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화. 윤서의 학생, 세종
“금똥이도 이제 이유식을 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아, 내가 참. 마음이 불안하였느니라.”
마음이 불안하셨다니.
윤서는 이제야 세종께서 연정 소설을 쓴 작가가 자신이라고 오해하셨다는 사실과, 또 그런 자신을 내치지 않고 어떻게든 감춰줄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하······.”
아들은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며느리 따위는 가차 없이 내치시는 세종께서 이만큼이나 배려해주시다니. 마음이 따스하게 몽글해졌다.
그러나 윤서가 이 세계로 와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군주인 세종 앞에서는 절대로 마음을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 하필 이향이 순행을 나가고 없는 지금 학당에서 가르칠 기초 교재를 말씀하시는가.’
현마다 학당을 설치해 기초 한자, 정음, 기초 산학을 가르치는 것은 이미 세종께서 결심한 바이셨다.
아직 논의 중인 것은 무상 교육일지 조금이라도 수강료를 받을지의 여부였다.
그리고 더 첨예하게 고심 중이신 것은 가르치는 대상을 양민으로 한정할지 아니면 싹수 있는 노비도 포함할 것인지였다. 윤서가 양민과 노비 가리지 않고 글을 가르쳐 어엿한 직공으로 키워내고 있는 것을 보신 세종께서 일찍이 직접 키워낸 장영실의 사례도 떠올리시며 노비 문제에 대해 기본부터 다시 고심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전하, 학당에서 천자문과 정음, 기초 산학 외에 다른 것도 가르치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래, 기초 경제와 선진 농법도 가르쳐야겠더구나. 시대가 변할 것이지 않느냐? 그리고 또,”
세종께서 공손하게 엎드린 채 고개만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윤서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굽어보셨다.
“네가 우리 세자에게만, 그리고 희아와 홍위에게만 가르치고 있는 내용도, 포함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라비아’라던가, ‘나침반’ 같은 것들 말이다.”
“!”
윤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의 빈틈없는 시선 아래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맹렬하게 홍위와 희아에게 은밀히 가르치고 있는 역사, 지리 수업을 생각했다.
중국 너머 아라비아 반도가 있고 그 너머 유럽이란 대륙이 있다는 것을 지도를 그려가며 설명해 주었고, 그 유럽이 장차 범선을 타고 대포를 싣고 동양으로 올 것이란 미래의 지식을 전했을 때, 아직 어린 홍위는 “그 사암들은 눈동자가 하늘처엄 파앗다고요?” 신기한 듯 물으며 윤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희아는 달랐다.
“바다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대하다면서 어떻게 항로를 잡았어? 북극성으로? 그럼 흐려서 별이 안 보일 땐? 노도 안 젓는다는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어떻게 해?”
연신 질문을 해서 그저 교과 시간에 배운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말하는 윤서를 곤란하게 하였다. 위의 질문,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항로를 설정하는 문제에 대해선 ‘나침반’을 말해주었지만, 범선이 돛 달린 배라는 것 이상을 알아보려 한 적이 없어 나머지 질문에는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도 여전히 돛이 바람을 받을 수 있게 설계했을 것이다. 돛대를 회전 가능하게 만들면 되겠지? 그리고 돛도 접고 펼 수 있게 하면서 풍속의 세기에 대비했을 것이고.”
희아에게 답을 해준 사람은 이향이었다.
다양한 기계 문물을 숨 쉬듯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윤서는 그저 활자로 박제된 지식을 읊는 것이었지만, 윤서에게 전해 듣는 기물의 외양부터 상상을 통해 구현해봐야 하는 이향은 몇 개의 단편적인 단서로 전체 작동 원리를 추론해내곤 했다.
‘조만간 이러한 날이 오리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아무리 미래의 영혼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해도 ‘한글 창제’ 천재이신 세종께서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고야 마시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윤서야, 너는 햇살에 바닷물이 증발하며 구름이 되고 다시 비로 내린다는 ‘대류 현상’이란 말을 어디에서 배운 것이냐? 그것도 잠시 죽었을 때 엿본 지식이더냐?”
“전하······.”
실은 눈치채시라고 일부러 희아에게 여러 지식을 폭넓게 가르쳐주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을 알고 있는데도 처벌이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고 살 부모는 없다.
윤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홍위가 임금이 될 조선, 우리 금똥이가 살아갈 세상인데!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하여 현실의 다른 문제에서도 파격적인 해결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해낸 것이더냐? 다른 이들은 풍속의 문란함을 염려할 때 너는 어째서 사고의 한계를 넓히는 이야기의 순작용을 생각할 수 있었더냐?”
“······.”
“고금의 서적에 통달한 나조차도 화폐가 무엇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였다. 헌데 너는 어찌하여 이미 경험해 본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작은 마을에서나마 빼어난 체제를 만들 수 있었느냐?”
“그것은,”
이향에게 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털어놓지는 않을 계획이었다. 이향과는 처음부터 사랑과 욕망으로 단단히 얽혔고, 홍위의 안위라는 공통의 소망으로 서로를 지극히 신뢰할 수밖에 없는 사이다.
그러나 세종은 다르다.
윤서에게 세종이 한없이 존경스러운 역사 속 위인이자 야속하게도 아들들을 지나치게 아끼는 시아버지이듯, 세종께 윤서는 세자의 여인이자 세손을 지극히 위하는 며느리이지만 다른 아들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인물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전하, 전에도 고하였듯 한번 죽었다가 깨어난 이후 꿈에서 미지의 지식이 적힌 서책을 읽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본 서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그 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앵무새처럼 읊기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으래?”
“예, 전하. 그래서 대류 현상을 군주 자가께 설명해 드렸지만 관상감의 관리나 세자 저하처럼 날씨 예측은 못 하는 것입니다.”
참 그럴듯한 해명이었지만 세종에겐 씨도 안 먹힐 이야기였다.
신비한 지식의 출처를 기필코 밝혀내고 싶지만 장차의 세자빈을 기군망상죄((欺君罔上罪)로 몰아 주리를 틀며 고신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
“······.”
세종께서는 때로 자신의 지식 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기이한 며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전하, 피뢰침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을 가지게 된 이들은 벼락이 군주의 폭정을 경고하기 위해 하늘이 보내는 징조라는 예전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듯 새로운 지식은 기존 사회의 질서와 통념에 의문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윤서는 서둘러 전하의 관심사를 현실적인 문제로 돌려놓았다.
“학당에서 가르칠 교재 또한 장차 우리 조선의 기본 지식 체계와 신념 체계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하여, 전하. 유교의 가르침과 새로운 지식의 가르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좀 더 발전적인 지식 체계로 나갈 수 있도록 사전에 정교한 검토와 합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 자칫하면 해괴한 주장이 난무하는 괴상한 조선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럼 오히려 반동의 역풍을 맞게 되면서 겨우 기반을 다진 우리 조선의 틀이 저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윤서의 의도대로 무지한 백성에게 지식을 보급하여 더 나은 지식 조선을 만들 꿈을 꾸기 시작한 계몽 군주 세종께서 윤서가 지적한 측면을 맹렬하게 짚어보실 때였다.
“전하, 유 승휘 들었습니다.”
밖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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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능하니 범어도 어렵지 않을 것이야. 중 신미가 범어에 밝으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양의 야만 전사>를 쓰느라 밤을 꼴딱 새웠는지 감히 부스스한 머리로 천추전에 든 유 승휘에게 전하께서 명하셨다.
처음으로 들어와 본 천추전에다 전하를 따로 알현하는 일도 처음이라 잔뜩 긴장했던 유 승휘는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저작을 본 순간 휘청, 기절하려 하였다.
그래서 윤서가 쓰러지려는 몸을 잡아채 자신의 옆에 함께 꿇어 앉힌 참이었다.
그렇게 기절할 듯 두려웠으면서도 유 승휘는 수양 대군이 초벌 번역한 부처의 가르침을 더 정교하게 다듬으란 어명에 고개를 발딱 쳐들고 맹렬한 어조로 고했다.
“저는 불교를 믿지 않습니다, 전하! 게다가, 그, 이렇게, 한자에 겨우 정음으로 꼬리말만 붙여 놓은 글 따위를 고쳐봐야 별로 읽을 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
“!”
세종께서는 복잡한 시선으로 유 승휘를 바라보셨다. 제게는 살뜰했던 아내를 잃고 해외로 추방당하다시피한 둘째 유가 그래도 마음을 잡아 보겠다는 효심으로 애써 번역해 올린 것을 폄훼하는 유 승휘가 한편으로는 노여웠다. 동시에 이런 안목과 글솜씨니 지극히 감동적인 부처의 가르침이 엮여 나올 것이라 기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리 상담 세션에서 몇몇 작가를 상담해 본 적 있는 윤서는 유 승휘의 본뜻이 ‘부처고 나발이고 난 내가 꼴리는 것만 쓸 거야!’란 작가적인 고집임을 간파했다.
‘창작의 욕구와 고집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조선에 다양한 문화가 전하의 비호 하에 꽃을 피우느냐 아니면 유교적 엄숙주의 아래 뿌리부터 말라죽느냐의 기로!’
윤서는 유 승휘의 팔을 세게 움켜쥐고 재빨리 속삭였다.
“이만큼 허락해주신 것만도 전하의 크나큰 은총이거늘!”
“······!”
유 승휘는 ‘이런 어용 앞잡이를 보았나.’ 하는 눈빛으로 윤서를 흘겨보았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쓰려면 전하의 명을 받드시게. 고집만 내세우다간 붓을 들기는 커녕 풍기문란 조성죄로 폐서인 되어 관노가 될 수도 있어!”
"!"
윤서의 경고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은 유 승휘가 이내 현실을 파악하고 납작 엎드렸다.
“예, 전하. 부처님의 여러 말씀을 전하의 글자로 옮기는 일을 온 정성을 다하여 수행하겠습니다. 하오나 아울러 제가 쓰고 싶은 내용도 세우란 필명으로 계속 써서 간행하겠사옵니다.”
“···너무 노골적인 표현은 자제하거라.”
“무엇이, ‘너무 노골적인 표현’인지 짚어,”
윤서는 야한 부분이 어디인지 감히 전하께 여쭙는 유 승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서둘러 “전하,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찬하고, 동시에 우리 조선의 서민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유 승휘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그래. 중전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세종께서 흡족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전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밤새 근심하였던 일이 수월하게 풀려 기쁜 마음으로 윤서는 유 승휘와 함께 절을 올리고 천추전에서 물러나려 하였다.
그런데 문득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말이 옳다, 윤서야.”
“······?”
“학당의 교재가 장차 우리 조선의 지식 체계와 사고 체계를 결정짓게 되리란 네 말이 참으로 옳아. 당장 내년부터 우리 조선이 지금과 상당히 달라질 것이 아니냐?”
세종께서 윤서만 보며 말씀하시자, 유 승휘는 “전하, 소첩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재빨리 천추전에서 나갔다.
세종께서는 나가는 유 승휘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말씀을 이으셨다.
“내년부터 새로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킬 것이고, 왜에서 면포를 대량으로 사가면서 돈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게다가 유 승휘가 쓴 것 같은 이야기는 여인들이 특히 좋아하더구나. 학당에는 소녀들도 다니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 조선이 급변할 것이란 건 그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예, 전하.”
급변할 것이다. 6.25의 잿더미에서 반세기만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정도의 저력을 가진 민족이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그 뒤를 잇는 이향의 치세 하에 조선은 급변할 것이다.
윤서의 예측을 읽기라도 하신 것처럼 세종의 말씀에 더욱 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럼 더욱더 학당의 가르침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말이다. 윤서 네가 그 꿈에서 본다는 지식이 무엇무엇인지, 그 지식이 과연 지금의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적합한 것인지 임금인 내가 먼저 포괄적으로 배워 판단을 내린 후 집현전에 내려야겠구나.”
“···예?”
아니 세종에게 모든 지식을 과목별로 다 가르쳐야 한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선 최고의 천재적 임금이자 시아버지인 세종을!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뇌가 절절 끓는 느낌이다.
“저, 전하. 그, 그것은.”
“백성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군주의 기본 도리니라. 그러나 장차 군주가 될 향이는 정무에 바빠 도저히 시간을 내기 어려우니 뒷방 늙은이가 된 나라도 배워서 판단해야지, 어쩌겠느냐. 희아와 홍위에게 가르쳐 주듯, 그리고 향이에게 가르쳤듯 하면 된다.”
결국 바로 다음 날 오후부터 먼저 그 세계의 지리부터 세종께 가르쳐 드리기로 확정되었다.
어색하지 않은 진행을 위해 희아와 홍위,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세자나 광평 대군, 금성 대군 등의 대군도 동석하는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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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 후 이미 내용을 훤히 알고 있는 칙서를 들고 명나라 환관이 칙사로 한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