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화. 권윤서의 변곡점, 세자빈
“그런데 그 조직은, 실은······.”
윤서는 처음부터 이향에게 무모할 만큼 솔직하였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다만 이번은 혼자만의 목숨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박 상궁의 목숨과 동생 같은 매금이의 목숨도 함께 걸려 있다는 점이 달랐다.
처음 조직을 눈치챘을 때 박 상궁에게 윤서 자신이 말했듯 이 조직은 폭탄같이 위험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에 고발되면 박 상궁도, 매금이도, 노산대도 모두가 다 큰 화를 당하면서 동시에 윤서도 휘말며 그간 윤서가 해온 모든 일이 역풍을 맞아 무위로 돌아갈 위험이 컸다. 그리고 이젠 금똥이, 조금만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가슴부터 무너지는 금똥이의 안위까지.
‘지금이야. 조직을 양지까지는 아니어도 이향의 허락을 얻은 조직으로 만들 기회가 바로 지금이다.’
재빠른 판단을 내린 후 윤서는 그간 하지 않던 고백까지 함께 털어놓았다.
“이향. 내가 아직 당신의 여인이 아니었을 때, 고작 보모 나인이어서 자칫하면 당신이나 전하의 노여움에 전균처럼 죽을지 모를 때, 그때 당신을 만나러 비현각에 갈 때나 천추전으로 전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때 나는 늘 부탁했어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죽게 되면 우리 홍위를 위해 수양 대군만큼은 반드시 죽여달라고. 내겐 그런 부탁을 할 조직이, 있어요.”
“······.”
이향은 윤서가 곱게 차려입고 비현각에 들어 자신이 미래에서 온 영혼이라고 밝히던 첫날의 밤을 떠올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비장했던 표정은 홍위를 위해 유만은 죽일 것이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겠지.
감동으로 코끝이 다시 알싸하게 젖어왔지만, 이향은 조선의 군주였다.
“···매금이가 속한 조직이겠구나. 박 상궁이 수장이겠고.”
“저하······?”
“총 몇 명이 되고, 어디 어디에 침투해 있더냐.”
이향의 목소리가 냉정했다.
설마!
윤서의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남아 있는 이는 매난국죽과 금은동으로 순위가 매겨지는 열두 명뿐으로, 나머지는 이미 오래전에 죽거나 흩어졌다 들었습니다. 처음 저를 지키기 위해 붙여준 매금이를 제외하고 아직 어디에도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아직이라.”
이향이 윤서를 당겨 품에 꽉 안았다.
윤서는 고분고분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다렸다.
윤서의 사내가 아닌 조선의 세자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 이향은 의식적으로 윤서를 품에 당겨 안아 윤서의 표정을 시야에서 치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향은 단 한 순간도 세자가 아닌 적이 없었음을 윤서는 이어진 이향의 말에서 확인하였다.
“날이 밝으면 박 상궁더러 내게 오라고 하거라. 그 조직은 내가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내 명령에 따라 네게 매금이를 준 것이며, 또한 한명회란 자의 곁에도 내 명령에 의해 사람을 붙이는 것으로 하겠다.”
“!”
박 상궁에게서, 그리하여 윤서에게서 조직을 거둬가겠단 말이었다.
“이향!”
윤서가 부르자 이향은 윤서를 아주 힘주어 안았다.
윤서가 상대의 손이나 팔을 고통이 일도록 힘주어 쥐어 경고를 각인시키듯, 이향도 이따금 윤서를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안아 지금부터 하는 말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윤서야. 권윤서. 부인.”
“···예.”
“부인은 이제 세자빈이 될 것이오. 그저 어여쁨만 받으면 되는 후궁이 아니라 세자 이향의 적처가 되고 희아와 홍위의 정식 어머니가 된다는 뜻이오. 또한 부인이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왕실의 선례가 되고 후궁과 종친 부인들에게 법도가 될 것이란 의미요”
“!”
선례가 된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자취가 되고 후대의 세자빈이 걸어갈 지표가 된다.
“홍위의 배필이 따로 살수 조직을 가진다고 상상해 보시오.”
권력은 한 곳에서만 나와야 한다.
윤서는 이향의 말을 알아들었다.
힘껏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이향은 왕위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자빈의 사조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홍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라도 위험한 살수 조직을 쥐고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윤서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향은 이미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먼저 고하기를.’
‘군주는 노여워하는 존재니 그의 마음을 힘껏 헤아려 받들어야 한다.’고 말해주셨던 중전마마의 충고가 떠올랐다.
중전마마께서도 전하께 자신을 칭할 때 ‘신첩(臣妾)’이라 부른다. 지엄한 국모이지만 또한 임금의 신하라는 뜻이다.
윤서는 비로소 ‘세자빈’이란 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하게 깨달았다.
그것은 이향과의 사이에 ‘조선’과 ‘왕실’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끼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품고 아이들을 함께 지키더라도 윤서는 이향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자,
또한 동시에 윤서는 ‘세자빈’이란 권력의 주체로 스스로 입지를 세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일은 묻을 것이오. 부인을 위해 매금이를 내어준 것은 나로서도 고마운 일이니까. 그러나 한명회를 끝으로 다른 활동은 없어야 하오.”
“예.”
윤서는 순순히 대답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차피 흩어야 했던 조직이다. 이향의 손에 흩어지게 되면 누가 어떻게 고변해도 훗날의 화는 없을 것이고, 박 상궁도 매금이도 모두 무사할 것이다.
안심한 윤서는 몸을 꼼지락거려 숨막힐 듯 강한 포옹을 벗어났다.
“그리고, 부인.”
이향의 목소리가 다시 다정해졌다.
“광평 대군이 출발하기 전에 내가 한명회를 불러 볼 것이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 자가 허튼짓을 하는 낌새가 보고되면, 가차 없이 죽이시오!”
“저하.”
“나는 부인이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보기 바랍니다.”
“!”
“윤서야.”
이향은 윤서의 팔을 잡고 거리를 벌려 눈을 마주하였다.
달빛으로 어스름하게 짙은 어둠 속에서 이향의 눈빛이 강렬했다.
“윤서야.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좋으나 시선은 이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역사에 고정하거라.“
이향은 자신이 역사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은 후 오로지 수양 대군과 그를 따랐던 이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더라면 지금의 조선이 어떤 꼴일지 생각해 보라 말하였다.
괘종시계와 톱니바퀴를 응용한 동력 기계의 발전도, 사망자를 획기적으로 줄일 두창 예방 침도, 석탄을 이용해 목욕탕을 만들면서 한양의 하수 처리 시설과 천변을 함께 정비한 일도, 벽돌을 구워 성채를 쌓는 일도, 백성의 가장 큰 고충인 공물의 개선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무역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미래에 지대한 도움이 될 발전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채 왕자와 신하들의 핏물만 흘렀을 것이다. 왕실도, 조정도, 백성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리하여 나를 마음에 품은 윤서 너조차도 불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윤서야. 한명회 따위는 과거로 흘리거라. 가장 큰 업적이 국가 인재 절반을 도륙해 제 권력 기반을 만든 놈 따위는 미심쩍다 싶으면 그냥 제거하거라.”
나와 네가 만들 조선에 그러한 놈 따위는 없어도 무방하다.
이향의 단언이었다.
“그러니 지금 온전한 신하들과 함께 너의 역사 속 과거가 아니라 나와 홍위와 함께하는 새로운 역사를 바라봐다오. 이것이 내가 권윤서 너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면서 내리고 싶은 교서의 내용이니라.”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전하께서는 당부를 담은 교서를 내리신다.
세자인 이향은 교서를 내릴 수 없고, 윤서가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빈으로 혼인을 청할 때 담고 싶은 내용을 말로 전했다.
윤서는 이향의 애정 어린 이향의 요구가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다.
21세기 대한민국 미래인의 옷을 벗고 15세기 조선 세자빈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으라는 요구였다.
“배워야 할 것이 많네요.”
배워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엄격한 궁중 예법과, 내명부 수장으로 왕실 내외의 일을 관리, 감독하는 등의 공식적인 업무, 하나의 권력 주체로서 보상과 처벌의 권한을 적절하게 행사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또한 홍위와 희아와 금똥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과거의 비극’이 현재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윤서는 이향의 입술에 열기 어린 입술을 맞대며 속삭였다.
“그렇지만 난 뭐든 빨리 배우니까 열심히 배우고 익혀, 멋진 세자빈이 되겠어요.”
“그럼 난, 더욱 멋진 세자가 되어 그대의 노고에 보답하겠소.”
우리들의 멋짐은 조선의 멋짐과도 직결되어 있으니, 이향 당신이 오래오래, 지금처럼 자신에게 엄격하고 백성에게 관대한 군주로 오래오래 살아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윤서는 바람을 담아 이향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의녀 순덕에게 한명회가 미심쩍은 기미를 보이거든 은밀하게 죽여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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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세종께서는 윤서의 세자빈 책봉을 위한 책봉도감을 세우라 명하셨다.
도감의 도제조는 영의정 황희, 부제조는 좌의정 하연이 맡게 하여 승은 후궁 출신인 윤서의 위신을 제대로 높여 주셨다.
윤서는 12월부터 하루 한 시진씩 훈육 상궁으로부터 궁중 예법을 배우고, 세손의 스승이었던 성삼문에게서 소학과 논어를 배우게 된다. 또한 짬짬이 중전마마와 양 귀인께 궐의 행사와 명절 의식을 주관하는 법도 배울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조선의 가장 큰 당면 과제인 화폐 유통안에 의견을 보태라는 어명이 있었다.
11월 15일, 윤서는 강서원에서 돌아온 홍위의 손을 잡고 편전인 사정전으로 향하게 되었다.
“먼발치에서 뵌 적들이야 많았지만 편전에서 회의하는 것을 본 적은 없어서 아주 떨리는데요.”
홍위의 머리에 검은 익선관을 씌워주며 윤서가 속삭였다. 편전에서 열리는 정식 회의이기에 홍위는 붉은색 구름무늬 비단에 금색 용보를 단 곤룡포에, 머리에는 익선관을 썼다.
윤서 눈엔 늘 아기 같아만 보이는 홍위가 의젓하게 세손 티가 나니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은 너무 빨리 큰다. 홍위도. 금똥이도.
“아기씨랑 제 자리는 들어가서 어좌 동쪽 편, 호위 내관이 서 있는 앞이래요. 높은 곳에 앉아 있으니 더 잘 보이겠네요.”
윤서가 말한 뜻은 높은 곳에 앉게 되니 역사서에서 본 이들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홍위는 윤서가 여인 신분으로 신하들 앞에 나서는 것을 걱정한다고 오해하였다.
“안니에요, 어머니. 어머닌 조선에서 제일 큰 상단하고 또 공장도 큰 거 여어 개 가지고 게시잖아요. 그언데,”
홍위는 옥으로 된 띠를 허리에 자연스럽게 늘이도록 팔을 벌리며 또 말하였다.
홍위는 올해 여름을 거치면서 갑자기 리을과 겹모음만 빼고 발음이 거의 완전해졌는데, 희아 말로는 금똥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헝아’로서 발음에 무척 신경 써서라고 하였다.
하긴 운동 실력도 늘어 벌써 빠른 속도로 말을 달리고, 배동들과 작은 조랑말을 타고 곧잘 격구 흉내도 낸다.
“동전과 저하(저화)가 가지고 다니기 편한데 왜 사람들이 쓰기 시어하는지(싫어하는지) 모으겠어요(모르겠어요).”
“그건요.”
홍위는 이따금 강서원의 스승에게 묻기 어려운 것을 윤서에게 물을 때가 있다.
“화폐 유통 정책이 실패한 것은 이따 편전에서 논의될 것이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윤서가 이 시대 사람들은 잘 통찰하지 못하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토지와 화폐는 서로 경쟁 관계라고도 볼 수 있어요. 화폐가 잘 유통되지 않는 것은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농경 사회이기 때문인데요. 이러면 토지를 가진 이들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가 저절로 더 높아지지요.”
“응,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예, 그런데 토지란 단순히 땅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과, 소작 짓는 이들에게까지 지배력을 가지는 것이니까요. 자기 땅 안에서는 심리적으로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화폐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이유일 거예요.”
“···응. 그언데, 무의식이 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