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화. 모정 대 모정 대 모정
아들과 손주를 잃을지 모른단 공포가 친정 멸문 당시 느꼈던 공포와 절망까지 소환했다.
소헌 왕후가 가슴을 움켜쥐며 절규했다.
“내가, 내가, 아들까지, 앞세우려고, 이날까지,”
“중전마마!”
헐떡이며 숨도 제대로 못 쉬시는 것이 과호흡까지 온 공황 발작이었다.
진정제도 없는 조선에서 이대로 두면 중전마마는 호흡 곤란으로 실신하신다!
윤서는 뒤에 서 있는 조 상궁의 손에서 약출이 든 종이봉투를 낚아챘다.
그리고 “마마님, 증거가!” 소리치는 조 상궁의 말에 아랑곳없이 약재를 바닥에 쏟아버리고 소헌 왕후에 뛰어갔다.
“과호흡이십니다. 이 봉투를 입에 대고 숨을 다시 들이마시시게 해야 해요.”
윤서가 이향에게 소리쳤다.
이향은 중전마마를 안아 대청마루로 옮겼다. 윤서는 그 옆으로 뛰어올라 소헌 왕후의 얼굴에 종이봉투를 대었다.
“중전마마, 뱉은 숨을 다시 들이쉬세요. 좀 있으면 호흡이 편안해지실 것입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봉투를 대고 뱉은 숨을 다시 들이마시게 하는 것은 과호흡이 왔을 때 과다하게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신체에 되돌리는 전형적인 처치법이었다.
그러나 수양 대군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또 무엇을 하려고! 권 승휘, 네가 어마마마를 숨 막혀 돌아가시게,”
“닥치거라, 수양! 약재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살려 준다 이미 약조했거늘. 어째서 어마마마를 이리 모셔온 것이냐!”
이향이 소리친 후 중전마마의 귀에 속삭였다.
“어마마마. 이미 약속했었습니다. 홍 승휘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아우와 조카는 무사하게 둘 것이라고 수양에게 며칠 전 이미 약조했습니다.”
“···정말, 이냐?”
“정말이오, 중전. 나 또한, 약속하였소.”
소헌 왕후의 뻣뻣한 손을 주무르며 세종도 안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셨다.
“하아. ···하아.”
과다하게 배출되었던 이산화탄소가 다시 혈중에 스미면서, 소헌 왕후의 호흡은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윤서는 중전마마의 얼굴에서 봉투를 떼어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옅어지자 과거의 그림자에 속박되어 있던 소헌 왕후의 정신도 차츰 현실로 되돌아왔다.
“네가, 내 아들을, 모함한 것이더냐?”
소헌 왕후는 둘째 아들이 중궁전에 들어 울며 고했던 말을 다시 윤서에게 확인하셨다.
윤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불현듯 굵은 눈물이 후두둑 눈에서 떨어졌다.
윤서는 목멘 목소리로 고하였다.
“저도, 자식 가진, 어미입니다, 중전마마.”
자식 가진 어미.
자식을 잃을까 두려워 지엄한 국법도 잊고 의금부에 난입했던 늙은 어미는 자식을 잃을까 두려워 추국청에 적을 꿇어 앉힌 어린 어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권력은 이토록 비정하고 모진 것이더냐.’
전하의 선정 아래 평화롭게만 보이던 왕실 내에서 어째서 이런 일이, 어째서!
소헌 왕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뜰에 꿇어앉아 있는 둘째 며느리와, 아내를 살려달라 울던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유야.”
소헌 왕후께서 수양 대군을 부르셨다.
“너는 정녕 몰랐더냐? 네 안사람이 홍 승휘에게, 태중의 내 손녀에게 약을 쓰는 것을, 정녕 몰랐더냐?”
“···저는, 저는.”
무어라 답을 올려야 할지 암담해진 수양 대군은 고개를 돌려 뜰에 꿇어앉아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고하세요. 우리가 하기로 한 대로, 고하세요, 자가.’
윤씨가 수양 대군만 볼 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양 대군은 간밤 부인과 나눴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지난밤, 부인은 스스로 약출이 든 꾸러미를 내놓았다.
“권가는 일 처리에 허투룸이 없습니다, 자가. 조 전언이 저 살기 위해서라도 절대 고하진 않겠지만, 권가는 저를 의금부에 끌고 갈 때 이미 그 손에 증거를 다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가이의 말처럼 때를 기다려야 했었나 보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한 부인은 어떻게 홍 조카에게 약을 써왔는지 털어놓았다.
물어도 그간 답하지 않던 내용이었다.
수양 대군은 차라리 죽여 없앨 노릇이지 어찌 미련하게도 증거가 남을 수 있는 수단을 썼는가 실망스러웠다.
사병 운운 했다가 의금부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홍가에게 약을 쓴 것 때문에 부인이 의금부에 끌려갔었단 말을 듣은 한명회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피난길에 자식을 수레 밖으로 떨어뜨려 몸을 보하였습니다. 권력의 길이란 본래 그토록 매정한 것입니다!” 조언했던 말도 떠올렸다.
“부인, 어째서! 어째서!”
“의금부에 사람을 심어 놓았다가 제 혐의가 입증될 것 같으면, 이 꾸러미를 들고 중전마마께 달려가세요. 가서 제가 약을 쓴 것을 이용해 권 승휘가 서방님과 우리 도원군을 죽이려 모함한다고 고하세요. 그러면 첫 손주인 우리 도원군을 지극히 아끼는 중전마마께선 권 승휘를 내심 꺼리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부인!”
“왕업을 도모하고자 할 때 이만한 각오가 없었겠어요? 또 고작 이런 꼴을 보자고 조카에게 약을 먹인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소첩을 버리세요! 소첩을 버려 우리 도원군과 훗날을 기약하세요!”
“하지만, 어떻게 부인을. 내 어찌 부인을 외면한단 말이오.”
이미 버리기로 작심을 하였으면서도, 수양 대군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윤씨를 기만했다.
“그래야 우리 도원군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야 내 죽음이 개죽음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부인은 무가이가 말했던 때가 오면, 그래서 대업을 이루면 반드시 세자는 도원군으로 세울 것이란 맹세를 거듭 받아내었다.
‘하아! 정녕, 그래야 하는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양 대군은 소헌 왕후 앞에 엎드렸다.
“어마마마, 소자 어젯밤 부인의 처소에서 이 약재를 찾아내었습니다. 부인이 정말로 형님의 후궁을 해치려 하였단 자복을 듣고도, 부인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어마마마께 달려가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유야, 유야!”
“아바마마, 형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수양 대군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뜰에 꿇어앉아 있던 윤씨도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어째서, 대군 자가, 어째서, 소첩의 죄를 고하시니까? 어째서 숨겨주지 않으시고 저를 고발하십니까?”
“닥치시오, 부인. 하늘이 무섭지 않으시오? 어찌 그런 짓을 하였단 말이오? 우리 가여운 현동이는 어찌 살라고!”
울다 보니 수양 대군은 더 서러워지고 더 분노가 치밀었다.
약만 쓰지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을 하는 부인에 대한 원망과, 끝내 부인을 팔아 장래를 보존해야 하는 처지의 신산함과,
이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권가의 술수 때문에 벌어졌다는 증오가.
그리하여 지금은 이렇게 굴욕적으로 울고 있으나 미래엔 반드시 저 서늘한 권가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내고야 말리라는 지독한 원망까지.
“저를 폐서인하시고, 내쳐주십시오. 종묘사직에 큰 죄를 짓고 어찌 감히 대군의 직위를 유지하리이까. 아들과 함께 산천에 묻혀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보위에 올라 가엾게 죽게 된 부인의 명복을 달래주리라 하는 원망 섞인 야망까지.
통곡하는 수양 대군의 마음에 깊이깊이 뿌리를 내렸다.
“자복이 나왔어요, 전하. 우리 유를 먼저 저 금수 같은 것과 이혼을 시키고, 그 후에 저것을 처벌하여 우리 유와 현동이에겐 해가 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신첩의 소원입니다, 전하.”
아들의 통곡에 가슴이 미어진 소헌 왕후께서 세종의 발치에 엎드리며 눈물로 애원하였다.
“신첩에게 아들을 앞세우는 비극까지 겪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전하.”
“······.”
“······.”
세종께서는 말없이 세자를 바라보셨다. 이 일의 처분은 세자에게 맡긴다는 뜻이었다.
이향은 눈을 감았다.
‘수양을 죽이고자 하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어릴 적 소리도 못 내고 혼자 웅크려 우시던 어마마마의 가여운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올겨울 광평 대군과 평안 대군이 연달아 두창에 걸려 죽은 후, 그 충격으로 내년에 돌아가시는 것이 원래 역사라 하였다. 그래서 윤서가 두창을 막기 위해 내내 노력해 온 것이다.
“어마마마.”
이향은 눈을 뜨고 엎드린 채 울고 계신 소헌 왕후를 일으켜 품에 꽉 안았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침잠할 때 윤서가 해주던 위로의 방식이었다.
“어마마마. 유가 부인의 죄를 몰랐다고 하니 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안심하세요. 안심하세요, 어마마마.”
이향은 어머니의 애끓는 모정을 위로하고, 처분을 결정하였다.
“수양은 대군의 직첩을 회수하고, 거제에 유배될 것입니다. 다만 내년 화폐 유통을 앞두고 은과 동이 많이 필요한 바, 유구국과의 무역은 계속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핏 보면 관대한 조치 같지만, 무역선을 타는 것은 유배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모지리를 거듭 공초해도 수양 대군이 화포 장착을 꿈꿨다는 진술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중만 가지고 대군을 역모 혐의로 처분할 수 없기에, 부인의 일로 유배를 보내면, 운신의 자유만 없다 뿐이지 양녕 대군이나 회안 대군처럼 지방 유지들에게 대접받으며 편하게 지낸다.
그보다 모두 꺼리는 위험한 뱃길에 나서 조선의 발전에 꼭 필요한 무역품을 거래해오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오랫동안 가차 없이 신하를 부려온 세종과 이제 젊은 신하들을 그렇게 부리기 시작한 이향이 의견의 일치를 본 지점이었다.
세종께서 엄격한 조건을 덧붙이셨다.
“다만 무역 업무 시 세자 직속 수륙군이 모는 무역선을 지휘할 것이며, 호종 반인은 다섯 명으로 한정한다. 무역에 성공한 후 국내에 돌아와서는 거제의 유배소에만 머물러야 하며. 특별한 왕명 없이는 무역선과 거제의 유배소를 벗어날 수 없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자 몸을 아끼지 않고 무역에 종사하여, 전하와 저하의 치세를 가장 낮은 곳에서 보필하겠나이다!”
수양이 눈물을 흘리며 사배를 올렸다.
“그러나 나의 아이를 해하고, 나의 후궁이자 자신의 조카를 해한 저 여인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아아악. 살려주소서. 잘못하였습니다. 살려주소서, 중전마마! 우리 현동이를 보셔서라도, 살려주소서!”
윤씨가 새삼 눈물을 애원하였지만, 이향은 저 여인에까지 관용을 베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 추국은 저 간악한 여인을 겨냥해 열린 것이었다.
“왕족과 왕손의 혈통을 끊으려 한 대역 죄인 윤씨와, 그를 도운 조 전언에게 죽음으로 죄를 묻겠습니다!”
이향이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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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는 먼저 왕실에서 폐출된 후 의금부 감옥에 갇히고, 왕족과 왕손을 해하려 한 죄명으로 조 전언과 함께 사약을 받기로 확정되었다.
윤씨의 부모와 남자 형제들도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장 80대를 맞고 충청도 홍주로 유배갔다.
부모 모두를 떠나보게 된 도원군 현동은 소헌 왕후께서 중궁전에서 직접 돌보기로 결정하셨다.
이 모든 일은 왕실 내부의 일로 조용하게 처리되었다.
백성의 도덕 교화를 위해 효자와 충신, 열녀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삼강행실도까지 펴낸 세종으로서는, 왕실 내에서 벌어진 이 일을 무척 수치스럽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9월 말.
윤서는 의금부의 감옥을 조용히 찾았다.
형 집행을 사흘 앞두고 윤씨가 윤서를 한 번만 뵙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의금부 남동쪽에 자리한 감옥은 한겨울처럼 싸늘하고 추웠다.
“기쁘십니까?”
윤씨가 물었다.
윤서는 대답 없이, 가지고 온 솜옷 한 벌을 조 상궁을 통해 윤씨에게 건넸다.
“역시, 권 승휘는 여전히 마음이 따스하시네. 덕분에 저승길이 춥지는 않겠어.”
“······.”
“이겨서, 기쁜가?”
이겨서 기쁘냐고.
사람을 죽이게 되어 기쁠 만큼 아직 이 권력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아. 다만.
“이번 추국은 처음부터 당신이 목표였어요. 수양 대군이 화포 실린 배 몇 척 가지게 된다고 그걸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감시의 눈이 사방에 있는데. 그러나 당신은 달라. 당신의 그 음습한 적의가 있는 한 내 아이들이 무사히 클 수 있을까, 금아처럼 해를 당하지 않을까 늘 마음을 졸여야 할 것이기에, 당신을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만 말씀하시오. 아이가 어려 곧 돌아가 봐야 합니다.”
“···흠, 아이, 금똥이. 그래, 자넨 늘 아이들에겐 관대했지. 우리 도원군도 살려주었고.”
“······.”
윤씨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손을 이마 앞에 모으고, 더 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세로 윤서에게 절을 올렸다.
“이현동의 어미, 마지막으로 세자빈 마노라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아들을 구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었고, 지금도 죽이고 싶지만, 그러나 저승길 가는 어미로서 앞으로도 아들을 부탁드린다는 부탁만큼은 꼭 올리고 싶어서, 죄를 저지른 어미도 어미인지라, 마지막 저승길 앞두고 염치 없는 부탁을 올리고자 만남을 청했습니다.”
“······.”
“배 아파 아이를 낳았으니, 어미된 내 심정을, 아시지 않소? 눈 감고 죽을 수 있게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해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어째서 어미란 존재는 타인의 목숨은 잔인하게 취하면서 끝내 제 자식의 목숨은 저리도 애달게 부탁하는가.
“···그대의 부군이 역모를 일으키지 않는 한, 우리 홍위를 해하려 하지 않는 한, 그 아이는 천수를 누릴 것이오. 그러니 속죄하며 먼 길, 잘 가시게.”
윤서는 돌아섰다.
“홍 조카는?”
등 뒤로 물음이 들렸다.
“절에 들어갔소. 당신에게 속아 넘어간 자신의 과오를 내내 참회하고 금아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더군.”
옥문에 다다랐을 때, 등 뒤에서 다시 윤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아시오? 당신은 운명이 읽히지 않는다는 걸? 용한 무당도 읽어내지 못했던 당신의 운명이 어찌 되는지, 내 저승에서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것이오.”
내 운명은, 당신과 같은 이들의 운명을 비틀어 예정되었던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 홍위는 영조처럼 오래 살며 세종보다 더 빼어난 성군의 치를 이룰 것이고.
계유정난도, 세조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자손은 도원군 하나만 남을 것이며, 예종도, 그리하여 연산군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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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왔다.
북쪽에서 파발이 도착했다.
“요동의 여진족들이 두창에 쓰러지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