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화. 소헌 왕후의 절망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사납게 외치는 윤씨의 음성과 눈빛엔 정말로 억울함이 절절하였다.
소박한 옷에 분도 바르지 않아 추레하기까지 한 홍 승휘와 달리 화려한 성장을 한 윤씨의 당당함이 모순되는 진술의 신빙성을 윤씨에게 기울게 하였다.
보통 추국은 의금부 내의 남쪽 호두각 뜰에서 열린다.
그러나 이날 추국은 의금부 내 가장 안쪽, 의금부의 당상관들이 모여 연회를 여는 연못 앞 전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의금부 도사 두 명, 나장 다섯 명만 죄인을 데려오고 하는 일을 수행할 뿐, 추국을 참관하는 사람은 왕실의 내부 인사와, 조정 대신 중에는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하연으로만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었다.
사안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신 전하의 결정이었다.
“처방전 종이가 한번 바뀐 적이 있습니다, 전하. 귀한 약재를 쓰고도 회임하지 못하는 홍 조카가 안타까워 소첩이 처음에 받은 처방전을 박가 의원에게 가져다주고 더 나은 약 조제를 고민하라 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방전 종이에 차를 엎지른 적이 있어 새로 베껴 썼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소인도 기억합니다. 그때 다시 베껴 썼기에 후대의 종이가 섞여 들어간 것입니다.”
수양 대군 부인 윤씨의 진술을 조 전언도 필사적으로 거들고 나섰다.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전각 아래 임시로 쳐진 차일 아래 앉아 있는 윤서는 고개를 돌려 대청마루 위 전하 옆에 앉아 있는 이향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분노해 마땅할 이향은 긴 수염 속에 감정을 감춘 채 엄격한 시선으로 뜰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세자이자 아들이기에 모든 것을 참고 있는 이향을 바라보며 윤서는 이 일에 대해서 이향과 겪어온 지난날을 떠올렸다.
****
처방전의 종이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낸 것은 벌써 유월 중순이었고, 홍 승휘의 서신을 받은 것은 윤칠월 말일이었다.
그러나 윤서는 윤씨가 약물을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서신과 함께 종이가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도 이향에게 고하지 않았었다.
수양 대군과 한남군이 무사히 유구국에서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경회루에서 있었던 날 밤, 좀처럼 취하는 법 없은 이향이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채 밤늦게 돌아와 한 말 때문이었다.
“연회 후에 아바마마께서 따로 부르셔서 태조 때 섬라곡에서 사신이 와 속향과 소곡, 그리고 흑인 두 명을 바쳤던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 조선에서도 답례로 사신을 파견했었는데, 귀국 길에 왜구에게 사신과 선원 모두 죽고 노예로 팔렸던 통사 이자영 하나만 나중에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기에 수양의 안위를 많이 걱정하셨다. 그래서 내가 수륙군 중에 빼어난 병사들로 선원을 보태주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세종께서 눈물을 떨구셨다고 말하는 이향의 음성이 착잡하게 젖어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태종께서 피로 반석을 쌓으신 덕에 치세 내내 선정만 베풀 수 있었는데, 이제 또 지극히 우애가 깊은 세자 덕에 조정과 왕실의 화목을 이룬 성군으로 남겠구나.’ 말씀하시면서 할바마마를 그리워하셨다. 어마마마께서도 수양을 보는 내내 흐뭇하게 웃으셨어. 그러니 윤서야. 경계를 늦추지 말되 지난 일은 묻자.”
지난 일은 묻으라 한 이향의 당부가 있었기에, 내수사 집무실에서 윤씨가 허튼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종이 건도, 서신 건도 당분간 묻어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윤씨는 끝내 야심 한 자락으로 술수를 부리고자 하였고, 그래서 윤서는 더 이상 윤씨를 살려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윤씨를 의금부에 보내 더 이상 왕실 내에서 쉬쉬 덮을 수 없게 만들었던 날 밤이었다.
혜민국 소속 의원과 의녀 무리가 두창 예방 침을 놓기 위해 전국의 주요 지역으로 떠나게 되어서 격려 연회를 베풀고, 농포를 채취할 두창 걸린 말을 수송해 갈 병사들을 격려하고 늦게 돌아온 이향에게 비현각에서 그간 모은 증거를 보였을 때.
이향은 처방전의 종이가 위조되었다는 조지서 지장의 보고서를 와락 구기고 천 내관을 불러들였다.
“활을 쏠 것이다. 수련장에 불을 밝히고 과녁을 세워라!”
이향의 음성에 깃든 분노가 너무 커 천 내관은 연유도 여쭙지 않고 내금위가 수련하는 경회루 옆 사격장에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과녁을 세우러 갔다.
“이향······.”
윤서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이름을 부르며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향을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나눠줄 수 있는 위로가 체온밖에 없었다.
그날 밤 이향은 두 시진(네 시간) 가까이 묵묵히 활만 쏘았다.
얼마나 힘을 주어 활을 잡고 화살을 쏘았는지 평소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과, 깍지를 낀 엄지가 쓸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자정이 훌쩍 넘어서 거처로 온 이향의 엄지와 손바닥을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줄 때, 눈을 감고 있던 이향이 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였다.
“백성을 지킬 군주 될 준비는 그리도 열심히 하였으면서, 아비로서 자식 하나를 못 지켰구나.”
그러나 격한 분노의 와중에도 이향은 수양 대군까지 연좌시키는 것에는 먼저 선을 그었다.
“지금 한확과 박종우, 윤사로 등이 모두 직책을 회수당하고 귀양을 가 있다. 방납 비리로 처벌했기에 가족은 연좌시키지 않았음에도 지금 대신과 백성들이 처벌이 확대될까 내심 불안해하고 있어. 이 상황에서 수양이 가담했다는 확실한 증거 없이 일을 키우면 윤씨 일족은 물론 도원군까지 연좌시켜야 한다. 그러면, 할바마마 치세 때의 피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고 조정 대신과 백성들이 불안해 할 것이고, 무엇보다 어마마마께서 견디지 못하실 것이다.”
살갗이 벗겨져 피를 흘리도록 활을 쏜다고 분노가 해소될 리 없다.
그러나 이향은 아비이기 이전에 조선의 세자였고, 이미 조정과 백성의 안위를 책임진 군주였다.
그래서 윤서는 이향의 긴 머리를 빗겨주며 약속했었다.
“이제부터 이향, 당신의 아들, 딸은 그 누구에게도 해를 당하지 않을 거에요. 내가 지킬게요. 우리 아이들, 그리고 당신 후궁의 아이들까지. 내가 다 지켜줄게요. 그러기 위해서 윤씨는 이번에 확실하게 손을 보겠어요.”
윤서는 이향의 손에서 다시는 피가 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
이번에 윤씨는 죽는다!
죄를 반성하지 않고 저리 당당하게 구는 이를 살려두면 우리 홍위도, 우리 금똥이도 위험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다!
윤서는 결의를 다지며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부정하는 윤씨를 응시하였다.
“홍 승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의원의 진술이 있습니다.”
추국을 책임진 의금부 도사 왕일재가 고하였다.
그러자 구석에 허리를 굽히고 있던 혜민국 주부 전순의가 홍 승휘 옆에 와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 혜민국 주부 전순의 고합니다. 저는 권 승휘 마마님의 명으로 홍 승휘 마마님과 마마님 소생 현주 아기씨를 오래 진료해 왔습니다. 홍 승휘 마마님의 체질은 냉하여 회임을 하기 어려운 상태인 것도 맞고, 그래서 처방전에 쓰인 약재가 몸을 따스하게 보하고 회임을 돕는 것이 맞습니다. 특히 여기 쓰인 ‘백궁소’란 약재는 금강산 깊은 계곡에서만 나는 것으로 구하기도 어렵고 일반 의원은 잘 알지도 못하는 약재입니다.”
“맞습니다! 백궁소 한 뿌리 가격이 미곡 오십 섬이었습니다. 그나마도 구하기 어려워 우리 부부인 마님께선 때로 백 섬을 주고 구하기도 하셨습니다.”
조 전언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전순의는 조 전언의 말에 아랑곳없이 아주 전문적인 태도로 덤덤하게 전하께 다시 고하였다.
“그런데 이 백궁소에는 일반 의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이 약재를 쓸 때 몸을 따스하게 하는 데 쓰는 또 다른 귀한 약재 ‘약출’을 함께 쓰면 자궁에 과다하게 열이 오르면서 임신을 방해하거나, 이미 생겨난 태아를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
좌중의 눈이 모두 윤씨에게 쏠렸다.
그러자 윤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처방전에 약출이 어디에 적혀 있는가. 자네, 홍 승휘를 진료하면서 정이라도 든 것인가? 어째서 있지도 않은 약재로 나를 모험하는가.”
그러나 윤씨의 빈정거림에도 전순의는 차분하게 의원으로서의 전문적인 견해를 펼쳤다.
“처방전에 약출이 적혀 있진 않지만 홍 승휘 마마님께서 생김새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쥐꼬리처럼 긴 줄기가 들어 있었다고요. 그리고 백궁소와 약출을 함께 쓰면 특유의 맛이 납니다.”
“맞아요! 종이모께서 준 약재에선 늘 개복숭아의 떫고 신 맛이 났습니다. 너무 시어서 몸서리치며 마셔야 했어요! 그리고 금아가 아픈 것이 화장품 때문이라고 밝혀진 직후 종이모께서 준 약재 속엔 쥐꼬리 같은 약출도 들어 있지 않았고, 신맛 대신 쓴맛이 났습니다!”
“전하, 모두 다 심증뿐입니다. 제가 약출이란 약재를 썼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증거가, 있었다.
일찍이 조 상궁이 수양 대군의 명례궁에 들여보낸 여노비를 통해 평소 약재를 보관하는 광에서 쥐꼬리처럼 긴 약재를 이미 확인하였고, 일부를 가져와 보관하고 있었다.
윤서가 그 증거를 내놓기 위해 조 상궁에게 눈짓을 보낼 때였다.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세자 저하. 죽여주시옵소서!”
갑자기 의금부 후원으로 통하는 작은 문에서 울음 섞인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
“!”
“!”
좌중의 시선이 모두 남쪽 문으로 쏠렸다.
“제가 약출을 가져왔습니다, 아바마마. 소자, 부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종사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수양 대군이었다.
수양 대군이 작은 꾸러미를 든 청지기와, 그리고 소헌 왕후와 함께 의금부 뒤뜰로 들어서고 있었다.
“중전!”
“어마마마!”
세종과 이향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헌 왕후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최 상궁의 부축을 받아 대청마루로 다가섰다.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윤씨를 보시고, 세종과 이향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약출이 나오지 않으면 명례궁을 수색해야 하지요. 수색해서 약출이 나오면 내 아들과, 내 손주도 연좌되는 것이 아닙니까? 내 아버지와, 내 숙부께서 연좌되어 돌아가신 것처럼 말이에요!”
“어마마마 그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수양이 연좌되었을 것이라,”
“그걸, 믿으라고? 어째서, 왜 왕실에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까? 어째서 왜!”
소헌 왕후께서 절망적인 어조로 소리치셨다.
“내가 다른 것을 바랬습니까? 내 아이들만 무사하게 잘 키우고 싶다고 말했었지요. 홍 승휘에게 약을 쓴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내 죄입니다. 내명부를 책임진 나의 죄에요.”
“중전, 수양을 연좌시킬 생각은 나도, 향이도 없었습니다. 향이를 아시지 않소?”
“향이는 믿어요. 내 자식이니까. 하지만, 전 전하를 믿지 못합니다! 제 아버지가 압슬형을 당해 돌아가실 때도 전하께선 가만히 계셨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