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28화 (128/255)

제 128화. 권력자 세종과 이방인 윤서

“그럼, 최만리. 말해보게. 홍단이에게 준 저화 오십 장이 매분구를 파는 상인에게 흘러 들어갔고, 그 상인은 학질을 앓는 아내를 위해 그 돈을 약값으로 의원에게 썼고, 의원은 아들의 학당 수업료로 그 돈을 썼어. 학당의 선생은 그 돈으로 어여쁜 홍단이의 하룻밤을 샀지. 자, 저화 오십 장이 돌고 돌아 다시 홍단이에게 왔는데, 그 사이 저화는 실제 몇 장이 된 것인가?”

“···호, 홍단이는 그럴 리가······.”

최근 첩으로 들이기로 약조한 어여쁜 기생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허연 머리를 도리질하며 총액을 계산하던 최만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나 놀라운지 일순 얼굴을 가득 채운 주름마저도 확 펴져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저, 전하.”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15세기, 그럴듯한 상품도, 그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지지할 물적인 기반도 변변치 않아 검약만이 미덕인 나라에서 임금이 제시하는 화폐 유통의 파생 효과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었기에 임금이 제시한 핵심을 바로 이해했고, 나아가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도 바로 인지했다.

그것은 바로 ‘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사회의 도래였다.

그것은 현재 각종 기물을 만드는 데 동원되는 천한 신분의 장인과 교묘하게 이익을 도모하는 천한 장사치가 ‘돈’을 매개로 양민으로, 나아가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신분으로 올라섬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공고한 신분 지배 체계가 뿌리부터 뒤흔들릴 수도 있는 위험을 의미했다.

그리고 거대한 자본과 토지를 독점한 권세가가 절제 없이 물자를 강매하고 토지를 수탈해간 고려 말 악몽이 조선에서 다시 재현될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

“······.”

“······.”

편전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각기 정말로 화폐가 임금의 예시처럼 돌게 될 때 조선은 어떠할지, 나아가 학문적 신념과 가문의 위신은 어떻게 될지 그려보느라 머릿속이 분주하였다.

그때, 편전에 오월의 종달새 노래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대제학 대감에게 간 오십 장부터 하먼, 홍단이에게 갔스 때 백 장, 홍단이에게서 매분구 상인에게 갔스 때 백오십 장, 상인에게서 의원에게 갔스 때, 음, 또 이백 장, 의원에게서 선생에게 갔스 때 이백오십 장, 선생이 또 홍단이의 밤으 샀스 때 삼백 장! 와, 오십 장이 삼백 장으노 여섯 배 부너났습니다!”

귀여운 홍위의 순수한 감탄에 편전의 무거운 분위기가 요술처럼 가벼워졌다. 돈이야말로 조선을 망칠 요물이라고 딱딱하게 입가를 굳혔던 이들마저 부드럽게 얼굴을 폈다.

“그언데, 홍단이는 기생인데, 밤도 팟아요?”

푸하하.

이 말에 끝내 꼿꼿하던 최만리까지 폭소를 터트렸다.

근엄하던 편전에 조선 최고 권력자와 조정 대신들의 웃음 소리가 소용돌이쳤다.

“하이고, 우리 세손이 정말로 똑똑하구나. 우리 조선의 미래가 이렇게 밝아요. 이리, 이리 오너라, 홍위야.”

세종께서 홍위를 어좌 위로 부르셨다.

윤서는 손을 뻗어 홍위가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홍위는 뒤돌아서 윤서에게 씩 웃어 보이곤, 호위 내관의 도움을 뿌리치고 짧은 다리로 옥좌를 기어올라 할아버지 세종의 무릎에 앉았다.

세종께서는 홍위를 앞에 꼭 안으시고 또 말씀하셨다.

“우리 세손의 눈에도 화폐 유통의 이점이 이렇게나 명확하다. 또한 화폐가 유통될 때 생겨나는 이점을 실제 증명하는 현장이 있으니, 돈의문 밖 목가구 공장과 비누 공장, 면포 공장의 직공이 사는 곳을 경들은 보라.”

“!”

“!”

좌중의 시선이 또 좀 전에 세손이 앉아 있던 곳으로 다시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낭랑한 목소리로 화폐의 기적을 말한 차차기 국왕이 앉아 있던 곳이 아니라 흰색 길게 늘인 발 뒤, 또 한 겹의 흰색 너울로 서늘한 미모를 가린 채 조각처럼 앉아 있는 장차의 세자빈이었다.

“!”

윤서는 세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곤룡포 속 어깨를 움찔한 이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향이 자신을 여기에 앉힌 이유와, 세종께서 자신을 여기에 앉힌 이유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검은 숯으로 후텁지근할 정도로 덥힌 편전의 공기가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권력을 가진 자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다. 권력이 강해질수록 타인의 정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정서조망수용력(affective perspective taking)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회 심리학 시간에 배웠던 교과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강의 마지막 날, 늘 빵떡 모자를 쓰시던 교수님이 졸업생에게 해 주신 가르침도 떠올랐다.

“사회에 나가보면 알겠지만, 세상의 모든 거창한 이념도 알고 보면 다 밥그릇 싸움이야. 한정된 밥그릇을 놓고 존나게 싸우는 거지. 그러니까 무슨 말을 어떻게 고상하게 하든, 너희는 이제부터 너희가 발 딛고 선 곳이 밥그릇 싸움장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기면 기분 좋게 배 두드리고 지면 비참하게 굶어 뒈지는.”

한 학기 내내 귀를 쫑긋 세워야 간신히 들을 정도로 가는 목소리로, 아주 적확한 학술적 용어만 지루하게 늘어놓던 교수님이 이날만은 아주 생생한 언어로 육십 년이 넘게 살면서 깨친 삶의 본질을 나눠주셨다.

“그러니까 특히 여학생들, 쓸데없이 여성다운 처세 이런 거 공부할 생각하지 말고 당장 오늘부터 복싱, 주짓수 등 무투술을 익히도록. 그래야 거창한 말과 더 높은 직위와 더 큰 덩치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때 심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어. 언제든 ‘저 시건방진 턱주가리 한 방 날리고 만다!’ 하는 자신감이, 깡이 있어야 제 밥그릇을 당당하게 지켜낼 수 있단 사실을 잊지 말도록!”

그 충고를 뼈에 새겨 복싱과 주짓수를 익힌 덕에 어떤 내담자가 와도 상담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심리적 방어기제를 단단히 올려야 한다는 걸 윤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혹독한 권력 투쟁의 장에서 밥그릇도, 목숨도 지키기 위해서.

벌써 26년 넘게 권력의 최정상에 군림해온 세종께서는 오랜 숙원인 화폐 유통을 반드시 성공하기 위한 집념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께선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자연스럽게,

윤서를 새 정책의 상징적 존재로 세우셨다!

“어떤 정책을 실시함에 당장에 좋았으나 나중에 싫은 일도, 또 당장에 싫었으나 나중에 좋아진 일도 역사에 많았으니, 한나라의 선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선제는 당대 평가로는 세상에서 가장 총명하고 지혜 있는 임금으로 관리는 각자의 직무에 적합하고 백성은 안정되게 생업에 종사하였고, 밖으로는 흉노가 번신을 칭하며 들어와 한나라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들어서는 선제의 총명함이 흉노의 화를 불러왔다고 비난한다. 또한 송나라의 신종도 백성을 평안하게 할 마음으로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펼쳤는데, 그 결과는 또 어떠하였는가? 처음에 내가 동전을 강제할 때 백성의 고초가 예견되어 마음에 걸렸으나 여러 부처에서 강력하게 금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하여 그대로 따랐더니 여러 참담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거 봐, 이거 봐.

천하의 그 세종께옵서도 정책의 실패를 슬그머니 신하의 책임으로 떠넘기신다. 이것은 절대 권력을 쥔 자들이 자신에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에서 흔히 가지게 되는 심리로, 세종께서도 인간인지라 예외가 될 수 없다.

관찰만 하는 입장이라면 흥미진진하여 오늘 밤 늦게까지 <세종 심리 일지>를 썼을 것이나, 자신의 일이 되고 보니 여유로울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었다.

“화폐의 법은 당장은 어렵고 복잡하나 그 근본은 이처럼 이로운 것이니, 군주로서 어찌 알면서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경서를 깊게 공부함은 모두 그 실용을 위해서이니, 경들은 내 마음을 알고 화폐의 유통을 정착시킬 방안을 우리 세자와 함께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바란다.”

공은 이제 세자 이향에게 넘어왔다.

이향은 어깨를 펴고 천천히 좌중의 신하를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화폐의 이점은 무궁무진하나 당장 적극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현실도 고려하고 있소."

이향이 말을 시작하자 신하들, 특히 젊은 연령대의 신하들이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 전하는 이미 한 발 물러선 군주이고, 이향은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 같은 군주였기 때문이다.

"하여 그간 화폐 정책에서 가장 미흡한 점인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막고, 또 관청에서 적극적으로 화폐를 받고 현물을 내어줄 것, 작은 단위의 화폐에서 고액의 화폐까지 단계별로 주조하여 모든 거래를 매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을 면밀하게 준비하여 단계적으로 시행할 것이오. 또 왕실 차원에서 화폐의 가치를 보증해줄 방안도 검토 중이니 경들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바라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먼저 의정부부터 호조와 협력하여 화폐 단위의 적정 가치를 논하겠습니다.”

영의정 황희가 먼저 나서 어명을 받았다.

"저희 공조에서는 위조가 어려운 화폐 주조 방법론을 고심하고, 저화와 동전, 철전, 은화 등 각종 화폐의 주조 방법을 실험하겠습니다."

“저희 집현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서 어찌 화폐 단위를 정하였는지 연구하여 곧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공조 판서 정분과 집현전의 대제학 최만리도 말하였다.

전하께서는 결심하신 사안은 끊임없이 집요하게 추진하여 기어이 이루셨고 이제 그 열정과 추진력을 세자가 이어받아 각 분야의 개혁을 의욕적으로 이끌고 있다.

거기에 신하들도 화폐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이점을 가져올 수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화폐 실행 정책은 기존과 달리 세심하게 준비되고 치밀하게 시행되어 성공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화폐 유통의 성공적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장차의 세자빈이 편전 안에 있었으니 문민 모두를 설득하기 좋았다.

이것이 바로 세종께서 윤서를 굳이 어좌 옆에 앉히신 이유였다.

그러나 윤서는 온통 희뿌연 시야 속에 우두커니 섬처럼 홀로 앉아 오늘을 곱씹었다.

편전에 들어온 신하 모두는 지금 윤서가 인체 공학의 비율을 적용하여 만든 좌식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고, 또 집 사랑방에도 분명 최소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부인들은 비누와 화장품을 사기 위해 쌀을 몰래 모은다고도 하였지.

그런데 오늘 오늘 전하께서 돈의문 밖 윤서의 직공들 동네를 언급하셨다.

그러니 신하들은 전하의 화폐 정책의 재추진이 윤서와 관련되어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각종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그에 따라 화폐 유통이 정말로 활발해질 때 필연적으로 불거질 문제의 원망도 윤서에게로 향하기 쉽게 되었다.

하필 오늘 이 편전 회의에 그저 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윤서는 군주의 과오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요녀가 될 가능성이 생겨나고 말았다!

이것이 아까 전하의 말씀에 이향이 어깨를 움찔한 이유이고, 윤서가 뜬금없이 기억 속 희미해지던 심리학 수업 하나를 소환한 이유였다.

‘하지만, 주짓수가 있으니까.’

힘이 절대적으로 약해도 상대의 무게 중심을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니까. 또 정 뭐하면 손등 뼈 금 갈 거 감수하고라도 턱주가리 한 방은 날릴 수 있으니까.

한 방 날릴 자신이 있으니 치열한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서 밥그릇도, 목숨줄도, 우리 홍위와 금똥이도, 그 무엇도 다 지킬 자신이 있다!

다만 이제 다시는 이따위 부르카 같은 너울 따위를 뒤집어쓰고 무시무시한 정치 세계의 정점에 겁대가리도 없이 인형처럼 앉아 있다가 표적이나 되는 어리석은 짓 따위, 다시 하지 않으리라.

이건 절대 권력의 주변에 살게 된 인간으로서 전술적인 패착이었다.

현재 국왕이 중시하고, 차기 국왕은 지나치게 총애하고, 차차기 국왕은 각별하게 애착하고, 게다가 거부이기까지 한 존재.

이런 희귀한 인간은 성별을 떠나 그 존재 자체로 모든 이에게 선망과 질시와 경계가 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명백한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각기 공과 권력과 명예를 다투는 조선 최고의 대신들 앞에서 경솔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다니!

그것도 여성은 온전한 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종교적 신념처럼 굳어진 15세기 조선에서!

홍위와 금똥이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전에 인간으로 온전히 기능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 소홀했다는 뼈 아픈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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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편전 회의 어땠어요?”

사정전에서 나오자마자 시야를 가리는 너울을 벗어 조 상궁에게 건네고 홍위 손을 잡고 오면서 윤서가 물었다.

홍위는 대답 대신 팔을 쭉 들어 올려 달라는 시늉을 했다.

윤서는 홍위의 오른손을 잡아 쭉 들어 올리자, 홍위는 폴짝 뜀뒤기를 했다.

걸음마다 폴짝거리는 홍위에게 윤서는 또 속삭였다.

“이담에 우리 아기씨도 아바마마처럼, 또 할바마마처럼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논할 것인데요.”

그러자 홍위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윤서에게 팔을 내밀었다.

“안아져.”

금똥이를 낳은 후 처음으로 안아달라는 요구였다.

“!”

윤서는 홍위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홍위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무엇이, 속상했어요. 우리 아기씨.”

그러자 홍위는 익선관이 윤서 뺨을 긁지 않게 조심하면서 뺨을 맞대고, 아이답지 않게 한숨을 섞어 말했다.

“다음에는, 어먼니. 펀전에 가지 마데요.”

“······.”

윤서는 대답 대신 홍위를 아주 꽉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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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나온 세종의 말씀은 실록에서 화폐 관련한 세종의 말씀을 인용, 변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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