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화. 화폐와 세종의 신하들 (1)
“무의식이란 것은요.”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까.
윤서는 잠시 망설였다.
세종에서 문종으로 이어오는 계보답게 홍위는 비범하였다.
희아가 이향을 닮아 수리와 물리적 추론력이 더 빼어난 반면 홍위는 일찍부터 당대의 천재 성삼문에게 배워서인지 세종과 이향의 빼어남을 골고루 다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윤서에게 배운 지식을 홍위가 알고 있다고 하여도 다른 이들은 세종이나 세자께 배웠거니 할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세종’이셨다.
요새 세종께서 희아와 홍위에게 직접 경서를 가르쳐 주고 계신데, 거기서 홍위가 무심코 오늘 들은 것을 옮기면 세종께선 분명히 “권가에게 배웠더냐?” 물으실 것이고, 그럼 또 윤서를 천추전으로 불러 물으실 것이다.
“어디서 알게 된 것이냐? 또 그, 약을 먹은 후 정신을 잃었을 때 기이하게 얻은 지식이더냐? 그런데 그건 그러하다 치고.”
세종께선 윤서가 극약을 먹고 다시 살아난 후 기이한 지식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을 그대로 믿는 눈치는 결코 아니셨다. 그렇지만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기에 벼락 맞은 후 갑자기 천재가 되어버린 옛이야기 속 사람과 비슷한 사례라고 스스로를 억지로 납득 시키신 듯했다.
그 후 윤서의 새 지식을 접하시면 출처를 따져 묻지 않으시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하문하시니, 아마 이번 건도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의식은 무엇이고 무의식은 무엇이냐? 그럼 그 무의식이란 존재는 어떻게 규명될 수 있는 것이냐? 무의식을 활용하여 의식의 조작도 가능한 것이더냐?”
그럼 윤서는 지난번 <육아보감>을 펴낼 때처럼 꼼짝없이 매일 불려가 심리학의 기초부터 고급까지 정리를 해내야 할 터인데.
‘그렇지만 우리 홍위인 걸. 어미가 되어서 자식에게 나쁜 짓 빼곤 다 가르쳐야지.’
홍위는 장차 왕이 될 것이니!
“의식은 우리 머릿속에 지식과 경험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에요. ‘의식적으로 화를 억제했다’라 말할 때 의식은 지금 이 상황에서 화를 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겨날지 예측한 후, 화를 참는 것이 더 이롭다는 판단을 하고, 그래서 결국 화를 내지 않기로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힘이지요. 이 과정 전반이 의식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것이에요.”
여기까지 설명하자 홍위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과하게 초롱초롱한 눈빛이다.
“너무, 어려운가요?”
홍위는 의젓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니야. 할바마마께서 맛씀하셨는데, 모든 지식은 잇단(일단) 쌓아두면, 음, 언젠가는 이해핫 수 있대. 나중에, 지식이 더 쌓이면.”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요. 지금 아기씨가 ‘일단 지식은 배워두고 본다’고 하는 것도 의식적인 판단인 거에요. 그 자리에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곱씹었더니 나중에 이해가 되더라는 아기씨의 경험이 이런 의식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이에요.”
“아?!”
“무의식은 의식과 달리 어떤 행동을 할 때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거에요. 생각 저 밑에 보이지 않게 깔려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만약에 아기씨께서 평소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부담스러웠다면 제가 이런 ‘무의식’이란 말을 하였을 때 아기씬 더 캐물을 생각도 안 했을 거에요.”
“아! 어러어서(어려워서)? 시어서 아에 (싫어서 아예)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역시, 우리 홍위!
“예, 맞아요. 뭔가가 싫었거나 부담스러우면 그 일 자체를 잘 떠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하는 것이 무의식의 작용이에요. 아기씨가 자기 전에 이 닦는 거 자꾸 잊는 것도, 이 닦다가 한번 찔려서 되게 아픈 것 때문인 것처럼요. 무의식적으로 또 아플까 봐 거부하는 것이지요.”
설명하는 새 홍위의 옷차림새가 다 꾸며졌다.
윤서는 홍위 어깨에 구겨진 부분을 바로 핀 후, 홍위의 호종 내관인 자선이를 불렀다.
“세손 각하 모시고 밖에서 기다려 줘.”
자선이와 함께 거처를 나가면서도, 홍위는 골똘하게 무엇인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윤서는 나인들의 도움을 받아 연둣빛 금박 무늬 당의를 갖춰 입고, 수수한 비취옥 머리꽂이를 하나 꽃은 후 얇은 비단 천을 앞에 내린 너울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 건넌방에 있는 금똥이를 보러 갔다.
금똥이는 소고기와 채소 듬뿍 넣은 이유식을 먹고 코 잠들어 있었다.
“한 시진은 주무실 것이니 심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금똥이 유모가 허리를 굽히고 아뢰었다.
윤서는 너울을 들춰 포동포동 희게 살이 오른 금똥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뗀 후 방을 나서 뜰에 내려섰다.
그때까지도 홍위는 윤서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는지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있었다. 홍위가 깊게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습관적으로 짓는 표정이었다.
“가요. 전하께서 드시기 전에 먼저 옥좌 옆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해요.”
윤서가 속삭이며 손을 내밀자, 홍위가 불현듯 말했다.
“그엄, 가끔 금똥이가 어먼니한테 안거서(안겨서) 있는 거 시은(싫은) 것도 무으식(무의식)이야?”
홍위가 윤서를 보며 이렇게 말하자, 윤서를 따르는 조 상궁과 나인 무리가 후두둑 뒤로 물러섰다.
홍위를 모시는 내관 자선과 한 상궁, 그리고 다른 나인들도 윤서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궁인들의 행동에 홍위가 당황한 표정으로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윤서는 홍위 앞에 앉아서 눈을 맞췄다.
“아니에요.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사람은 누구나 가장 사랑받기를 원하거든요. 사실은 저도,”
윤서는 홍위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아기씨가 나보다 아지(유모)랑 더 친하게 보일 때 이따금 싫은 기분이 들어요. 그건 아기씨한테 내가 제일 ‘엄마’로 가깝게 느껴지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아기씨도 마찬가지인 거에요. 금똥이를 아주 좋아하고 아끼지만 저한테 제일 사랑받는 ‘아들’이고 싶은 거.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어먼니도 그엇다고?”
홍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윤서가 이따금 아지 이씨 부인과 홍위의 친밀함을 질투한다는 것이 놀라운 듯했다.
“예.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렇지만 또 그 감정 외에, 아지가 잘 돌봐주셔서 우리 아기씨가 이렇게 건강하고 훌륭하게 큰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도 크지요. 앞으로도 더 잘 우리 아기씨를 돌봐주셨으면 진심으로 바라고요. 아기씨도 금똥이가 싫을 때가 있지만 대개의 시간은 귀여워하고 예뻐하잖아요. 또 누가 금똥이 못 생겼다고 하면 속상하고.”
“응! 금똥이 못 생것다고 하먼 마음이 아파.”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든다고 속상해할 것 없어요. 어른들도 그런 생각 다 하고 사는데 말을 안 하는 것뿐이에요.”
어른들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자, 홍위는 물러선 궁인들을 힐끗 바라보곤 또 속삭였다.
“···만하지(말하지) 않는 게 좋구나.”
“저한테는 말해도 돼요. 하지만 지금처럼 감정이 여러 개인데 그중에 하나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감정이 전부인 줄 알고 오해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른들이 감정을 잘 말하지 않는 것이에요. 감정은 늘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또 순간순간 변하니까요.”
여기까지 말했는데, 협경당으로 엄 상전이 들어왔다.
엄 상전은 빠르게 다가와 어명을 전했다.
“사정전 안으로 들어가시면 전하께서 앉으시는 당집 중앙에 어좌가 있고, 그 옆으로 두 분께서 앉으실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마님과 세손 각하 앞에는 흰 천으로 된 발이 내려져 있으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라는 어명이 있으셨습니다.”
윤서는 홍위의 눈을 바라보았다.
“갈까요? 가서 화폐 유통이 왜 실패했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들어볼까요?”
“응! 가요, 어먼니!”
금똥이가 예쁜데 때로 미운 모순을 이해해서 마음이 홀가분해진 홍위가 윤서의 손을 꼭 잡았다.
윤서는 몸을 일으켜 홍위와 보폭을 맞춰 엄 상전 뒤를 따랐다.
기대와 염려가 공존하는 길을 걸어 사정전 앞 계단을 올라 문지방이 높은 문 앞에 섰다.
사방에 큰 화로를 놓아둔 덕에 안의 공기가 제법 따뜻했다.
윤서는 남 몰래 심호흡을 하고, 홍위의 손을 놓았다.
홍위는 높은 문지방에 몸을 올려 걸터앉았다가 넘어선 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세손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키가 훌쩍 더 크셨습니다.”
여기저기서 홍위를 반기는 목소기가 들렸다.
“예, 저는 건강합니다. 키도 만니 컸습니다!”
씩씩하게 답한 홍위가 뒤를 돌아 윤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 승휘. 들어오세요.”
윤서는 다시 심호흡을 한 후 안으로 들어섰다.
도승지 이승손이 윤서와 홍위 앞으로 다가섰다.
“전하께서 당집 위 서쪽에 앉아 참관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리로 오르시지요.”
홍위와 윤서의 참관 명목은 세손이 이제껏 계속 실패해 온 화폐 유통에 대해 일찍부터 이해하여 혹여 이번에 실패해도 장차의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어명이었다.
그러나 편전에 든 이들 모두는 실은 이 참관이 세손과 더불어 새해 세자빈으로 내정된 권 승휘의 교육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 승휘가 한미한 가문 출신의 나인에서 갑자기 세자빈으로 급부상하는 짧은 기간 동안 조선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거부를 일궈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논의할 주제가 화폐 유통이니만큼 전하께서 부르신 게지요. 지금 전하께서는 어린아기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빌리고 싶으신 심정이시니까요.”
언제나 전하의 심정을 앞서 헤아리는 영의정 황희가 모두 들으란 듯 부러 큰 소리로 말하였다.
윤서는 홍위가 내밀어준 손을 잡고 며칠 동안 배운 궁중식 예법의 꼿꼿한 발걸음으로 옥좌가 놓인 정중앙 당집으로 나갔다.
작년부터 공식 석상에서는 윤서의 손도, 자선의 손도 마다하고 어른이 된 것처럼 굴던 홍위가 이날은 윤서의 긴장을 이해하고 손을 잡아주어서 큰 위안이 되었다.
작은 나무 계단을 올라 흰 발 뒤로 들어서자, 옆에서 대전 내관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상 전하 납시오! 세자 저하 납시오!”
모두 일어서서 동쪽으로 깊게 허리를 굽히고, 전하께서 호위 내관의 부축을 받아 어좌에 오르셨다.
옥좌에 앉으시기 전 세종께서 발을 들어올리고 윤서와 홍위에게 작게 말씀하셨다.
“예리하게 듣고, 나중에 의견을 내야 한다!”
그리 명하신 후 전하께서는 옥좌에 올라 앉으셨다.
이향의 자리는 옥좌 밑 정면 상석이었다.
이향도 자리에 앉기 전 뒤를 돌아 윤서와 홍위를 바라보았다.
‘긴장하지 마시오!’
이향은 다정한 입 모양을 지어 보인 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신하들도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흰 발에 이어 머리에서부터 늘인 흰 너울 때문에 희미한 사이로 역사서에서 본 이름의 주인공들이 하나씩 보였다.
황희, 황보인, 김종서, 이양, 민신, 정분, 조극관, 권제 등의 중신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 성삼문, 이계전 등의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이 동편에 앉았다.
그리고 서편에는 왕실 종친들이 다수 자리하였다. 추후 왕실 소유 내수사의 재산을 출자해 은행을 만드는 일도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 이계전 먼저 아룁니다. 근일에 저화(楮貨)를 다시 발행하고, 동전을 다시 주조하는 일을 먼저 대간과 논의하시었는데, 신이 그때 마침 휴가 중이어서 의논에 참여하지 못하였기에 오늘 먼저 신의 어리석은 안을 먼저 고하나이다.”
마침내 화폐의 유통안에 대해서 논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