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화. 세종은 우실 듯 일그러진 얼굴로
“칙사 응대에 문제가 생겼는가?”
사흘 뒤 귀경하기로 되어 있는데 굳이 급하게 돌아오라는 금선패를 받고 이향이 대전 내관 조창의에게 물었다.
“아니옵니다. 칙사 대접은 광평 대군과 예조 판서에게 맡기셨사온데, 칙사는 오히려 두창 예방법을 알려달라 청할 정도로 공손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혹여 전하나 중전마마의 옥체가 편치 않으신 것이냐? 그도 아니면 외조모님께서 급박한 상황이신 것이냐?”
“아니옵니다. 모두 무탈하십니다. 다만······.”
추운 겨울날을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며 쉴 새 없이 달려온 대전 내관 조창의의 뺨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원래는 그저 세자를 불러오란 어명뿐이셨지만, 조창의는 길게 망설이지 않았다. 전임 대전 내관 전균이 어찌 죽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전하께옵서 지난 열흘 가까이 천추전에서 내내 권 승휘 마마님과 무엇을 함께하셨습니다.”
“천가야!”
‘권 승휘’란 말이 나오자마자 이향은 호위 내관 천가를 불러들였다.
“당장 가장 빠른 말로 차비하거라. 한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 저하. 빠른 호위도 따로 꾸리겠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권 승휘를 지극히 아끼시는 것이야 익히 알지만, 지금은 이미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한 초저녁이었다.
“하오나 저하. 이미 어두어졌사온데, 내일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별빛이 밝아. 게다가 눈이 쌓여 있어 달릴만하네.”
이향은 황보인을 불러 예정대로 경기 북부 지방의 구휼미 배급 현황과, 봄에 씨를 뿌릴 종묘는 충분한지, 두창 예방 침 접종은 빠짐없이 시행되었는지 꼼꼼히 점검한 후 돌아오라 이르고 관아를 나섰다.
가장 날랜 호위 서른만 거느린 채였다.
쏟아질 듯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 아래 눈 덮인 도로가 거센 말발굽 소리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가와 함께 맨 앞에서 질주하며, 이향은 대충 벌어졌을 일이 무엇일지 짐작을 하였다.
역사와 지리를 가르쳐 드리게 되었다는 서신을 받은 것이 닷새 전이다.
평소 아바마마를 무척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대책 없을 정도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윤서이니 최선을 다해, 그러나 미래의 일을 안다는 사실은 감춘다고 감추면서 서책까지 만들어서 가르쳐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슥 훑어보신 서책의 내용도 빠짐없이 기억하시는 아바마마시니 윤서가 가르쳐 드린 내용의 출처를 모든 서적에서 교차 검증하시는 와중에 뭔가 단서를 잡고 교묘하게 정신없이 더 깊게 들어가도록 밀어붙이셨겠지.
그럼 또 간계를 모르는 우리 윤서는 최선을 다해 답을 드리다가······.
“말씀드리지 말아야 할 미래의 일을 흘리게 된 것이로구나.”
그 미래의 일이 무엇인가. 혹시 수양의 일을 고하게 된 것인가.
이향은 궁금했지만 일단 달리는 행위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무엇을 어떻게 고하였든 권윤서는 장차의 세자빈이고, 홍위와 금똥이의 어미이고, 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여인이니.
아무리 아바마마시라 해도 손을 대실 수 없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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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이 별빛 아래를 달려 한양으로 질주하고 있을 때.
세종께서는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올라 계셨다. 세종의 뒤를 천 상궁만이 묵묵히 따랐다.
마침 보루각 안에 설치된 자격루에서 도르르 쇠 구슬이 구르는 소리가 나고 딸깍 소리와 함께 종이 울리며 술시를 알리는 나무 인형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 자격루의 원리가 어찌 되는지 아느냐?”
세종께서는 듣지도 못하는 천 상궁에게 물으셨다.
“장영실이 이걸 구현해냈을 때 내 무척 기뻤느니라. 드디어 해가 없는 밤에도 시간을 알려줄 기물이 생겨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느냐? 그렇지만, 저길 보거라.”
세종께서 대조전을 가리켜 보이셨다.
대조전을 둘러싼 담장 너머로 월대 위에 크게 세워진 괘종시계가 별빛 아래 굴뚝처럼 우뚝 솟은 형체로 올라와 있었다.
듣지는 못하지만 그간 권 승휘가 정음으로 정리한 내용과 수많은 서책의 내용을 대조하여 정리한 천 상궁은 세종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전하께서 장영실에게 명해 만드신 자격루와 세자께서 군기시에 명해 만들어내신 괘종시계 사이에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나름의 솔직한 판단이었다.
“그렇지. 세자가 이걸 만들 때 함께 거들고 직접 측우기도 고안해냈으나 괘종시계라. 어느 날 갑자기 추의 움직임을 전달하여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를 만들다니, 그것은 거의······.”
윤서가 꾼다는 꿈만큼이나 황당한 일이 아니더냐.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낸 톱니바퀴 동력을 응용해 마차도 만들고, 장차 평지에서 더 많은 짐을 실어 나를 거대한 수레도 만들 것이라 하고, 풀무질도 더 쉽게 할 수 있는 기물도 만들고 있고. 벼 타작도 더 쉽게 하는 것도 만들고 있어.”
자고 일어나면 신기한 것들이 세자의 주도하에 만들어져 나온다.
설계도를 보면 ‘오 이런 원리로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 톱니바퀴를 몰랐더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들이.
“그리고 석탄과 은이 묻혀 있는 곳은 또 어찌 알았다더냐? 석탄을 가져다 때면 나무보다 더 오래 불이 붙어 있다는 것은 또 어찌 알았다더냐? 중국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기록이 여러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천 상궁 네가 확인해 냈다만, 나조차도 읽고 흘려버린 것을 향이는 어찌. 아니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천가야.”
입술을 읽어 말을 알아듣는 천 상궁이 재빨리 다가섰다.
그러나 세종은 불현듯 천 상궁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집중해 읽던 입술을 손으로 가리셨다. 그리고 말없이 계단을 내려와 침전인 강녕전으로 향하시며 멀찌감치 서 있던 내관에게 명하셨다.
“세자는 분명히 밤을 달려 올 것이다. 궐에 들어오면 다른 곳을 들리지 말고 곧바로 강녕전으로 들라 이르거라. 시간은 관계없다.”
명을 내리신 세종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세자가 정무를 주관한 후 만들어내는 모든 변화가 가슴 벅차게 기쁘시면서도, 또한 가슴 한쪽이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팠다.
‘윤서가, 미래를 본다. 그 아이가 미래를 알아서 유를, 우리 유를 그리 처음부터 꺼렸던 것인가. 한사코 살리길 좋아하는 그 아이가 그래서 현동이 어미는 기어코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던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전하! 전하!”
“어아! 어아!”
내관과 천 상궁이 휘청하는 세종을 부축하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종께선 모두의 팔을 다 뿌리치셨다. 그리고 언젠가 윤서가 공포에 젖었을 때 해 보였던 동작처럼 두 팔을 교차하여 스스로를 단단히 껴안으려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움직임을 게을리한 노구는 스스로를 안는 동작조차 쉽게 되지 않았다.
늙은 왕은 지독하게 피로했다.
‘아바마마께서 피로 놓으신 반석 위에서 인의(仁義)를 꽃 피워내고자 일평생 애를 썼거늘. 왜, 대체 왜!’
“예, 전하. 저는 권윤서만은 믿습니다!” 생전 처음 불경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세자의 음성이 이명처럼 귀를 울렸다.
유 너는 네 형의 자리를 탐냈더냐.
그리 널 아껴주는 네 형의 것을, 이 조선의 것을!
기껏해야 여인을 품을 때나 잠깐 풀어놓을 수 있는 부담뿐인 이 자리 따위가 무엇이 좋다고!
세종의 분노와 탄식이 어두운 밤길을 달려오고 있을 큰 아들과, 저 먼 바다 어디를 헤치며 돌아오고 있을 둘째 아들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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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이 궐 안에 든 것은 축시를 훌쩍 넘어 인시(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깊은 밤이었다.
“세자 저하, 곧바로 강녕전으로 듭시라는 어명이십니다.”
광화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관 하나가 등불을 높이 들고 앞장섰다.
“세자 저하, 저희가 따르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가가 허리에 매단 환도를 단단히 쥐며 따르려 하였다.
“어허! 무엄하구나.”
이향은 일갈하며 고삐를 넘기고, 내관을 뒤를 따라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을 지났다.
별빛 아래 조선의 정전인 근정전이 위압적으로 높이 지붕을 펼치고 때마침 월대 위 괘종시계가 인시를 알리며 댕댕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저 멀리 보루각에서도 둥둥 북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저, 세자 저하.”
등불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던 내관이 걸음을 멈추고 이향을 기다렸다가 작게 고하였다.
“전하께오선 초저녁 무척 수심이 깊어 보이셨사오나, 후원 목욕탕에서 한참 온천욕을 하신 후에는 한결 평안해지신 모습으로 깊게 잠이 드셨습니다.”
보는 눈이 드물어지자 대전의 내관이 장차의 군주를 향해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래, 먼저 가서 아바마마께 고한 후, 수라간에 가 타락죽을 쑤라 이르거라. 이른 새벽이니 후루룩 마시기 좋게 묽게 쑤어 올리라 하고, 내의원에 가 경옥고를 달여 올리라 이르거라.”
“예, 세자 저하.”
이향은 뜰에 서 있다가 침전에서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서야 안에 들었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거라.”
침의 위에 솜으로 된 도포와 모피로 안감을 댄 외출용 도포까지 걸쳐 입으신 세종께서 상궁과 나인에게 명하셨다.
안마루로 난 문과, 바깥을 향해 난 분합문까지 모두 열자 겨울의 찬바람이 사정없이 침전 안을 휘저었다.
주무실 때조차 곁에 두시는 서책과, 빼곡하게 무엇인가 적힌 흰 종이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한바탕 찬 기운이 휘몰아쳐 텁텁한 방 안 공기를 몰아낸 후 도로 창문을 닫고 방문까지 모두 닫기까지, 임금과 세자는 묵묵히 마주 앉아 있었다.
지밀 상궁과 나인이 차와 다과 상을 들여 놓고 물러나고서야 이향은 머리에 쓴 이엄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종께 절을 올렸다.
거센 바람 속을 달려오느라 온통 벌겋게 얼어붙은 이향의 뺨을 물끄러미 보시던 세종은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찻잔을 가리켰다.
“마시고 몸을 좀 녹이거라.”
“예, 아바마마.”
이향은 산삼의 쓴 향이 훅 올라오는 차를 들고 천천히 마셨다.
“이 지도를 너도 보았지?”
세종께서 서탁 위에 접어두신 종이를 펼쳐 이향 앞으로 내어놓으셨다. 윤서가 그린 세계 지도였다.
“예, 아바마마.”
세종께서 땅콩처럼 생긴 곳을 짚어 보이셨다.
“여기를 윤서는 아메리카라 하더구나.”
“예, 아바마마.”
“윤서가 말하길 앞으로 오십 년 후에는 여기, 이쪽 유럽이라는 곳에서 사는 백인들이 배를 타고 여기 이 큰 바다를 건너서 이 아메리카라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운다고 해.”
“···예.”
이향의 대답이 느려졌다. 짐작이 맞았다.
다른 곳은 그냥 꿈에서 보았거나, 아니면 서책에서 읽었다고 해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으나 미래를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일평생 아바마마께서 족친이든 신하든 그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오셨는지 잘 아는 이향은 어깨를 굳혔다.
“향아.”
“예, 아바마마.”
“유가 지금 여기 천축국까지는 간 것이 아니냐?”
“예, 아바마마. 유구에서 천축국까지는 섬이 많아 왕래가 어렵지 않다고 제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그래. 우리가 바다를 소홀히 하는 사이에 왜는 벌써 선단을 지어 여기, 유구뿐 아니라 천축국까지 왕래한다 하지 않느냐?”
“예, 아바마마. 그래서 유를 보내신 것이 아니십니까? 가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무역해 볼 방안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옵니다.”
“그래. 그런데 말이야. 그 유럽인이라는 자들이 이렇게 멀리 바다를 건너가 나라를 세운다고 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종께서 유구와 인도 사이에 아래로 잔뜩 그려진 섬 중 가장 아래쪽에 있는 큰 섬을 짚어 보이셨다.
“여기를 윤서는 호주라고 하더구나. 여기는 이렇게 큰데 변변한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문명이라는 것이 없어서 아직도 돌을 쪼개서 사용하는 이들이 살고 있다고 해.”
“···예, 아바마마.”
이향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부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두운 밤, 촛불 아래 부왕께서 우실 듯 일그러진 얼굴로 이향을 바라보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