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36화 (136/255)

제 136화. 진실을 아신 세종의 명

깊은 밤.

붉게 빛을 내는 화로 위 무쇠 주전자가 치익칙 소리를 내며 울고, 또 멀리 궐의 후원에선 부엉이가 호홍 호옹 우는 밤.

윤서는 초저녁 나눴던 엄자치와의 대화를 복기한 후 이향에게서 파발로 온 서신을 다시 한번 읽었다.

이향의 서신은 언제나 ’보고 싶은 윤서에게‘로 시작하였다.

[보고 싶은 윤서에게.

어제 경성에서 명천으로 넘어오는데 금똥이 주먹만한 눈이 펑펑 내렸소. 차곡차곡 쌓인 눈이 말의 가슴까지 올라와, 앞선 말들이 강물을 헤엄치듯 천천히 나아갔소.

이곳의 주민들은 여진이든 우리 백성이든 모두 땅을 파고 나뭇잎과 갈대 등을 얼기설기 엮어 눈과 비나 겨우 막아줄 지붕을 세운 움집에 산다오. 얼어 터진 뿌리나 나무 줄기를 겨우 먹다가 구휼미를 받게 되어서 이번 겨울엔 얼어는 죽어도 주려는 죽지 않게 되었다고 시커먼 얼굴로 웃는데, 이가 어찌나 누렇던지.]

물 흐르듯 수려한 필체로 이향은 며칠간 있었던 일을 적고, 또 때로 고심 중인 현안도 적었다.

[순행하는 동안 두창으로 죽은 시신을 많이 보았소. 땅이 얼어 묻지 못하여 마을 한 구석에 따로 쌓아 덮어두었는데, 마음이 무척 처량하였소. 그래도 마두창 예방 침의 효능이 여기까지 알려져 전 같으면 우리 백성과 여진인들 모두 자포자기로 서로 도적질하고 인심이 흉흉했다는데, 올해는 미리 두창 걸린 말을 끌고 온 군관을 중심으로 희망을 품고 곧 도착할 의원과 의녀를 기다리고 있었소.

내년까지 꾸준히 저 요양 일대의 여러 부족에까지 두창 예방 침을 놓는다면,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동안 우리 조선에게 원한을 품고 강을 건너 떠났던 야인들도 다시 돌아와 터전을 일굴 것이오. 그럼 부인이 말했던 이 일대의 광물 개발도 한층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고, 농지의 개간도 더 수월해질 것이오.

그리고 무창에서 한 번, 온성에서 또 한 번 새로 개발한 화포를 쏘아보았소. 여러 발이 동시에 굉음을 내며 강 위를 날자 놀란 날짐승들이 하늘을 온통 까맣게 메우고, 호랑이며 이리, 노루 등등이 얼어붙은 강물 위를 우왕좌왕 하더이다. 금성은 두셋이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화포 크기를 줄이면 여기 산악 지역에서 끌고 다니며 매복해 있다가 적의 기병을 향해 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이징옥이나 황보인도 여진의 기병을 쫓아버리기에 탁월할 것이라 하였소.]

이향은 윤서에게 쓰는 서신을 현안을 정리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향의 서신은 늘 작은 글씨로도 서너 장을 훌쩍 넘겼다.

정작 윤서는 답신을 보내는 일이 드물었다.

서신을 좀처럼 쓰지 않는 이유는 붓글씨에 서툴러서였다. 원래 권윤서는 글씨를 모르는 까막눈이었기에 윤서의 글씨는 아직도 홍위의 글씨보다도 더 거칠었다.

그래도 오늘은 써야 했다. 이향처럼 낮에 일어난 일을 다각도로 정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박쥐 무늬 은 입사 철제 문진을 올려 미색의 종이를 고정한 후, ‘보고 싶은 저하께’ 쓰려다가 그냥 간결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하.

칙사 문제는 고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리 안배해 놓은 대로 일을 끌고 갈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온데,]

여기까지 쓰고 윤서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엄자치의 조언을 떠올렸다.

“전하께 유 승휘의 쓰임새를 힘껏 호소하십시오. 쓰임새만 뚜렷하다면 전하께서는 다른 허물이 있어도 선처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날이 밝으면 전하를 뵙고 그간의 모든 일을 고하고 아울러 유 승휘의 쓰임새를 호소할 예정이었다.

윤서는 다시 붓을 들었다.

[하온데 새로 생긴 서점에서 남녀 간의 연심이 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서책을 팔고 있었고, 전하께서 직접 그 서책을 읽으셨습니다. 그 서책을 쓴 이가 유 승휘입니다, 저하.]

여기까지 쓴 후 윤서는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운 날씨에 북방을 순회하고 있는 세자께 한양의 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다시 몇 줄을 덧붙였다.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전하께 다 말씀 올리고 해결 방안을 찾아내겠습니다. 마음 쓰지 마시고, 몸 건강히 오세요. 그리고 홍 내관에게 사흘에 한 번은 종기가 나는지는 반드시 살피라고 하시고, 밤에는 꼭 씻으시고 통풍 잘 되는 옷을 입고 주무셔야 합니다.]

결국은 잔소리로 끝이 나는 멋 없는 편지가 되었다.

대신 홍위와 희아가 쓴 서신은 무척 귀여웠다.

[아바마마, 소자는 소학을 거의 다 읽었고, 격구 채를 잘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또 활쏘기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금똥이한테 공을 던져주는 솜씨도 많이 늘었어요.

금똥이는 요새 아무 거나 입에 가져가 빠는 것이 더 심해졌어요. 아까 낮에 어머니는 외출하시고, 보모 나인이 잠깐 측간에 간 사이 먹을 쥐고 빨아서 입 안이 까맣게 되었습니다 (에휴, 한숨). 봄이 오면 송충이도 입에 넣고 빨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금똥이 허리를 끈으로 묶어서 기둥에 매어두라고 말씀드렸어요. 아바마마 보고 싶어요. 소자도 얼른 커서 아바마마와 함께 북방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홍위가 의젓한 글씨로 쓴 편지였다.

[아바마마, 소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바마마, 할마마마께서도 강녕하시고 권 승휘와 홍위도, 금똥이도, 몽몽이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겨울이 유난히 따스하면서 눈이 펑펑 오는데 권 승휘 말로는 저 먼 바다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서라고 합니다. 바다의 온도가 높아지면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만들어지고, (중략)]

희아는 윤서가 바다의 대류 현상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설명해 주었던 것을 상세히 적고 나서

[그런데 권 승휘는 이론은 알아도 실제에 적용하지 못하니, 그런 점은 답답합니다. 아바마마께서 오셔서 날씨 예측을 어떻게 하는지 소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끝을 맺고 있었다.

윤서는 ‘어서 이향이 와서 따스한 품 안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생각하며 자신의 짤막하고 멋없는 서신과, 홍위와 희아의 서신을 한데 모아 봉투에 넣고 밀납을 떨어뜨려 잘 밀봉하였다.

*****

다음 날 오전 윤서는 긴장된 마음으로 전하께 알현을 청하였다.

천추전에 드니 책상 위에 전날 서점에서 가져온 야설 서적이 높게 쌓여 있었다.

다른 분도 아닌 위대한 전하 앞에서 야설을 논해야 하는 사정이 두렵기는 하였지만, 재위하시는 내내 단 한 번의 사화도 없이 신하들을 아끼신 세종의 관대하심을 믿으며, 머리를 한껏 조아리고 이실직고 하였다.

“전하,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은 제가 유포하였습니다. 명 황실을 배경으로 둔 한확의 전횡을 막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서책과 어제 보신,”

“잠시만! 잠시만, 윤서야.”

세종께서는 화급히 윤서의 입을 막았다.

짐작하고 있으셨지만 사실로 확인하는 충격은 덜하지 않았다.

하아, 깊은 탄식을 내쉬며 세종께서는 간밤 <종사관 나리와 세답방 무수리>를 읽고 난 후 중전께서 한 말을 떠올렸다.

소헌 왕후는 세종께서 침울한 얼굴로 건네신 야한 서책을 단숨에 읽고는,

“윤서가 정말로 이것을 썼단 말입니까? 그 애가 설명하는 것을 잘 써도 이렇게 맛깔나게 글을 짓지는 못하던데, 이상하네요.”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자빈이 이런 야설을 썼으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을 것이냐는 세종의 탄식에 소헌 왕후는 고개를 흔드셨다.

“전하께선 어찌 그런 장면만 보십니까? 신첩은 이 무수리가 실은 전 고려 왕의 후손으로 원수를 갚을 요량으로 궐에 들어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과정의 긴장감, 그래서 종사관을 유혹해 전하나 세자를 시해하려 하였는데, 막상 궐에 들어와 지내면서 전하의 성덕에 감동하여 조선의 백성으로 살고자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 종사관이 연심에 혼이 다 빠졌으면서도 끝까지 전하에 대한 충심은 절대 흔들리지 않은 것 등이 다 감동인데요.”

하고 이야기의 내용을 다르게 본 소헌 왕후는 “너무 노골적인 장면만 살짝 손보라고 하시면 될 것입니다.” 하고 결론을 지었던 참이었다.

이야기를 수용하는 태도가 성별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것이 신기해, 세종께서는 새벽부터 천추전의 천 상궁에게도 읽게하셨다.

숨도 제대로 안 쉬는 듯 정신없이 책에 몰두했던 천 상궁은 종사관이 무수리에게 “네가 무엇이어도 좋다! 네가 전조의 왕씨 성의 공주여도 좋고, 성도 없는 천한 무수리여도 좋다. 나에게 너는 그저 은애하는 여인일 뿐이다!” 소리치는 장면을 짚어 보이고는, 소리도 안 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리고 눈물 때문에 번져가는 종이 위에 [感動(감동)]이란 두 글자를 적어보였다.

그러니 세종께서는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호의적인 평에 안심이 되면서도, 과연 유학을 공부하는 엄격한 선비들이 무엇이라 평할지 여전히 근심이셨다.

“장면을 고치거라!”

세종께서 먼저 결론을 제시하셨다.

“너무 노골적인 묘사를 지우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지극히 연모하는 마음을 강조하거라.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야. <비록 역적의 딸이라 해도>에서도 여자 아이의 아버지가 역모 혐의를 벗고 신원되는 과정을 자세히 그리되, 그 좀 몸이 너무, 그렇게 그려진 것들을 좀 빼거라.”

“전하!”

“그리고 그렇게 고쳤어도 네 이름으로는 아니 된다. 지금처럼 세우(細雨)란 이름으로 쓰거라. 그리고 이것 외에 다른 것도 써야 한다. 이를테면!”

전하께서 종이를 펼치시고 윤서에게 손짓하셨다.

윤서는 일이 이렇게 풀려서 얼떨떨한 마음으로 전하의 책상에 다가섰다.

[부톄 도녀 諸國 敎化하샤 「諸國은 여러 나라히라」 廣嚴城에 가샤 樂音樹 아래 겨샤 굴근 比丘 八千人과 한데 잇더시니 菩薩 摩訶薩 三萬 六千과 「摩訶薩 굴근 菩薩이시다 하논 마리라.」]

“!”

윤서는 바로 알아보았다.

고등학교 때 배운 석보상절이었다. 수양 대군이 석가모니의 삶과 가르침을 정음으로 번역하였다는 그 석보상절!

“유가 항해를 하며 틈틈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음으로 번역해 보내왔다. 제법 잘하였지만 표현이 추상적이고 말이 거칠어서 읽기가 좋지 않으니, 윤서 네가 저 서책들처럼 매끈하게 가다듬어서 내도록 하여라.”

명하시는 세종의 음성은 먼 곳에 떠나 있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젖어 있었다.

윤서는 일단 수양 대군에 대한 것은 미뤄놓고, 본래 말씀드리려던 내용을 고하였다.

“전하, 저 이야기를 쓴 사람은 제가 아니라 유 승휘입니다.”

“무어? 유 승휘가, 그럼 여비 한씨도 유 승휘가 지었단 말이냐?”

“여비 한씨의 유모 이야기는 제가 그 유모를 모셨던 비구니를 만나 채록하고, 유 승휘에게 더 매끄럽게 다듬어 쓰라고 한 것입니다.”

“하아!”

세종은 윤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깊은 한숨을 토해내셨다.

그 한숨을 탄식이라 오해한 윤서는 서둘러 무릎을 꿇고 유 승휘를 위해 다시 고하였다.

“전하, 유 승휘는 한문에 대한 지식도 깊습니다. 그러니 석보상절이나 우리 조선의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 고려사 등 여러 서책도 정음으로 잘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백성에게 전하시고 싶은 가르침을 이야기 속에 설득력 있게 담아 전달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 여봐라, 유 승휘를 불러오너라!”

전하께서 명하시고 윤서를 보셨다.

“어쩐지, 너의 글은 전문적인 지식을 담을 때는 조리 있게 설득력이 있으나, 감성에 닿지는 못하였는데. 하아. 유 승휘가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하는 동안 너는 전국의 학당에서 가르칠 기초 분야의 책을 집현전 학사들과 논의해 결정하거라!”

“전하!”

“금똥이도 이제 이유식을 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아, 내가 참. 마음이 불안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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