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30화 (130/255)

제 130화. 세종과 이향

“돌아가시지요.”

엄 상전이 다시 만류했다.

평생 힘껏 윗전의 마음을 살펴온 내관은 군주가 침묵으로 내보이는 거절에 절대 복종하는 자세를 뼛속 깊이 각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서는 이제 달라야 한다. 홀로 짐을 진 채 마모되고 있는 나의 사내를,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를 혼자 걷게 해서는 아니 된다.

“언젠가 제게 말씀하셨지요. 저의 처지도 엄 상전이나 박 상궁 마마님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러나 달라졌습니다.”

서는 자리가 달라졌으면, 바라보는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저는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하고자 바짝 엎드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저는 이제 지킬 수 있는 사람이고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음력 11월 중순의 밤바람이 매섭게 비현각의 지붕을 흔들고 지나갔다.

투명하게 얼어붙은 달빛이 흰 담비 털 모피 옷을 눈처럼 두른 윤서의 얼굴을 비췄다. 서늘한 미인의 얼굴이 위엄 있게 엄숙해졌다.

“나는 저하의 아내일세. 무거운 의무만 짊어진 채 홀로 걷고 있는 저하의 짐을 마땅히 나누어져야 할 동지란 말일세.”

“······!”

엄자치는 말없이 권 승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순간의 눈길조차 끌지 못하던 보모 나인에서 이제 세자빈의 자리까지 한 걸음만을 남겨 놓고 있는 어린 여인을. 그 걸음걸음 동안 착실하게 세손의 앞길을 막아섰던 이들을 제거해온 세자 저하의 가장 큰 조력자를.

“들어가시지요.”

엄 내관은 처음으로 관모가 벗겨질 정도로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그리고 저하의 허락이 없는데도 문을 열었다.

윤서는 엄 내관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사방에 등을 밝혀 대낮처럼 환하던 비현각 안은 침침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유일한 등이 뿜어내는 불빛 속에 이향은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었다. 불빛에 절반만 드러나는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윤서는 소리 없이 걸어가 이향의 뒤에 섰다. 그리고 손에 쥐고 온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향의 양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에 깊게 몰입하다 보면 얼마쯤은 주술처럼 보이는 기법도 행하게 된다. 그러나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인 것처럼, 현대의 과학도, 그에 따라 마음을 다루는 영역도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을 ‘보는’ 영역으로 나아가, 마음 속에 깊게 잠든 상처 받은 어린 영혼을 치유해 성인기의 여러 정신적 신체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으니.

이렇게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온몸을 살피며,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지점에 찬란하게 행복했던 순간의 온기를 보내는 것. 엄마 아빠와 손을 잡고 연둣빛 봄의 벌판에서 뛰놀던 날의 찬란한 햇살로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

이것이 윤서가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에 자신에게 해온 치유 명상 기법이었다.

윤서가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이향의 온몸에 위안의 빛을 보내자, 굳어졌던 이향의 어깨가 점차 부드럽게 풀리고 얕게 오르내리던 가슴의 호흡도 윤서의 것과 공명하듯 점차 깊고 느려졌다.

들끓던 마음이 고요해지자 이향은 비로소 온종일 느꼈던 분노와 좌절감과 배신감 – 그러하다. 오늘 이향은 하늘처럼 믿고 따라온 아버지께 생애 처음 ‘배신감’이라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을 느끼고야 말았다.

윤서를 편전에 들게 한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경제 전반에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보고 느끼게 할 의도였다. 그래야 윤서가 가진 미래 지식이 지금의 조선 현실에 맞춰 건설적으로 변형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하께서 윤서를 조정의 핵심 대신들 앞에 주목의 대상으로 내어놓으셨다. 화폐 유통을 시작으로 앞으로 펼칠 왕과 세자의 정책은 실은 저 여인의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행위셨다.

전하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이향 자신의 목표와 같았다.

물품을 만들어 팔고 동시에 고용한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공업과 상업이 사회 전체에 얼마나 강력한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는지가 윤서가 세운 공장 일대의 윤택함에서 실증되고 있었다.

윤서의 공장이 위치한 돈의문 밖 반송방 일대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중국의 사신들이 와서 묵는 모화관만 덩그러니 있던 주변으로 어느새 쌀과 잡곡을 파는 미곡 가게부터 면포와 비단을 파는 포목점, 각종 푸성귀와 찬거리를 파는 채소점, 마포 나루에서 물고기를 들여오는 어물전, 닭과 저 멀리 산동 일대에서 들여온 돼지를 길러 파는 육고기 가게, 아이들 주전부리 가게,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정음으로 적은 이야기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 그리고 직공의 아이들을 위한 학당까지 빼곡하게 들어섰다.

이 모든 흥성스러운 변화가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이 월봉으로 받은 동전이 돌고 돌아 만들어내는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직공은 모두 다 윤서와 박 상궁의 노비였다. 또한 아직은 노비이나, 십팔 년 가까이 월봉의 일부를 강제로 떼어낸 후 양민으로 속량시키게 될 노비 직공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는 일천즉천(一賤則賤)에 따라 자동으로 노비가 되는 보편의 관행과 달리, 처음부터 양민으로 속량 될 것이란 권윤서의 약속이 굳건히 시행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짐승 새끼 불리듯 노비를 불려 부를 쌓아가고 있는 조선의 지배층이 윤서의 공장 경영 방식을 반길 리 없다. 그래서 이향은 대외적으론 윤서가 왕실 내수사와 공동 경영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하여 장차의 반발을 미리 막아주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안배를 전하께서 오늘 편전에서 깨버리셨다. 한마디 말씀도 서너 걸음을 더 내다보고 하시기에, 이향은 그 말씀이 의도적이라고 느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었다.

그래서 저녁 수라 자리에서 처음으로 속내를 전하께 내보인 것이었다.

*****

“윤서의 경영이 장차 시행할 경제 정책의 실험장이기에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온데 어찌 그리,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왜 그리 얼굴이 어두운지를 하문하시기에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시며 잘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부러 언급한 것이다. 저기 저 그림처럼 앉아 있는 장차의 세자빈이 임금인 내가 일평생 만들고자 그리 애썼던 나라를 소규모로나마 이미 구현하고 있으니, 너희도 똑똑히 보고 그 굳어진 머리통 좀 벗어나라고, 부러 그 공장 일대를 말한 것이야.”

그리고 전하께서는 문득 또 덧붙이셨다.

“명심하거라, 향아. 성공했다고 칭송받는 모든 정책도 부수적으로 실패를 달고 온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군주는 늘 그 실패의 측면을 대신 맞아줄 신하를 세심하게 안배해 두어야 한다. 군주는 오로지 성공의 칭송만 받으며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이야. 그래야 또 다른 성공을 위해 신하와 백성을 끌고 갈 수 있느니.”

그러니까 새로운 경제 정책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부작용을 이미 예견하신 전하께서는 그 불만의 좌표로 윤서를 넌지시 제시하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장차의 세자빈이자 또 장차의 중전이 될 저의 아내입니다!”

이향의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전하께서 안쓰러운 듯 물으셨다.

“아내는, 신하가 아니라더냐?”

“전하!”

“말이 나온 김에 하자.”

전하는 작정하신 듯 그간 품어오셨던 불만을 아울러 쏟아내셨다.

“윤서가 여러모로 영민하고 너를 위해서도, 또 우리 홍위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볼 것도 없는 가문의 그 아이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기로 한 것이고. 그러나 향아, 너는 세자다. 세자는, 군주는 마음 가는 대로 총애를 몰아주어 다른 유력 가문이 불만을 갖도록 해서는 아니 되는 자리라는 말이다.”

장성한 아들에게 이런 말까지 해야 하냐는 듯 짜증마저 어리신 말투로 다른 후궁에 무심한 세자를 꾸짖은 전하께서는 문득 표정을 고쳐 엄숙하게 덧붙이셨다.

“나도 너 못지않게 윤서를 아낀다. 그러나 윤서는 또한 없애고자 마음먹은 이들은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없애는 아이야. 그 아이가 장차 세자빈이 되고 중전이 되었을 때 그 집념이 그릇된 길로 나가지 않는다고 너는 진실로 자신하느냐?”

“예, 전하. 저는 권윤서만은 믿습니다!”

“아니, 군주는 그 누구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아니 된다. 군주의 사사로운 믿음이 나라 전체의 위기가 된 사례가 역사서에 차고 넘침이야!”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리 유를 믿으셨습니까?’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말을 삼키기 위해 이향은 혀를 깨물었다.

“잘하고 있다, 향아. 너는 잘하고 있어. 금성과 함께 강력한 화포를 개발하는 것도 잘하고 있고, 광평을 보내 우리 조선의 백성뿐 아니라 여진의 여러 부족까지 두창의 위협에서 건져내 새로 개척한 북방을 안정시키는 것도 잘하고 있어. 또 안평과 임영으로 하여금 국부를 키울 여러 광물을 캐내는 것도 잘하고 있다. 그리고 유를 보내 우리에게 간절했던 각궁과 초석과 동을 가져오게 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이제, 관대해지거라.”

누구에게 관대해지라는 명이신지 이향은 바로 알아들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고 낮에 선래 통사가 와서 고하였다. 윤서의 상단이 북경에 심어 놓은 인사이기도 한 선래 통사 성대춘은,

“명의 황제께오서 선대 황제의 인척인 한확의 고초를 공신부인 한씨에게 듣고 애석해하셨다고 명의 환관 정동이 넌지시 말해주었습니다, 저하.”

하고 고하였다.

그러니까 이번에 오는 명 황제의 칙서에 공식적으로 한확의 복권을 명하지 않더라도, 칙사로 오는 자는 반드시 한확의 거취에 대해 구두로 황제의 우려를 전할 것이란 뜻이었다.

“방납 비리로 직첩을 회수당하고 귀양 가 있는 자들은 장차 왕실에서 세울 은행에 상당한 자금을 출자하도록 조치할 계획입니다. 그때 한확도 귀양에서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나 아바마마!”

이향은 몸을 세워 전하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늘 공손한 태도로 시선을 빗기던 아들이 권윤서가 때로 하듯 자신을 직시하자 세종께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셨다.

“저의 치하에서 그자들이 요직에 중용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하거라. 이제 네가 조선을 이끌 것이니. 나는 너의 조선을 믿는다.”

그리고는 ‘그 믿음에는 유에 대해 관대할 것이라는 믿음도 들어 있습니까?’ 여쭐 기회를 주지 않으시려는 듯 이만 물러가라는 듯 손을 내저으셨다.

*****

“마음이 여러모로 안 좋아서,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침묵으로 위로하는 윤서의 손길에 고단한 마음이 풀린 이향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화폐 유통을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저의 공장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릴 땐 옆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하의 말씀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

“편전에 앉아 들으니 저하의 신하들은 이제야 비로소 화폐에 대해 이해하시는 듯했어요. 이해하였으니, 이제 저하를 도와 새로운 경제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데 매진할 것이에요. 그 과정에서 제가 표적이 될 수 있단 가능성에 마음 상해하실 것 없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저하의 어깨가 저를 걱정해 움찔하는 것을 보았어요.”

“윤서야, 너는.”

“저하. 이향.”

윤서는 몸을 옮겨 이향의 무릎에 앉았다. 그리고 이향의 목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 세계에서조차 우두머리는 이인자를 키우지 않아요. 그것이 동서고금을 총망라한 권력의 비정한 속성입니다. 제가 살다 온 현대에서도 전제 권력이 유지되는 곳에서는 예외가 없었어요.”

윤서는 이향의 뒤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전하께서 저를 경계하시느라 당신을 덜 경계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에요. 전하께선 이제 세자빈이 될 저를 죽이지는 못하실 것이고, 또 교육 등 여러 일을 저를 믿고 함께 추진하고 싶어 하시니까요. 그러니까, 당신.”

윤서는 아주 오래도록 홀로 이인자의 그 고단한 자리를 지켜온 이향의 귀에 속삭였다.

“혼자 마음 끓이지 말고 뚜벅뚜벅 가야 할 길을 걸어가세요. 저하의 시대가 완전하게 올 때까지. 그래야, 홍위 아버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우리 홍위와 또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우리 금똥이를 지켜낼 수 있어요.”

“하아, 윤서 너는 정말,”

목이 멘 사내의 입술을 입술로 지분거리며 윤서는 장난스레 속삭였다.

“정말 대단하다고요? 그럼 대단하죠. 예쁘지, 똑똑하지, 돈도 잘 벌지, 여색에 무심하던 남자를 이렇게 은근하게 유혹도 잘하지. 세상에, 이향. 대체 전생에 무슨 복을 많이 지었길래 이런 복덩이 영혼을 만나게 된 거에요? 말해봐요. 나도 따라 해서 다음 생애엔 나 같은 배우자 만나게.”

*****

한 달 뒤 명나라 황실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

뜻밖의 칙서가 함께 당도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