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33화 (133/255)

제 133화. 연애 소설과 세종 대왕 (1)

[그런 날이 있다.

달빛이 마술을 부리는 밤. 검은 어둠은 모든 삿된 것들을 감추고 부드러운 달빛이 온통 아름다운 것들만 수줍게 내어놓는 오월 밤.

그 소녀는 잘박잘박 물 끼얹는 소리와

끊어질 듯 애달게 이어지는 콧노래로 스물둘 사내의 순정을 흔들었다.

늘 단정하신 우리 세자 저하를 닮기 위해 몹시도 애써온 내가 그날의 밤, 졸음을 구실로 수런거리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뜰을 서성였을 때, 코끝으로 인동초의 향기가 달려들었다.

도련님, 우리 귀하신 도련님. 인동초는 말이에유. 기나긴 겨울을 견뎌 이렇게 황홀하게 피어나 인동초(忍冬草)라고 한다는구먼유. 우리 도련님은 처음부터 화려하게 피어나셨지만유, 지한테는 도련님이 인동초구먼유. 천한 것이 온 힘을 다해 피워낸 인동초. 그러니께유, 도련님. 도련님 앞길 막아서는 것들은 모다 지가 가지고 갈테니께유. 우리 도련님은 이렇게 화사허게, 이렇게 강렬허게, 좋은 여인 만나서 알콩달콩 사랑허시면서. 도련님, 지가유. 도련님을 무척이나······.

그렇게나 하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 채 떠난 유모가 실은 내 친어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나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개국 공신 가문인 우리 송씨 집안의 장손으로, 조부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 저하를 평생 보필할 무관이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해마다 오월이 오면, 인동초의 향기가 온 대지를 뒤흔드는 오월이 오면 마음이 정처 없이 수런거리며 서른 살 짧은 생애를 나를 피워내기 위해서만 살아온 어미를 찾아 헤매었다.

그리하여 그날, 꺼져가던 생명력에도 끝까지 나를 담기를 멈추지 않던 내 어머니의 눈동자처럼 달빛이 희끄무레 빛을 내던 밤, 인동초 향기에 취해 서성이다 선왕의 총비가 머물렀었다는 폐 전각에 다다랐을 때.

곱던 모습 아련히 보일 듯 사라지고

깨어 보면 등불만 외로이 타고 있네.

가을비가 잠 깨울 줄 알았더라면

창 앞에 오동일랑 심지 않았을 것을.

(이서우 도망실(悼亡室) 인용)

그리운 이를 기리는 시를 노래처럼 읊으며 목욕물을 끼얹고 있는 소녀를 만났을 때 내 어찌 평소의 절제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나도 모르게 붉은 철릭 자락을 휘날리며 소녀에게 다가섰을 때, 내 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린 소녀는, 밤의 한기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전, 아니, 아버님. 저기 이런 서점은, 아니, 저 이제 시간이 늦어서.”

전하의 어깨 너머로 유 승휘가 지었음이 틀림없는 <종사관 나리와 세답방 무수리>의 시작 부분을 훔쳐 읽던 윤서는 아득한 기분으로 세종의 팔을 잡았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무엄한 행동이라는 것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다음 장면이 바로,

[이런, 염병! 선달이나 되어서 여인네 목욕이나 훔쳐보고 지랄이여, 지랄이!

물에 젖은 적삼을 통해 수줍게 드러나는 뽀얀 젖가슴과 물기 먹은 이슬처럼 초롱한 눈망울과 달리 소녀의 입에서 떨어진 것은 구성진 욕지거리였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슬픔에 젖은 사내에게 자태 고운 소녀의 험악한 말은 숨 막힐 듯 더운 오뉴월 무더기 속 청량한 소나기와 같았으니. 고양이처럼 눈매를 치켜뜨고 칙칙한 암청색 치마 저고리를 아무렇게나 꿰어입는 무수리 소녀는 그 순간부터 운명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평소 우리 저하처럼 단정해야 한다는 강박을 잊고 소녀에게 달려들어 입술부터 훔쳤다. 차갑고 보드라운 소녀의 입술에서는 농익은 능금 맛이 났다.]

하는 낯 뜨거운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아버님. 이만 다점(茶店)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혹스러운 얼굴로 세종의 팔을 끄는 윤서가 안돼 보였는지 광평 대군까지 세종을 밖으로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괴물 같은 집중력을 지니신 우리 전하께서는 어딜 가나 허리에 차고 다니시는 안경을 꺼내어 코에 얹으시고는 옆에서 손을 비비고 있는 서점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의자를 내어오너라. 등불도 서너 개 더 가져와 밝히고.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서책을 모두 내어오너라.”

검은 담비 털을 안감으로 댄 도포 하나로만도 이 서점의 책을 다 사고도 남을 정도란 걸 벌써 눈치채고 있었던 <월하야담>의 주인은 전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윤서의 목가구 공장에서 만든,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편안한 최고급 의자를 내어왔다.

그리고 저쪽에서 서 있는 점원에게 또 소리쳤다.

“야야, 저기 골목 끝에 가 차 세 잔이랑 유밀과 좀 사오너라. 내가 낭중에 톡톡히 값 치른다고 허고, 묵은 찻잎 말고 새 걸로 달여 오라고 혀. 그리고, 여기 선비님들, 여기 앉으십지요. 노야께서 마음 놓고 읽으시도록 허는 것도 효가 아니것습니까요, 예예.”

하고 의자 두 개를 더 내와 윤서와 광평 대군 앞에 놓는 것이었다.

과연 돈맛을 본 자가 더 벌기 위해 얼마만큼 날래지는지 실감이 나는 광경이었다.

“너,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세종께서 갑자기 서점 주인에게 물으셨다.

“아, 저는 이름이 막개입지요. 그런데 천한 것의 이름은 어째서 하문하시는지요?”

“이리 와서, 이것을 좀 소리 내어 읽어 보거라.”

세종께서 읽고 계시던 서책을 내미셨다. 전하는 어느새 <종사관 나리와 세답방 무수리>는 휙 훑어보시고, 다음 책인 <역적의 딸이라 해도>를 읽고 계셨다.

그러자 산도적 같은 사내는 일순 뿌듯한 웃음을 짓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역시, 노야께선 가지신 부만큼이나 시야가 탁 트이셨습지요. 소인이 또 맛깔나게 잘 읽어서, 우리 임금님께서 우덜같이 무지렁뱅이 백성을 위해 맹글어 주신 이 쉬운 글자도 못 뗀 까막눈이들에게 아주 실감 나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지요, 예예. 하온데, 설마, 우리 노야께서 우리 임금님 문자를 여적 모르는 것은 아니옵지요?”

“음, 대강 알긴 안다만 실제 어떻게 읽히는지 잘 몰라서.”

“에헤이, 노야 어르신. 즤이 집 열 살 아들래미 문도도 사흘도 안 돼 깨친 것을요.”

“너의 아들 이름이 문도이더냐?”

“예예. 원래 주인이 지어준 이름은 도야지였습지요. 허나 소인이 우리 임금님 덕에 글자를 깨쳐 이치를 좀 알고 보니, 부르는 이름에도 뜻이 깃들지 않습니까요, 예예. 그래서 소인이 고쳤습니다. ‘문자를 배워 이치를 알아 우리 어지신 임금님께 도움이 되는 백성이 되거라’란 의미로 문도라 지었습지요, 예예.”

“그으래?”

“예예. 그러믄, 들어보시겠습니까요? 들어보시면 우리 임금님 문자가 그 쓰기도 읽기도 어렵기만 한 한자보다 얼마나 빼어난지 노야께서도 실감하실 것입니다요, 예예.”

습관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예예”를 덧붙이는 사내가 다시 큼큼 목을 가다듬고 책을 들었다. 산도적처럼 거칠던 사내의 표정이 책을 들자 단아한 선비처럼 바뀌는 것이 신기하였다.

[호, 혹시 현숙 소저 아니시오?

물동이를 이고 있는 여종의 얼굴을 확인하고 놀라 얼어붙어 있던 박연경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물동이를 꽉 잡고 있느라 낡은 저고리 밑 겨드랑이 속살이 희게 드러난 여종의 얼굴이 볕 좋은 가을날의 홍시처럼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사, 사람, 자, 잘못 보셨어요.

현숙은 화급히 돌아서 달음질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양동이 속 물이 출렁거리며 흘러나와 홑겹의 저고리를 적나라하게 적시는 줄도 모르고 현숙은 후두둑 후두룩 눈물을 떨궜다.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함께 세상을 등졌더라면 오늘의 치욕은 없었을 것을.

후회와 절망이 거센 흐느낌으로 비져나왔다.]

세상에.

산적 같은 사내 입에선 역적으로 몰려 저 먼 북방에 관노로 보내진 과거의 정혼녀를 보고 놀란 사내의 절망과, 사랑하는 정인 앞에 속살을 드러낸 여인의 치욕과 슬픔이 실감 나게 쏟아졌다.

“에구,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아이고, 우리 가여운 현숙 아가씨, 어쩌면 좋아.”

“괜찮아요. 끝에 가면 연경 선달님이 우리 여주인공을 구해서 정부인으로 맞이하잖아요. 원래 고난이 높을수록 사랑이 깊어지는 법이랍니다.”

“흥,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그런 거지. 너도 공연히 얼굴만 멀끔한 돌쇠한테 헛물켜지 말고 목 가구 공장 꺽쇠한테 시집을 가래니께. 꺽쇠가 비록 응, 애 셋 딸린 홀아비라도 전 부인을 끔찍하게 아꼈어요. 사람 안 바뀐다. 죽은 마누라 아낀 놈이 산 마누라도 아끼는 법이여.”

“하지만 꺽쇠는 글자도 잘 모르고······.”

“아니, 꺽쇠가 지 새끼들 키우느라 시간을 못 내 그렇지! 그 가구 깎는 기막힌 솜씨 좀 봐라. 사내는 그저 마누라랑 새끼 안 굶기는 것이 최고여!”

“하지만 돈은 저도 버는걸요. 기왕이면 잘 생기고 애 안 딸린 돌쇠랑 혼인할래요.”

“지 팔자 지가 꼬네, 꽈.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불 끄면 하나도 안 보인다니께.”

저쪽 구석에서 책을 고르던 중년 여인과 앳된 소녀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빤히 들렸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요새 한창 규모를 키우고 있는 면포 공장의 직공인 듯했다.

윤서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굽히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 여인의 대화 때문에 비져나오는 웃음과, 이 상황을 세종께서 어찌 보실지 가늠이 되지 않는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제 물러가거라.”

세종께서는 덤덤하게 서점 주인을 물리시고, 다시 책을 훑어보기 시작하셨다.

서점 점원이 대령한 녹차로 가끔 목을 축이시고, 유밀과를 우물거리시면서 세종께서 서점 안의 연애 소설을 모두 다 섭렵하시기까지 반 시진(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기다리다가 무료해진 윤서도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유 승휘가 지은 책을 훑었다.

유 승휘는 19금 장면을 두리뭉실 눙치고 넘어가면서도 그 몸놀림을 상상하게 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현대에 태어났어도 연애 웹소설로 떼돈을 벌었을 것이 확실했다.

확실한데······.

‘문체가 비슷해. 특히 <종사관 나리와 세답방 무수리>의 문체와 글의 호흡이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과 아주 유사해.’

윤서는 사전에 상의도 없이 이렇게 작품을 서점에 풀어버린 유 승휘가 원망스러웠지만, 일견 이해도 갔다. 금아와 함께 보내는 시간, 학당에 나가 글쓰기를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내내 소설 쓰기에 몰두해 있어 요새 보면 눈 밑이 꼭 너구리처럼 되어 있었다.

“윤서야.”

이윽고 세종께서 윤서를 부르셨다.

“나가자. 찻집에 가자.”

윤서가 세종을 부축해 서점을 나서려 하자 산도적 같은 주인이 화급히 따라왔다.

“아니, 저기, 노야 어르신. 어째서, 책이, 이 기막힌 이야기들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요?”

“주인장, 우리 아버님께서는,”

윤서가 그만 물러가라 눈을 무섭게 치켜뜨는데, 세종께서 손을 내저으셨다.

“한 부씩 챙겨서, 저기 우리 다섯째에게 주거라.”

“예, 예. 한 부씩, 몽땅 다 말씀입니깝쇼? 역시, 이렇게 잘 깎은 옥처럼 고운 선비님들을 여럿 아드님으로 두실 만도 하십니다요, 예예!”

“그래. 너도 문도 잘 키우거라.”

세종께선 광평 대군에게 값을 치르도록 하시고, 윤서와 서점을 나섰다.

겨울 해는 짧아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상가마다 등불을 높게 걸고 막바지 저녁 장사에 매진하고 있었다.

“떨이요, 떨이. 여기 이 고등어 자반하고 갈치 자반, 싹 다 떨이요.”

“무 짠지랑 배추 절임 좀 들여가요. 밥에 척 얹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

“참새구이, 꿩구이, 가져가서 그냥 먹어도 맛있고 또 살짝 뎁혀 먹으면 더 부드럽고! 저기 남쪽 나라에서 온 호추 가루 살짝 뿌려서 잡내 싹 잡은 참새 구이!”

“월봉도 탔는디 토끼 같은 새끼들허고 여우 같은 마누라한티 여기 이 토끼 털조끼 하나씩 해 입히드라고. 좀 있으면 설이여, 설! 설빔으론 가죽 털신!”

“몸만 뜨끈허게 뎁히지 말고 정신도 깨웁시더! 여기 서책, 서책! 글자를 알아야 숫자도 알고, 숫자를 알아야 미래가 있는 것이여. 서책, 성현의 말씀부터 마음 찌르르한 감동까지, 서책을 사시오, 서책!”

입구까지 나와 목청껏 호객하는 상인과 매서운 추위에 어깨를 옹송그리고 걸으면서도 집에 사 갈 물품을 부지런히 곁눈질하는 백성들 머리 위로 등불이 따스하게, 축복처럼 내렸다.

“후흡.”

갑자기 들리는 격한 숨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세종께서 안경알 너머 격렬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백성의 거리를 주시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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