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화. 연애 소설과 세종 대왕 (3)
궐로 돌아오는 내내 깊게 생각에 잠겨계시던 전하께서 마차가 육조 거리에 들어섰을 때 윤서에게 문득 하문하셨다.
“그러니까 윤서 너는 저런 이야기라도 읽는 것이 읽지 않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냐?”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러우시다.
그간 세종을 뵈면서 윤서는 노여움이 크실 때 전하께선 오히려 낯빛을 의식적으로 부드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인 자신의 위엄에 눌려 고할 말을 못 하는 경우를 방지한다는 군주다움과 ‘그래 네가 한번 어디까지 씨부리는지 보자’ 하는 천재의 오만이 혼재하여 빚어내는 독특한 태도셨다.
윤서는 극도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흰 종이에 검은 선으로 그려졌을 뿐인 문자를 통해 읽는 이들은 허구의 이야기를 진짜 있는 세계인 듯 그려내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훈련된 상상력은 현실 상황의 문제에서도 기발한 해결책을 상상해낼 힘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읽는 행위에 익숙해지면 지적인 호기심이 더욱 왕성해져서 더 깊은 지식을 추구할 것입니다.”
“오히려 더 자극적인 것만을 찾아 읽게 되면 어찌한단 말이냐?”
“잠시 이야기의 유희에 빠지는 시간이 고달픈 현실을 잊는 휴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얻은 위안 덕분에 백성들이 다시 현실의 삶을 꿋꿋히 헤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보지 않고 일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 나름의 즐거운 문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윤서가 여기까지 말을 하였을 때 마차가 광화문 앞에 도착하였다. 마차는 활짝 열린 광화문을 그대로 통과해 흥례문 앞에 섰다.
윤서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광평 대군의 부축을 받으며 세종께서 무사히 마차에서 내리실 수 있도록 손을 보탰다.
“전하, 드릴 말씀이,”
오는 내내 월하야담 서점의 책의 저자에 대해 밝혀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윤서가 마침내 고하기로 어렵게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 때였다.
“늦었다. 아이들 기다릴 터이니 어서 돌아가 보거라.”
전하께서는 아까처럼 손을 내져어 윤서를 물리시고, 광평 대군의 부축을 받아 사정전으로 향하셨다.
‘입장을 정리하실 시간이 필요하시구나.’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혀 세종을 배웅하며 윤서는 생각했다.
자신이 만들어 공표한 글자가 백성들 사이에 벌써 광범위하게 향유되고 있는 현실의 뿌듯함과, 의도와 달리 연정 소설부터 왕성하게 퍼져나가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함께 드실 것이다.
특히나 원래 역사에서 정음으로 처음 만든 작품이 ‘부처님이 백억 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일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 하는 <월인천강지곡>과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하는 <용비어천가>와 같이 격조 높은 작품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문자에 오점부터 새겨졌다고 노여워하실 수도 있다.
윤서는 근심하며 협경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광평 대군과 함께 느릿느릿 사정전으로 향하시는 세종께서는 여러 가지를 맹렬하게 고민하고 계셨지만, 윤서가 우려하는 점은 안중에 두지 않고 계셨다.
‘세자가 처복이 없다는 점괘가 깨졌다고 좋아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한탄하시면서도
‘누구나 쉽게 배워 기특한 깨달음을 얻으니, 날로 불어나는 노비 숫자를 제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고, 또 자꾸 본질을 놓치고 교조적으로 형식만 따르려 하는 유학자들의 안일함도 깨우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심하시며 향후 조선의 정치적 지형도를 고쳐 그릴 방안을 고심하셨다.
그러다 문득 뒤를 따르는 대전 내관에게 명하셨다.
“가서 지화를 불러오너라. 내 팔자를 물을 사람이 있다.”
“예, 전하.”
대전 내관이 태종 때부터 유명한 맹인 점술사 지화를 데려오기 위해 오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누구의 팔자를 물으려 하십니까?”
“네 생각에는 저 서책들이 어떠하냐? 분명 상소가 빗발칠 터인데.”
광평 대군의 물음에 세종은 다른 걸 물으셨다.
“저는 권 승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유희는 결국 정신적, 물질적인 여유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읽어도 배부르지 않은 서책이 저리 팔린다는 것은 아바마마의 치세 하에 백성들이 참으로 풍족하다는 방증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네가 대신. 하아, 아니다!”
세종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 도로 삼키신 채 사정전에 드셨다.
****
협경당에 들어서자 방 안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홍위! 금똥이!”
그러자 밖의 근심은 금세 잊히고, 홍위와 금똥이를 어서 만날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윤서는 작은 부엌으로 들어가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홍위와 금똥이가 있는 방으로 서둘러 갔다.
“어먼니! 이거 보세요!”
윤서가 들어서자 홍위가 소리치며 방울을 단 붉은 비단 공을 주르르 방바닥에 굴렸다.
그러자 금똥이와 몽몽이가 동시에 공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금똥이는 두 팔과 무릎으로 재빨리 공을 향해 기어가고, 똑똑한 몽몽이는 뒷다리를 끌고 아기처럼 기어서, 금똥이와 보조를 맞춰주었다.
덕분에 먼저 공을 쥔 금똥이가 공을 집어 철푸덕 앉아 윤서를 향해 공을 흔들며 “꼬! 꼬!” 소리쳤다.
“두 분 아기씨께서 내내 저러고 노셔서, 아이고 금똥 아기씨 무릎이 다 멍이 들 지경입니다.”
홍위의 아지 이씨 부인이 슬쩍 윤서의 눈치를 살피며 고하였다.
홍위가 금똥이를 개처럼 놀리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형아가 이렇게 놀아주어서, 금똥이 팔다리가 엄청 튼튼해질 거에요. 곧 걷겠는데요.”
“맞아, 금똥이 아까 내 손 잡고 두 거음(걸음) 거었쪄요.”
홍위가 머리 숱 많아지라고 박박 깎아놓아 동자승처럼 매끈해진 금똥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금똥이 낳은 후 이렇게 오랫동안 곁을 비운 적이 없어 불안했던 마음 한구석이 사르르 녹으며, 윤서는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래서 윤서는 엄 상전에게 바로 조언을 구하러 가려던 것을 잠시 미뤄두고 두 아이를 각각 옆에 끼고 푹신한 보료에 기대앉았다.
“아밤마마께 편지 썼어요. 눈나 꺼도 들어 있쪄요.”
홍위가 서탁 위에 올려진 연노랑 봉투를 윤서에게 가리켜 보였다.
이향은 이틀에 한 번 파발로 전하께 순행 보고를 올렸고, 그때마다 윤서에게도 서신을 함께 보냈다. 이따금 홍위와 희아에게도 안부 서신을 보내는지라 홍위가 답장을 쓴 거였다.
“무슨 글자로 썼어요?”
“응, 하바마마 긋짜(글자)요. 직접 맛씀 드이는 것처염 쓰기 좋아요. 그이고 오느(오늘) 강서언에서,”
홍위는 재잘재잘 하루 강서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금똥이는 격하게 기어다녀서 지쳤는지 엄지손가락을 빨며 눈을 느리게 껌뻑거리기 시작했다.
“땅에서 연기가 식식 나고 부이(불이) 타고 있대. 그 구덩이에서 유항으(유황을) 극꺼보낸대(긁어보낸대). 도언군은 내년에 수양 삼촌이양 함께 배 타고 가꺼나는데, 나도 배 타고 가고 시퍼.”
“도원군이 그리 말하였어요?”
“응, 곧 삼촌이 유항하고 초석하고 배 가득 싣고 오꺼라고. 그언데 어먼니가 도아가셨어서 여기 있기가 시어서 삼촌이양 가고 싶대.”
“······!”
철렁하는 마음에 윤서는 홍위를 힘껏 품에 당겨 안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평창 군주 희아가 “몽몽아!” 부르며 들어오다가 윤서 품에 폭 안겨 있는 두 동생을 보았다.
“이리 와요!”
윤서는 평창 군주도 불렀다.
도원군이 가엾지만, 윤서가 없었더라면 먼 훗날 궐에서 객식구처럼 길러졌을 이는 다름 아닌 평창 군주의 아들 정미수였을 것이다.
역사 속 군주의 가여웠던 아이와, 자신으로 인해 엇갈린 운명이 된 도원군을 생각하며 윤서는 병아리를 품은 암탉처럼 희아는 앞에 앉혀 기대게 하고 홍위와 금똥이는 바싹 당겨 안았다.
*****
“오호! 즈언하! 이 날짜가 과연 맞사옵니까?”
어명을 받고 사정전의 침전에 든 맹인 점복사 지화가 손가락을 짚다 말고 닫힌 눈꺼풀을 격렬하게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팔자는 벌써 요절해 죽었을 이의 것이옵니다.”
“!”
답답한 마음에 세자와 윤서의 궁합을 보기 위해 점복사를 불러 들이신 세종께서는 무릎을 탁 치셨다.
“그 아이가 잠시 죽었었다. 죽었다가 깨어난 거야.”
“오호! 오호!”
지화가 다시 손가락을 번갈아 짚으며 이상하다는 듯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 살아 있다면, 즈언하. 그것은 아마도 운명의 굴레를 이미 벗어나 있다는 뜻이 아니런지요? 천기를 이길 만큼 강력한 운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천하를 지배하실 우리 고귀하신 세자 저하와 오히려 합이 아주 좋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다.”
“···그런가?”
운명의 굴레에서 비껴 서 있어서 은밀하게 일어났던 동궁의 흉악한 일을 잡아내고, 흉악한 윤가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럼 우리 유는 어떠하냐? 여자를 잘못 만나서 횡액을 당한 그 가여운 아이는 장차 어찌 될 운명인 것이야?”
세종의 말씀에는 어째서 너는 수양의 불운을 예견하지 못하였냐는 질책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일찍이 광평 대군의 때 이른 죽음을 예견했었던 지화는, 엇나간 팔자의 실마리를 잡아보겠다는 듯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떨며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갈래를 더듬었다.
“즈언하! 그 여인은 대군 자가께는 날개를 펼치게 해 줄 귀인이었사옵니다. 그러니 대군 자가께선 지금 짝 잃은 기러기처럼 외로이 먼 바다를 떠돌 운명이십지요.”
“그 운명을 바꾸려면, 좀 따스하게 살려면 어찌 해야 하는 것이야?”
“여인으로 인해 생긴 횡액은 여인으로 덮어야 하옵니다.”
“오호!”
그렇지 않아도 신빈의 희락당에 머물고 있는 도원군 현동이가 서리 맞은 풀마냥 기가 죽은 것도 가여운데. 그래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 홍위가 윤서를 만나 밝고 의젓해진 것처럼.
수양 대군이 물소 뿔과 초석, 유황과 동 등을 무역하고 돌아오면 잠시 한양으로 들라는 어명을 내리고 짝을 맺어 거제로 내려보내야겠다고 세종께서는 결심하셨다.
내관을 불러 맹인 점복사를 내보내신 세종께서는 다시 또 근심에 잠기셨다.
’외교와 내치 모두 향이가 잘 처리하고 있고, 인재를 키우는 데 핵심이 될 교육은 윤서가 기본 개념을 잘 잡고 있다.‘
이번 칙서 건은 윤서가 미리 손을 써둔 덕에 오히려 명 황실의 공신 부인을 우리 쪽으로 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될 것이니.
’문제는 그 빼어나게 야한 서책들이다!‘
윤서가 쓴 것만 아니라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딱 좋은 소재이거늘.
야설을 쓴 며느리 때문에 세종의 고심이 깊어질 그 시각.
윤서는 엄자치를 만나 논의 중이었다.
사정 설명을 들은 엄자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세자 저하께서도, 아십니까?”
“유 승휘가 쓴 것은 모르시고, 내가 여비 한씨의 이야기를 배포한 것은 아시네.”
“하아. 대체, 왜?”
호의호식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널찍하거늘 왜 그 이상한 길로 가셨단 말입니까?
엄자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윤서를 안타깝게 응시하였다.
“쓴 사람이 유 승휘만 아니라면 나는 그런 글 환영하네. 사람이 어찌 엄숙하게만 산다던가? 고아한 학문을 익힌다고 그리들 도덕을 외치는 분들도 기생을 끼고 어떻게 노는지,”
“마마님! 그건 너무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과 문화를 아는 법이네. 백성이 서책을 읽고 시를 짓고 이야기를 짓는 건 당장 먹고 살 걱정을 덜었다는 것이네. 전하께서도 그 점은 흡족해 하실 것이야.”
“그렇지만 유 승휘 마마님은 그냥 백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우리 금아 현주의 양어머니시지. 하지만 유 승휘는 그 많은 정체성 중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이야기를 짓는 작가로 살 것이라 하였네!”
그러하다.
엄자치를 만나러 오기 전 잠깐 들렀던 유 승휘 거처에서, 여전히 글을 쓰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유 승휘는 단언하였다.
“아무리 전하시라고 해도 내 붓대는 못 꺾으실 것이야!”
그리고는 두 뼘 높이로 쌓여 있는 종이 뭉치를 스륵 윤서 앞으로 밀어놓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거, <한양의 야만 전사>란 것인데, 오도리 족 추장 아들이 전하를 알현하느라 한양에 왔다가, 오도리 족 추장 아들이니 응, 튼실한 허벅지가, 응? 아 참, 세자빈이 되시면 말씀도 높이고, 이런 야한 이야기는 못 드리는 것인가?”
유 승휘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윤서는 정신이 저 멀리 허구의 세상 속에 날아가 있는 유 승휘의 몽롱한 눈빛을 지우며 엄자치에게 물었다.
“유 승휘는 내 동무요. 그러니 그 작가 정신도 지켜주면서, 또 전하께 이 난국을 어찌 해명을 드려야 할지 안을 내어 주시오.”
그러자 엄자치가 단호히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