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29화 (129/255)

제 129화. 조선의 세자들은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윤서는 일단 조선의 왕을 죽 썼다. 그리고

“이 중에서 세자로 있다 보위에 오른 왕은······.”

중얼거리며 기억 나는 대로 이어 쓰기 시작했다.

[문종, 단종, 성종 아들 연산군, 중종 아들 인종, 선조 아들 광해군, 효종 아들 현종, 현종 아들 숙종, 숙종 아들 경종, 정조 아들 순조(?).

27명의 왕 중 상당 기간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임금은 고작 아홉 명(혹은 순조가 어려서 즉위했다면 여덟 명)에 불과하고. 이 중에서 선대 왕이 장수하여 세자 기간을 오 년 이상 지낸 이는.]

여기까지 쓴 후 윤서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영혼이 조선에 올 줄 알았으면 심리학 대신 역사학을 전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

그나마 깊은 역사 지식은 조상님이자 윤서의 영혼을 여기로 끌고 오신 홍위 어머니 덕분에 실록이라도 좀 들춰본 세종과 문종, 단종의 재위 기간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매번 만점 맞은 국사 지식을 헤쳐보면!’

세자의 직위를 장기간 유지한 역대 왕은 문종, 연산군, 인종, 광해군, 현종, 경종 정도로 기억한다.

윤서는 다시 붓을 들어 썼다.

[보위에 오른 후 얼마 안 가서 죽은 왕: 문종, 인종. 경종 (3명)

폐주: 연산군과 광해군 (2명)

오래 재위한 왕: 현종 (1명)]

하아.

제왕 교육을 상당 기간 받은 여섯 명의 세자 중 유의미하게 왕 노릇을 한 이는 현종 단 한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숙종 아버지란 사실 외에 떠오르는 업적도 없다.

‘뭐지. 이 극악의 세자 교육 효율성은!’

게다가 가장 오래 세자 노릇을 한 축에 속하는 소헌 세자는 미심쩍게 급사했을 뿐 아니라 세자빈과 아들 둘도 아버지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사도 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굶어 죽었다!

조목조목 정리하고 나니 살벌한 결론만 나왔다.

[조선의 세자는 미래의 권력이라는 겉보기의 화려함과 달리 위로는 절대 권력자 부왕, 아래로는 경쟁 관계의 왕자들에게 끊임없이 견제당한다. 또한 성군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대신들의 엄격한 평가와 요구에도 끝없이 노출된다. 그 결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마모되어 건강한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처지가 된다.]

마음이 저절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정전에서 돌아온 후 윤서는 한창 옹알이 중이라 홍위와 뜻 모를 말을 진지하게 나누는 금똥이를 목욕시켜 재운 후, 출산 후 처음으로 매금이와 함께 달빛 아래 달리기를 하고, 깨끗하게 목욕한 후 옷을 갖춰 입고 서재로 꾸민 전각에 홀로 앉아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이전의 삶에서 매일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으로 행하던 일이었으나 여기 조선에 와서는 좀처럼 행하지 못했던 의식을 되살린 이유는 낮에 사정전에서 겪은 일 때문이다.

이향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신 후 세종께서 편전 회의에 참석하시는 일이 드물었다. 또 참석하여도 옥좌에 높이 올라앉아 묵묵히 경청하신 후 나중에 이향을 따로 불러 현안의 미진함을 짚어주신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직접 편전 회의를 주관하셨고, 그 안에서 이향은······.’

매우 신중한 모습에 더해 윤서의 공장이 언급될 땐 어깨를 움찔하기까지 했다.

늘 침착하고 당당한 모습이던 이향이 보인 그 어깨 떨림이 윤서가 달리기로 머릿속을 비운 후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 조선 세자가 보편적으로 보인 삶의 궤적과 그 과정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게 된 계기였다.

‘문종이 일찍 죽게 된 것이 소헌 왕후와 세종의 국상을 연이어 치르다 몸이 약해져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스트레스 호르몬이 늘 몸에 과다하게 분비되고 있었겠고 그 때문에 면역 체계도 약해져 있었겠지. 그러니까 원 역사에서 아이도 겨우 우리 희아와 홍위, 양 사칙의 딸 선아만 살아남았던 것이고.’

세자로 살면서 받는 과한 스트레스를 양녕 대군과 사도 세자는 기행과 폭력, 색욕으로 풀어냈는데, 이향은 밖으로 푸는 대신 자신의 수명을 깎아 먹으며 완벽한 세자 역할을 수행해 왔구나.

더구나 아버지는 셋째 아들로 벌써 십 년을 넘게 세자로 있었던 양녕 대군을 폐세자하고 대신 책봉된 임금이니 잘난 동생들 틈에서 이향은 세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혼신의 힘을 다해왔을지는······.

하아.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일며 이향을 향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연민이 들었다.

윤서가 이향을 깊게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남편인 그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어린 홍위 때문이었다.

윤서가 본 이향은 이제 갑갑하게 조이던 옷깃을 풀어놓듯 세자의 자리가 주는 부담을 때로 벗어놓을 줄 알게 되었다. 아까처럼 움찔하는 순간이 드물게 있겠으나 본격적인 대리청정에 들어서 주도적으로 정국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오래만 산다면 세종보다 더 훌륭한 치세를 이룰 것이라고 윤서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홍위는 이제 시작이다.’

아직 세손이라 세손 강서원의 배동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여덟 살부터는 엄격하게 짜인 제왕 교육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원래 역사와 달리 오랫동안 건재할 이향 밑에서 홍위도 이향처럼 오랜 기간 세자로 살아야 할 것이니.

“거기 누구 있느냐?”

윤서가 밖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예, 소인 예 있습니다.” 하는 답변이 들렸다. 윤서의 업무를 돕는 강 내관이었다.

“세자 저하께서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알아 오게.”

“예, 마마님.”

강 내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벌써 한참 전에 해시 반각 (밤 열 시)를 알리는 괘종소리가 울렸었다.

평소라면 벌써 협경당으로 돌아왔을 시간인데 오늘 이향에게선 전하와 저녁 수라를 함께 들게 되었다는 기별만 유시 (오후 다섯 시) 경에 있었을 뿐이었다.

윤서는 이향의 소식을 기다리며 오늘 상념 일기의 마지막을 적었다.

[홍위가 다른 세자들의 절차를 따라가게 두어서는 아니 된다. 특히,]

윤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서재 방구석에 세워져 있는 튼튼한 철제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념 일기를 적고 나면 늘 종이를 접어 우체통의 입구처럼 생긴 좁은 입구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측면에 난 상자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윤서만이 가지고 있다. 솔직하게, 누가 보리라는 우려 없이 글로 내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윤서를 위해 이향이 만들어준 상자였다.

윤서는 자신 외에 읽을 리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붓을 들었다.

[홍위가 가장 친하게 돌봐주는 금똥이는, 나의 아들 금똥이는,]

이 글자를 적어가자 조선 세자들의 비극적 운명에 굳어졌던 입매가 저절로 스르르 풀렸다.

금똥이가 “음마”를 겨우 발음하기 시작하자 홍위는 매일 옆에 붙어 앉아서 “헝아!”를 따라하게 하였고, 그 덕분에 금똥이가 두 번째로 말할 수 있게 된 단어가 “어엉아(엉아)”였다.

그 후 홍위는 금똥이에게 여러 단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금똥이는 홍위의 입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비슷한 억양의 옹알이를 만든 후 기뻐하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홍위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홍위는 또 금똥이의 머리 위에 부드러운 천을 씌우며 “헝아, 없다!” 외치고 다시 벗기며 “까꿍” 소리치는 까꿍 놀이도 열심히 해 주었다. 덕분에 금똥이는 엄마 다음으로 홍위를 가장 좋아했다.

[홍위와 금똥이는 지금 서로를 향한 친밀한 애정으로 묶여 있다.]

이제 막 똑바로 등을 세워 앉을 수 있게 된 금똥이가 홍위와 마주 앉아 노는 모습은 윤서의 코를 찡하게 할 때가 많았다.

열심히 다정하게 놀아주는 홍위의 모습이 바로 홍위가 금똥이처럼 어렸을 때 자신이 받고 싶었던 다정한 놀이라는 것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홍위는 원손이 아닌 아기로서 즐겁게 놀아줄 이를 가지지 못했고, 그 결핍을 금똥이에게 순수한 유희로 놀아주면서 채우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가 기쁨이 되는 두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윤서는 다시 입매를 굳히며 이제껏 써 놓은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큰 권력이 얽혀 있는 왕가에는 형제의 순수한 애정을 뒤흔들 요소가 너무나 많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때 밖에서 강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님, 세자 저하께서는 비현각에 계시온데, 오늘 올라온 보고서를 처리하시느라 늦으실 것이니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침수 드시라는 명이셨습니다.”

“···알았네. 자네도 가서 쉬게.”

“저, 그런데 마마님. 소인이 들은 말이 있사온데,”

“?”

“잠깐 들어가 고해도 될런지요.”

“잠시만.”

윤서는 아직 덜 마른 종이를 눈에 띄지 않도록 발치에 내려두고, “들어오게.” 외쳤다.

강 내관이 추위에 코가 빨개진 채로 들어왔다.

“거기, 난로에 손 좀 녹이면서 말하게.”

윤서가 말하자 강 내관이 고개를 흔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강 내관과 함께 차가운 겨울 공기가 훅 윤서의 몸에 달려들었다.

“아까 저녁 수라에서 전하께서 드물게 큰소리를 내시었다 하여.”

“···무슨, 일로?”

“수라 상궁 말로는 세자 저하의 옥안이 편치 않으셨고 그에 대해서 전하께서 자꾸 캐물으시자 세자 저하께서 시중드는 상궁과 나인 모두를 물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세한 상황은 모두 모르오나, 워낙 처음 있는 일이라 대조전의 궁인 모두 지금 초긴장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

“그 일로 세자 저하께서도 무척 마음이 불편하셨는지, 아까 수라 후 중궁전에 들으셔서 중전마마와도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고, 지금 비현각에서 계시면서 술을 드신다고 하여, 소인 감히 외람되게 고하옵니다.”

“술을?”

“예, 그 또한 거의 없던 일인지라, 저희도 덩달아 긴장하여 있습니다.”

“왜 진작 고하지 않았······.”

묻다 말고 윤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할 새가 없었을 것이다.

윤서가 달리기를 하느라 매금이와 궐을 비웠고 그 후 목욕을 하고 여기 서재로 왔으니.

서재에서 윤서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어지간히 급한 부름이 아니고는 방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알았네. 물러가게.”

강 내관을 물린 후 윤서는 철 상자에 넣으려던 종이를 접어 들고, 강 내관도, 나인 여럿도 모두 물리고 홀로 비현각으로 향했다.

비현각 앞에는 엄자치가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하께서 홀로 술을 드신다고 하여 왔어요.”

“예, 하온데 들어가시는 것이 좋은지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엄 상전의 얼굴은 어두웠다.

“전하와 저하 사이에 대체 무슨 말씀이 오가셨기에 저하께서 홀로 술을 다 드십니까?”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엄 상전이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사안인 듯했다.

“···평양에서 두창 접종을 하는 것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지요?”

“예, 광평 대군께서 사람을 보내오시길, 평양 인근까지 모두 접종하였고 이제 그 위로 차차 올라갈 것이라 하옵니다. 소문을 들은 여진족 추장들이 예방 침을 놓을 인원을 먼저 파견해 주십사 사람들을 보내 와, 혜민국 소속 의원과 의녀 여럿이 먼저 북방으로 향하고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두창 예방 문제는 아닌데, 그럼 무엇이지.

“고해 주세요.”

“마마님.”

엄 상전은 그냥 돌아가시라는 듯 살짝 고개를 흔들었지만, 윤서가 계속 서 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을 향해 고했다.

“세자 저하, 권 승휘 마마님이 잠시 뵙기를 청하옵니다.”

“······.”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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