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화. 윤씨의 운명, 윤서의 운명 (3)
안사람이 왕손 회임을 방해하기 위해 홍 승휘에게 약을 써왔다니!
그럴 리가 없다. 약까지 썼을 리는 없다.
음흉한 계책을 잘 내는 조 전언과 무당 무가이와 함께 저주의 주술을 쓰고 죽음의 살을 날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약까지 썼을 리는 없다!
“아바마마!”
수양 대군은 비명을 지르듯 세종을 불렀다.
그런데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양 대군은 부왕과 자신 사이에는 암묵적인 이해가 존재한다고 내심 믿어왔다.
할바마마의 강력한 비호가 없었더라면 외숙부 민씨 형제들의 견제로 자칫 해를 당할 수도 있었던 대군 시절을 오래 겪으셨기에 당신의 자식들에겐 같은 종류의 위협을 물려주지 않으시겠다고 부단히 노력하신 그 애달픈 애씀을, 수양 대군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건국 이래 형제의 피 위에 꽃을 피워온 왕실의 골육상쟁을 끊고야 말겠다는 부왕과 세자 형님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하며 은밀하게 야망을 키워온 지난날이 수양 대군의 머릿속을 휙휙 스쳐 갔다.
그러나 아직 그 무엇도 행동으로 옮겨본 적 없다!
이제 겨우 군사력 한 줌을, 그것도 먼 훗날에나 쓰임이 있을 군사력 한 줌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얻어보려 하는 이 찰나에, 왜!
주춧돌 하나 겨우 놓아보려는 이 시점에, 왜, 벌써!
윤서가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는 수양 대군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어그러질 조짐을 보이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숨이 턱턱 막혔다.
“아바, 마마! 제, 안사람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제, 안사람은, 파평 부원군의, 조카입······.”
그러나 수양 대군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신이 더욱 큰 실책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행동거지가 올곧고 담백하기에 할바마마 태종께서 지극히 아끼신 파평 부원군 윤규의 조카란 사실을 들어 아내를 변호하려 했던 말이 오히려 아바마마의 경계심을 자극할 수 있단 점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여지없이 옳았다.
전하께서 눈을 차갑게 빛내면서 중얼거리셨다.
“···그래. 윤규의 핏줄이 너무 많았어.”
윤규의 조카가 너의 안사람이고, 윤규의 외손녀가 승휘 홍가, 윤규의 손녀딸이 승휘 문가였지. 이들 중 항렬이 가장 높고 지체도 가장 높은 이가 네 안사람이 아니냐. 여색에 극도로 무심하다곤 하나 동침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닌데 동궁에 왜 이리 자손이 적은가 하였더니.
“아바마마!”
전하께서 어디까지 의심하실 수 있는지 깨닫자 공포가 밀려왔다.
“아바마, 마! 아닙, 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안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단 공포에 수양 대군은 하얗게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
식은땀을 흘리며 헐떡거리는 둘째 아들을 보다 못한 세종께서 한마디 하셨다.
“팔로 온몸을 힘껏 껴안거라.”
“···예에?”
“양팔을 어깨 위에 올려 힘껏 껴안고 네 자신을 토닥거리란 말이다!”
“······?”
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지 몰라 수양 대군이 멍하니 부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세종께선 엄청난 말을 쏟아낸 후 그림처럼 앉아 있는 윤서에게 명하셨다.
“윤서야, 네가 날 처음 알현했을 때 한 거 있지 않느냐? 그걸로 쟤 좀 도와주거라.”
전균에게 개처럼 끌려와 천추전에 들었을 때 양팔을 교차해 토닥이며 공포를 진정시켰던 마음 챙김 호흡법을 수양 대군에게 가르쳐 좀 진정을 시키란 명이었다.
하아.
윤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입가에 새어 나는 헛웃음을 감췄다.
‘군주의 심리란 얼마나 다채롭게 모순적인가.’
증거가 드러난다면 윤씨를 가차 없이 처벌하실 것이고, 증거가 미흡하다면 윤서를 가차 없이 처벌하실 세종께서는 당혹감에 과호흡이 온 둘째 아들이 못내 안타까우신 것이다.
‘또한 경고다. 수양 대군이 관련되어 있다는 확고부동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여기서 더 나가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
윤서는 언젠가 세종을 주제로 <군주의 심리학>을 써서 본인께 보여드리고야 말리라 다짐하며 수양 대군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세종의 명령 속에서 윤서가 둘째 아들을 지키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의지를 읽어냈다면 수양 대군은 며느리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읽어냈다.
권 승휘를 ‘윤서야’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아바마마의 음성에는 신뢰와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 어조를 통해 추측하건데 아바마마께선 이미 권 승휘가 내놓을 증거가 충분할 것이라고 믿고 계신 듯 보였다.
‘아, 살기 위해서는, 훗날을 위해서는, 정녕 부인을 버려야 하는가.’
착잡한 갈등으로 정신이 혼미한 수양 대군의 시선 속에 앞으로 다가와 앉은 권 승휘가 보였다.
“이렇게 양팔로 상체를 힘껏 껴안고 어깨를 토닥이면서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숨을 최대한 천천히 코로 들이마시고, 잠시 숨을 멈춘 후 이번에는 입으로 숨을 천천히 내쉬는 것입니다.”
세종의 명령에 따라 윤서는 공포로 인해 지나치게 활성화된 교감 신경계를 잠재우고 부교감 신경계와 전전두엽을 깨어나게 하는 마음 챙김 호흡법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수양 대군은 멍한 시선으로 윤서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왜, 따라 하지 않는 것이냐?”
성의껏 설명하는데도 따라 하지 않고 여전히 가쁜 숨을 쉬는 아들에게 세종이 물으셨다.
“윤서가 하라는 대로 하면 큰 효과가 있느니라.”
“···아바마마. 왜, 소자에게······.”
이토록 큰 모욕을 주십니까.
윤서가 행한 마음 챙김 호흡법의 효과를 아주 인상 깊게 보신 후 이따금 마음이 불안할 때 홀로 행해보시는 열린 마음의 세종과,
심리 상담가로 살아온 직업의식에서 원수일지라도 일단 공포를 덜어주려 성심껏 호흡법을 가르치는 권 승휘를 수양 대군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윤씨의 일에 함께 참여한 증거가 없다면 너는 무사할 것이라는 위로의 의미로 세종께서 내리신 명을 오히려 큰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째서 아바마마는 소자에게 이런 괴상한 것을 하라고 명하십니까? 아바바마, 안사람이 약을 썼을 리가 없습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몰랐습니다. 하나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허! 네가 몰랐던 것은 알겠으니 윤서의 호흡법을 따라 하라니까.”
“아바마마!”
“따라 하거라. 따라 해. 효과가 있느니라. 중전께서도 윤서가 가르쳐 드린 호흡 명상법과 그 눈동자 움직이기 기법으로 꽤 효과를 많이 보셨느니라.”
아들의 닫힌 마음을 끝내 헤아리지 못하시는 군주 세종께서 안타까운 음성으로 수양 대군을 다시 재촉하셨다.
참으로 애달픈 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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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말, 제법 한기가 도는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는 무렵의 의금부에서 추국이 열렸다.
공개로 심의되는 의금부의 일반적인 조사와 달리 비공개로 열린 추국이었다.
“여기 이 보약 처방전의 날짜는 기미년(1439년) 윤이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이는 닥종이를 원료로 하는 저주지(楮注紙)의 원료에 볏짚을 더 섞어 만들어 낸 화선지의 일종으로, 기존의 종이보다 조직이 더 성겨 살아 있는 씨앗 등을 약재로 하는 한약지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 종이는 전라도 흑석골에서 만들어져 한양에 전해진 것으로 그 연도가 이 날짜보다 이 년 후인 신유년(1441년)이옵니다.”
전하께서 좌정하신 의금부의 뜰에서, 종이 만드는 공장인 조지서의 늙수그레한 지장(紙匠)이 전하께 아뢰었다.
“전하께서 각종 종이 만드는 법을 그때그때 문헌으로 정리하라 이르셨기에 여기 기록이 있습니다.”
지장 공소가 기록지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대전 내관이 받아서 대청마루에 높이 앉으신 전하께 바쳤다.
세종께서는 지장이 바친 기록지와 견본으로 내민 종이와 일전에 윤씨가 제출하였던 처방전 종이를 비교하셨다.
뒤이어 윤씨가 지속적으로 한약을 지었던 의원의 아들이 끌려왔다.
이미 한 차례 고신을 받은 젊은 의원은 전하께서 묻기도 전에 엎드려 고하였다.
“소인의 아비는 지난봄 갑자기 병사하였습니다. 부부인 마님의 명을 받아 드나들던 조 전언이 다녀간 직후 사흘 동안 식은땀을 흘리며 배앓이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소인은 그때 아버님이 학질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합니다. 소인, 원통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의원 이가는 조 전언을 상대한 것은 아버님이셨고, 둘 사이에 어떤 대화와 어떤 약재가 오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거듭거듭 부인하였다.
다음으로 조 전언이 끌려왔다.
“이 모두 모함이옵니다. 저희 부부인 마님께선 종조카이신 홍 승휘 마마님을 위하시는 친절한 마음이실 뿐, 다른 마음이 없으셨사옵니다. 종이의 기록이야 의원의 사정이지 어찌 우리 부부인 마님의 사정일 것입니까?”
이미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아 처참한 몰골이면서도 조 전언은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여기서 혐의를 인정하면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집안 모두가 참혹하게 죽기에 조 전언으로서는 악을 쓰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약재 하나하나가 모두 정성을 들인 최고의 것들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구할 수 없으면 때로 사신을 다녀오는 자들에게까지 부탁해서 최고의 약재를 구했던 것입니다.”
“거짓말!”
갑자기 뜰 한쪽에서 분노에 찬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조 전언에 대해 고할 것이 있습니다. 전하.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저들의 대역무도한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용만 당한 죄,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죄인 홍가, 죽을 때 죽더라도 전하께서 우리 세자 저하의 후궁으로 삼아주신 큰 은총을 보답드리고 싶습니다.”
산사에 머무는 석 달 동안 매일 해독약을 마시고 부처님 앞에 쉼 없이 절을 하며 땀을 내고, 손톱이 부러지도록 고통스러운 침을 맞아가며 몸을 회복한 홍 승휘였다.
죄인의 신분임을 자인하는 의미로 흰 무명 소복을 입은 홍 승휘의 얼굴은 흰 백지장처럼 창백하였지만 눈빛은 굳은 결의로 새파란 불꽃을 담고 있는 듯 형형하게 타올랐다.
“전하, 어리석은 소첩의 고발을 들어주옵소서.”
“······.”
세종께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홍 승휘는 대청마루 위 전하의 곁에 묵묵히 앉아 있는 세자 이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저하는 살뜰하게 애정을 주는 낭군은 아니었다. 그래도 투박하게 아낌을 주셨던 저하셨는데, 우리 금아만큼은 다정하게 보살피는 저하셨는데.
‘권 승휘처럼 세손 아기씨를 아꼈더라면, 금아를 사랑하듯 세손을 사랑하였더라면, 그러면 저하께선 저를 달리 보셨을까요?’
홍 승휘는 간절한 눈빛으로 부질없는 물음을 던졌다.
“······.”
내 아들의 죽음을 방관한 네게 내 무슨 말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향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착잡한 마음으로 홍 승휘를 바라보았다.
찾고 싶은 한 톨의 애정 대신 한 줌의 연민과, 그보다 더 큰 혐오를 세자의 눈에서 읽어낸 홍 승휘는 무너지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소첩이 궐에 들어오고, 돌아가신 세자빈께서 평창 군주를 낳으신 직후 종이모인 부부인이 제게 처음으로 회임에 도움이 되는 귀한 약재라면서 보약을 건네주었습니다. 약을 가져온 것은 여기 옆에 앉은 조 전언입니다.”
조 전언 옆에 꿇어앉은 홍 승휘가 고발을 시작하였다.
“소첩 산사에 머물면서 혀와 입 주변에 침을 거듭 맞아, 약물로 둔해진 미각을 되살린 후 처방전에 있던 대로 약재를 구해 약을 차례로 달여 먹었습니다. 그런데 회복된 미각에 잡히지 않는 맛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뜰 한구석.
아직은 부부인인지라 포승줄에 묶이지도, 죄인을 상징하는 소복을 입지도 않은 부부인 윤씨가 사납게 소리쳤다.
“네깟 것이 약재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네 어찌 귀한 약재를 그리 오랜 세월 받아먹으면서도 삼가지는 못할망정 온갖 화장품을 덕지덕지 발라 자식까지 아프게 해 놓는 대죄를 짓고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