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화. 화폐와 세종의 신하들 (2)
“국가의 입법(立法)은 반드시 제정하기 전에 폐단이 없을 것인지 면밀히 검토한 후에라야 제정하는 것으로 갑자기 고치고 갑자기 행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태종과 성상께옵서 모든 일에 성덕을 두텁게 쌓아오셔서 만백성의 평안을 이룩하는 법을 세우고 시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화폐에 있어서만큼은 법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태종 즉위 초 저화 유통이 시행되었다가 백성의 고초가 심하고 기근 등 재변이 끊이지 않아 중지되었고, 십 년 후 다시 저화 유통을 제정하였지만 실효를 잃었고, 전하께서 동전만을 사용하라는 법을 또 만드시며 백성의 고초와 원망이 지극히 심합니다.”
차분하게 고하는 이계전은 이제 막 서른이 넘은 집현전의 직제학으로 흐지부지 멈춰 있는 화폐의 유통을 재실행하려는 계획에서 이향의 기대를 가장 많이 받는 신료였다.
“조부가 전조의 절의지사 이색이고 외조부가 개국 공신 권근인데, 조상 못지않게 경서를 익힌 폭이 넓고 깊을 뿐 아니라 현안을 파악하는 눈도 빼어나오”
어젯밤 이향이 들려준 평이었다.
‘이색’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는 어느 곳에 피였는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가 흘러나왔다.
윤서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놀라는 이향을 향해 부러 과장되게 웃고는,
“이것이 대한민국 암기 교육의 위대한 힘입니다!”
으쓱이며 잘 덮여 있는 금똥이 이불을 괜스레 다시 손 봐 주었다.
이계전이 세조 쪽의 공신이었단 사실을 이향에게 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수양 대군은 유구국을 거쳐 그 서쪽 복건성으로 항해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해양 상단이 이용하는 무역로를 탐색 중이란 보고서를 보내왔다. 그 보고서에 쓴 것처럼 수양 대군이 계속 조선의 무역로를 개척하는 데만 전념한다면 이계전도 이향의 신하로 내내 충성을 다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윤서는 슬쩍 며칠 전 광평 대군과 함께 만난 한명회에 대해서 물었다.
“그자는,”
이향은 이불을 쥔 윤서의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간 것을 보고는, 윤서의 침의 자락을 잡고 쑥 당겨 품에 안고 덤덤하게 말했다.
“일머리는 있더구나. 한양에서 실시한 것처럼 두창 침 접종 지역을 바둑판 모양으로 나눈 후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통행을 제한하게 하고, 각 고을에 두창 걸린 말과 의원 조직을 동시에 파견하면 참빗으로 이 훑듯 빠지는 이 없이 침을 놓을 수 있을 거라 하더구나.”
목을 간지럽히는 수염과, 머리를 울리는 덤덤한 음성 모두에서 한명회 같은 것 따위에 자신의 치세가 흔들릴 리 없다는 자신감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윤서의 불안이 저절로 잦아들 만큼.
여차하면 매동이와 난금이가 죽여 없앨 것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안도할 만큼 확신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래서 윤서는 자신이 우리 홍위를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소환된 영혼이라 밝혔던 순간 이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신하는 무릇 제가 닦은 학문과 경륜을 펼치게 해 줄 이를 군주로 따르는 법이다. 왕실이 흔들려 보위가 뒤바뀐 것은 왕실 내의 권력 다툼이지 신하의 충성과 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윤씨의 일을 보고 처절한 분노와 배신감을 곱씹기도 하였지만, 이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스스로 세운 원칙에 충실한 군주였다.
‘그러니 빼어난 가문 출신의 저 젊은 인재 이계전도 이향의 신하로, 또 더 멀리는 우리 홍위의 신하로 더욱 찬란하게 경륜을 펼쳐갈 것이다.’
윤서는 홍위의 앙증맞은 익선관과 그 앞으로 이향의 너른 어깨 너머 서 있는 이계전을 너울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열심히 응시했다.
“동은 본시 우리 조선에서 산출되지 않고, 그나마 만든 동전마저 몰래 녹여 그릇으로 만드는 등의 폐해가 컸습니다. 그래서 여염에서 동전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그로 인해 하는 수 없이 금령을 어기고 포화로 생필품을 거래한 자들이 매를 맞고 억울해 죽는 일이 많으므로 지금의 동전 화폐가 개선되어야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저화는 이미 조금의 손재주만 가지고도 위조할 수 있다는 점, 또 닳아 해진 저화는 그 값어치가 점점 더 떨어져 제 값의 삼 할도 못 받게 되니 모두 꺼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하잔 것인가?”
이향이 묻자 이계전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고래로부터 포를 화폐로 사용하였기에 신은 그대로 오승포를 화폐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오나, 기어이 따로 화폐를 만드시고자 한다면 저화가 아닌 철전(鐵錢)으로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은 우리 땅에서도 나고, 중국에서도 예로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겨넣은 철전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철전으로 동전을 잇는다 하여도 화급히 시행하지 마시고 백성들에게 포화와 병행하여 사용하게 허락하여 철전 사용에 익숙할 시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또다시 화급하게 새로운 화폐 법을 시행하여 법에 대한 불신을 더 키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확실히 이계전은 문제점의 해결안은 정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화폐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가지지 못한 듯했다.
시대의 한계라고 윤서는 생각했다. 윤서가 지금 15세기 어떤 점을 절대 이해할 수 없듯 인간은 각자 타고난 지역과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존재라는 것이 다시금 실감되었다.
“신 하연 아뢰옵니다. 성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직후 돈을 사용하자는 논의부터 신은 참여하였사온데, 그때 신하들이 모두 영구히 좋은 계책이라 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거듭거듭 폐단만 나타나며 백성들이 저화나 동전이라면 치를 떨며 미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쇠돈을 다시 만든다고 하더라도 의심하고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니 예전의 습속을 따라 오승포를 화폐로 사용하게 하소서.”
좌의정 하연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하였다.
영의정 황희는 고개를 흔들고 늙어 떨리는 음성으로 의견을 밝혔다.
“처음 태종께옵서 저화를 만들어 사용할 때 잘 정착되지 않았던 연유는 관에서조차 저화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또 저화가 쓰다 찢어지면 사섬서에서 같은 값어치의 새 저화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구 저화 두 장에 새 저화 한 장으로 바꿔주니, 포는 가지고 있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데 저화는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신 생각에 철전은 저화처럼 해질 염려가 없고, 동처럼 녹여 그릇으로 만들 염려가 없으니, 철전을 행하심이 옳을 듯합니다.”
황희 어르신은 확실히 왜 화폐가 정착되지 못했는지 구체적인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전하와 세자의 뜻이 화폐의 유통에 있음을 알고 미리 찬성하고 있었다.
“신 정분도 황희의 말에 찬성입니다. 신이 장사꾼에게 듣기를 저화든 동전이든 백성에게 큰 해가 없는데 관물을 받는 관리가 모두 현물로 받으려 하지 저화나 동전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 하였습니다. 관리가 저화나 동전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황희의 말처럼 값어치를 확신하지 못해서이니,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분의 말이 끝나자 숫자에 밝은 정인지가 나섰다. 정인지는 이향의 명을 받아 봄부터 늦가을까지 서해안의 염전을 건설하는 일을 맡아 갯벌에 살다시피 해서인지 아직도 얼굴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
“처음 태종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저화를 발행하실 때 매긴 가격은 저화 한 장에 쌀 두 말, 오승포 베 한 필 가격이었습니다. 처음 시도에 실패하여 십 년 후 다시 태종께서 저화로만 유통하게 명하셨을 때, 의창을 통해 저화 유통을 독려하는 동시에 기근을 구제하려 하셨는데, 이때 저화 한 장에 쌀 여섯 되를 받게 하시면서 저화의 가격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또한 파괴된 구 저화 두 장당 신 저화 한 장으로 바꿔주도록 하여, 저화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정인지가 그간 있었던 정책의 혼돈을 이어가자, 세자 이향이 손을 들었다.
“경의 뜻은 알겠소. 근자에도 흉년이 들어 규휼미를 풀 때 저화 한 장에 쌀 한 되로 한시적으로 책정하였으니, 앞으로는 임의로 화폐의 가격을 흔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일 것이오. 맞소?”
“예, 저하. 다만,”
“실제 화폐 가치를 실제 물가와 연동하여 어떻게 정할지는 실행안이 확정되면 면밀하게 계산합시다. 오늘은 그간 화폐 정책의 공과 과를 듣는 자리오.”
그러자 정인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대신 머리가 허옇게 센 대신 하나가 단호한 얼굴로 나섰다.
“신 최만리 아룁니다. 동전이나 저화가 자리 잡지 못한 데에는 부상 대고로 일컬어지는 상인 무리와 각물을 만드는 공장의 주인들이 오로지 저화와 동전을 사용하라는 국가의 법을 어기고 몰래 포화(布貨)와 미두(米豆)를 숨겨두고 무역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 최만리는 어좌 옆에 발을 내리고 앉아 있는 윤서 쪽을 힐긋 보았다.
포를 숨겨둔 적이 없는 윤서로서는 억울할 노릇이었지만, 최만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공장이나 상인의 존재가 아니라 여인인 윤서가 감히 편전에 들어 있는 사실일 것이므로, 윤서는 덤덤하게 베일 너머로 최만리를 응시하였다.
“또한 저화를 사용하지 않고 포화를 사용하는 자들을 잡아내기 위해 백성들간에 서로 감시하게 하고, 관에 고발하는 자는 포상까지 하니 인심이 흉흉해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고발당한 이들은 모두 견디지 못하고 포로 양식을 구하려던 늙은이와 과부들 뿐이니, 이들이 고발당해 장을 맞고 집을 팔아 저화로 내야 하는 벌금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까지 하니 어찌 딱하지 않습니까?”
전하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백성의 고충을 적나라하게 고하자, 옆에 높이 앉으신 세종께서 “어허” 탄식하는 소리가 윤서 귀에 들렸다.
그래도 최만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작정한 듯 윤서 쪽을 다시 한번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또한 대개의 유자(儒子)들은 지금 한양에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 공장의 비누와 목가구 제품, 비단, 수가 정교하게 놓인 여러 면 제품, 지나치게 화려한 도자기, 반짝거리는 유기 등이 모두 사치를 조장하고, 미곡을 생산하여야 할 백성들이 땅을 떠나 공장에 일하고자 하는 헛된 꿈을 꾸게 한다고 깊게 통탄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포화는 여차하면 옷으로 짓고 이불을 만들고 실제 쓰임새가 있는데 저화나 동전은 그 쓰임새가 돈 이외에 다른 것이 없으니 사치를 더욱 조장할 뿐 무슨 이득이 될 것이냐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현전 대제학으로 이번 고금의 화폐에 대한 연구를 총괄한 분치고는 너무 고루한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평소 청백리로 꼿꼿하게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유지하며 학문을 가열차게 닦는 분이시니, 최만리의 의견이 이 시대 보통의 유학자들과 일치할 것이다. 시대와 환경이 가진 지식의 한계였다.
화폐는 교환을 위한 매개로 상징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라는 상식은 결국 온갖 유무형의 재화가 활발히 교환되는 시대에 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상식이었다.
국토가 거의 산으로 둘러싸여 그 동네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먹고 사는 15세기 조선에서 ‘교환을 위한 매개’로서의 화폐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리라.
그러나 이향과 우리 홍위의 조선은 온갖 물품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방방곡곡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될 것이기에 반드시 화폐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폐의 순환이 가져올 이점을 신하들부터 명확하게 인지해야 할 것인데.
윤서가 안타까워할 때였다.
“화폐는 과연 무엇이고, 화폐가 돌면 무슨 좋은 점이 생기는가?”
윤서의 안타까움을 읽기라도 하신 듯 어좌에 앉아 계신 세종께서 갑자기 하문하셨다.
“화폐는 예전 패각(조개껍질)부터 지금의 금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네. 그러니 화폐는 우리가 ‘화폐’로 하자 하고 약속한 무엇이라고 볼 수 있네. 그럼 그런 약속에 불과한 물품인 화폐가 우리 조선에 돌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를 따져 보세. 내가 최만리 그대에게 요새 가격으로 쌀이 두 되인 저화를 일백 장 주었다고 가정하세. 그 일백 장을 경이 받아서 그 중 오십 장은 기생 홍단이에게 주었고,”
“전하! 기, 기생이라니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들어보게. 또 오십 장은 마침 관모가 필요해 모자장에게 주었어. 홍단이는 경에게 받은 오십 장을,”
전하께서는 일전에 윤서가 목공장에서 말씀드린 대로 화폐의 유통이 가져오는 기적을 가장 고루하게 반대하는 편에 서 있는 최만리에게 설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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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나온 각 신하들의 의견은 세종 실록에 기록된 대화를 인용, 부분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