대부인께서는 중전마마께 잡힌 손을 빼내어 아이들을 향해 손짓하셨다.

중전마마께서 옆으로 물러나시고, 홍위가 성큼 걸어가 두 손으로 증조할머님의 손을 살갑게 잡고, 희아도 그 곁에서 가까이 다가앉았다.

“건강해지셔서 봄에 중전마마와 함께 온천욕을 하실 수 있길 바라옵니다, 외조모님.”

윤서가 말씀 올리며 금똥이를 안고 홍위 옆에 앉았다.

금똥이는 생전 처음 본 늙은 할머니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국대부인과 중전마마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하마, 하마” 외치며 중전마마 품을 파고들었다.

“금똥이, 진외증조할머니께 뽀뽀해 드릴래?”

소헌 왕후가 말씀하시자, 요새 보는 사람마다 얼굴에 뽀뽀해 주는 법을 배운 금똥이가 발발 기어가 국대부인의 주름 깊은 이마에 입술을 꾹 대었다..

“금똥아, 인제 인너나. 증조모님 힘드셔.”

홍위가 자꾸 뽀뽀하는 금똥이를 안아 올리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금똥이는 “하마, 하마!” 하면서 국대부인의 주름을 신기한 듯 잡아 보려 하였다.

혹여 다치실까 윤서가 화급히 금똥이를 안아 올리는데, 물기 어린 회색의 눈동자가 너는 누구냐는 듯 윤서를 의아하게 바라보셨다.

“예, 외조모님. 제가 외손주 며느리 윤서이옵니다.”

윤서가 금똥이를 당겨 안고 말씀을 올리자, 국대부인께서 윤서의 얼굴을 한참 보시더니 옆으로 물러나 앉아 있는 딸 소헌 왕후의 얼굴을 보시고 다시 윤서를 향해 주름진 입술을 무어라 오물거리셨다.

“······?”

무어라 하시는지 알아듣기 어려워 윤서는 금똥이를 중전마마께 안기고, 고개를 숙여 부인의 입술 가까이 귀를 대었다.

이번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너, 는, 부디, 우리 애기, 애기처럼, 되지, 않았으면······.”

“!”

이번 말씀은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었다.

“어, 어머니, 탕약 드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기력이 부족하셔서,”

심회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으며 윤서와 아이들의 낯빛을 살폈다.

윤서는 그만 마음이 아파지고 말았다.

‘중전마마께서 장차 대비에 오르실 터인데 아직도 이렇게 외척은 어렵기만 한 자리란 말인가.’

윤서는 기력이 쇠잔하게 가랑가랑 숨을 내쉬는 국대부인을 향해 공손히 엎드려 고하였다.

“예, 외조모님. 중전마마를 본받아 효심을 다하고 왕손을 잘 보필하겠습니다.”

“진외증조모님, 심여 마옵소서. 제가 함마마마와 어먼니께 효도핫 것입니다.”

홍위도 살갑게 나서 준 덕분에 긴장된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졌지만, 중전마마께서는 윤서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셨다.

“!”

왜 저런 눈길로 바라보시는가 궁금해하던 윤서는 불현듯 깨달았다.

중전마마의 딱한 눈초리는 비록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너의 친정 식솔도 아직 신원되지 못한 채 관노로 있어 어떻게 하느냐는 동정의 눈빛이셨다.

그제야 윤서는 원래 이 몸의 주인 권가의 친정 식구들이 저 멀리 외방에 귀양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권가가 속옷 하나 해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탈탈 착취하다가 급기야 거짓 빚 문서로 흉한 무리에게 팔아버리려 했던 친모와 의붓동생이었기에 윤서는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향도 윤서가 권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외방에 관노로 놓아둘 순 없다.’

장차 중전이 되면 그들이 또 어떻게 물의를 일으킬지 모른다. 윤서는 궐에 돌아가자마자 권가의 어머니와 의붓동생 최가은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올려 얌전히 먹고 살 정도의 보살핌은 해주며 단단히 감시하여야겠다고 다짐하였다.

****

“실감이, 나느냐?”

궐에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규칙적으로 다각다각 움직이는 마차의 진동에 잠이 들었을 때 중전마마께서 문득 물으셨다.

“네가 아이들과 함께 내 어머니를 문병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어여뻐서도 함께 갔지만, 그것뿐이겠느냐?”

윤서는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품 안에 잠든 금똥이와, 옆에서 기대 잠든 홍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골랐다.

“친정이 한미한지라 큰일을 벌이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한미하고 말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느니라. 늘 필요와 명분이 중요하지”

말씀하시며 중전께서는 윤서가 홍위와 금똥이를 동시에 토닥거리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옆에 잠든 희아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다시 말씀하셨다.

“승은을 입은 후궁으로 세자빈이 되고 중전이 되는 것은 네가 처음이다, 윤서야. 폐빈이 둘이나 나왔다고 해도 네가 우리 홍위를 구하는 공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내명부 수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야.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윤씨가 죽고 수양 대군이 작위를 박탈당하고 해외로 무역을 나가게 된 후, 소헌 왕후는 윤서에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셨다.

그건 손주를 지켜주어 고맙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과 또 아끼던 며느리를 위태롭게 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경고하시는 모정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울적할 때 와서 안기는 금똥이는 몹시 귀여워하셨지만, 윤서에게는 전에 하듯 속내를 풀어놓거나 가르침을 주거나 하질 않으셨다.

그러나 연희궁에서 보낸 며칠 내내 윤서가 홍위와 아이들에게 하는 살가움을 보시고, 오늘 국대부인께 병문안을 가서 보인 친절과, 결국 자신의 처지나 윤서의 처지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신 후 다시 마음을 여신 것이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중전마마.”

윤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세자빈이 아닌 중전이 된다는 소식에 무척 놀라고 긴장한 참이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수많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보았지만 자신이 신데렐라가 되리라고는 꿈을 꿔 본 적이 없었는데, 15세기 조선에서 왕비라니!

나인에서 중전으로 올라선 예가 하필 그 팔자가 기구한 희빈 장씨뿐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저는 고작 나인 출신인지라 부족함이 많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중전마마.”

“오늘 직접 보지 않았더냐? 이씨가 아닌 이로 왕족의 반열에 오른 여인들은 늘 삼가고 또 삼가야 한다는 것을. 그간은 네가 전하를 도와 바깥일을 하느라 실감하지 못하였겠지만 이제 내외명부를 주관하게 되면 느끼게 될 것이다. 본래부터 왕족이었던 공주나 옹주가 얼마나 오만한지를.”

“···예.”

어쩐지 21세기에 아직도 존재하는 왕실이나 황실에 들어가 겉은 화려하게 보이나 실상은 그닥 행복하지 않다던 현대의 신데렐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힘이 세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처음부터 중전으로, 내명부 최고의 자리에서 시작하는데 감히 대드는 것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머리가 부족한 것이다!

윤서가 심호흡을 하며 자신감을 북돋을 때였다.

“그리고······.”

중전마마께서 희아를 당겨서 기대게 하시며 말씀하셨다.

“내일 오후 상의원에서 옷 치수를 재러 협경당으로 갈 것이다. 원래 세자빈으로 책봉식을 올릴 때 입을 검은색 대례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중전 책봉식을 올리게 되었으니 명나라에서 하사받은 붉은색 대삼을 고쳐 수선해 입어야 하고, 또 친잠례 등에 입을 장삼과 평상시 입을 예복도 다 다시 지어야 한다.”

“예. 두 분 아기씨와 금똥이 것까지 함께 지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세자도 지어야 하니 오후에 함께 시간을 맞추거라. 그리고, 윤서야.”

다른 하실 말씀이 계신데 꺼내기가 어려운지 중전마마께서 자꾸 말이 길어지시며 희아를 살폈다. 아이들이 듣기 곤란한 말씀인데 꼭 하셔야 할 말씀이 있으신 듯했다.

“편하게 말씀 하옵소서, 중전마마.”

윤서가 고하자, 중전마마께서는 다시 희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춰 말씀하셨다.

“네가 전하를 도와 여러 큰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고작 학당 하나 운영하는 것도 나로서는 벅찬데, 너는 장차 조선 팔도의 학당을 전하와 함께 세울 계획이 아니더냐.”

뭔가 뒤에 센 것이 기다리고 있다!

윤서는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네가 천추전에서 전하와 그 학당 교재를 만들 때 말이다.”

윤서가 매일 천추전에서 아이들과 함께 전하께 지식을 전한 것은 공식적으로 학당 교재를 만드는 것으로 외부에는 말해졌다.

중전마마께서 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이리 어렵게 말을 돌리시는지, 궁금하면서도 윤서는 어쩐지 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나쁜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정 승휘와 민 승휘가 와서 한참을 울었느니라.”

“!”

“중전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윤서야.”

“······!”

“난들 신빈이 어여쁘기만 했겠느냐? 그는 원래 내 지밀나인이었어. 그래도 어쩌겠느냐? 나는 중전이었다.”

한번은 나와야 할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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