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화. 윤씨의 운명, 윤서의 운명 (2)
밖의 소란에 세종께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서를 바라보셨다.
이향이 전적으로 정무를 맡은 후, 세종께서는 홍위와 희아 등을 불러 경서를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천추전에서 편한 옷차림으로 집현전의 학사들이 정치 현안과 연구 보고서를 홀로 꼼꼼하게 되짚어보시는 시간이 많았다.
“향이는?”
금빛 용보가 가슴과 어깨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는 위엄 있는 곤룡포 대신 간소한 저고리에 옅은 치자색 도포만 설렁하게 걸치신 세종께서 윤서에게 물으셨다.
“삼남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두창 걸린 말의 수송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광평 대군과 신하들과 궐 밖에 있습니다.”
“연통을, 보냈더냐?”
“오지 마시라 내관을 보냈습니다.”
윤서는 내수사에서 일어난 일과 함께
[이곳의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저하께서는 총애에 눈이 멀어 무턱대고 후궁 하나를 감싸려 하신다는 오명에서 멀리 떨어져 계셔야 합니다. 저를 믿으시고, 오지 마세요, 이향.]
빠르게 적은 서신을 강 내관을 통해 이미 보내놓았다.
이번 일은 윤서가 궐의 내명부를 책임질 역량이 있는가를 증명해 보이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한 가지만 물을 터이니 잘 대답하거라.”
“예, 전하.”
윤서가 흔들림 없이 답을 드릴 때 밖에서 다시 소란이 들렸다.
“천가야, 가서 기다리라고 전하거라.”
세종께서 뒤쪽을 보며 명하시자, 구석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던 천 상궁이 소리 없이 걸어 밖으로 나갔다.
윤서는 ‘말도 못하시는 분이 어떻게 전하의 명을 전할까’ 궁금하였지만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세종의 하문을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이제 제법 눈을 맞추며 방실방실 웃길 잘하는 우리 금똥이의 얼굴과, 부쩍 큰 키로 세손의 위엄을 갖춰가면서도 이따금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어먼니’ 어리광 부리기 좋아하는 우리 홍위의 보드라운 뺨이 스쳤다.
세종께서 하문하시었다.
“줄곧 살리는 방향으로만 질주하던 네가, 왜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하였느냐?”
“죽이는 방향으로만 질주하는 자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도원군이 살게 된 후 다른 모습을 보였더라면 이렇게 칼을 빼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빈틈없이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라도 빠진 구석이 있으면.”
“예, 전하. 내리시는 벌을 겸허히 받겠습니다.”
“좋다!”
내사옥이 아니라 의금부에 끌어다 가두게 함으로써 윤씨와 자신을 함께 벼랑 끝에 세운 의도는 확인하였다. 세종께서 밖을 향해 외쳤다.
“들여보내라.”
문이 열리고 수양 대군이 들어와 문가에 엎드렸다.
“아바마마, 안사람은 제가 들려준 개국 초 섬라곡의 이야기를 듣고 모지리의 말을 가볍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화포가 무엇인지 실물을 본 적도 없는데 무슨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권 승휘가 부부인을 내수사 감옥이 아닌 의금부로 끌고 가게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수양 대군과 한명회는 예상 외로 일이 너무 커졌음에 경악했다.
의금부라니!
배를 무장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법 영민한 권 승휘는 쪼르르 천추전에 계신 전하께 달려가 수양 대군이 감히 역심을 품었다고 고할 것이고, 그러면 아들을 격하게 아끼시는 전하께서는 권 승휘에게 분란을 조장한다며 엄히 벌하시고 동시에 무장선의 필요성을 검토하라는 명을 조정에 내리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 군사 운용과 화포 개발에 빼어난 안목을 가진 세자가 무역선의 선원을 훈련된 수군으로 채우고 화포도 탑재하라 명할 것이고, 이들을 거느리고 성실하게 무역에만 전념하다가 때가 오면 속초에서 석탄 운반선을 여러 척 거느린 임영 대군도 포섭하여 대업을 이룬다가 이들의 장기 계획이었다.
그런데 의금부라니!
의금부의 문턱을 넘어선 것은 이 일이 강상의 죄와 반역의 죄에 해당하는 것을 임금께 정식으로 고발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전하께서도 유야무야 없던 일로 덮으실 수가 없는 일이 되었다.
세간의 이목이 이미 왕실의 두 며느리에게 쏠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이 주장한 일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수양 대군은 무사할지 모르나 윤씨나 권씨 중 하나는 최소 폐서인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할 큰일이 되고야 말았다.
수양 대군은 부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안사람에게 유구국에서 가져온 공작새 한 마리를 선물하면서 우리 조선 건국 초에 여러 번 한양을 방문한 섬라곡국 사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섬라곡국의 장사도가 소목과 후추, 속향을 태조께 진상하지 않았습니까?”
수양 대군은 태조 때 여러 특산품과 흑인 둘을 공물로 바치러 온 섬라곡(暹羅斛)의 사신단과, 그에 대한 답례로 파견되었던 조선인 사신 배후가 함께 섬라곡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다가 군산 근처에서 왜구의 공격으로 모든 진상품을 잃고 배후와 다른 조선인 선원도 죽임을 당해 돌아오지 못한 일을 부인에게 이야기했음을 고했다.
또 대리인으로 고용한 모지리가 명나라 사행길도 위험하여 요동 도사가 탕참까지 무장한 군인을 보내 우리 사신단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를 윤씨 부인에게 들려주었던 일도 고하며,
“저의 안위가 몹시 걱정되었던 안사람은 안전한 해상 무역을 위해서 무역선에 무장이 필요하다는 모지리의 말을 듣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에 어두운 아녀자가 그저 남편의 안위를 몹시 걱정하다 일어난 말의 참사를 상세히 들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의금부에 끌고 가 왕실 내부의 일을 외부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다니요. 전하, 소자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너는 네 안사람이 그러한 말을 하는 줄도 몰랐다는 말이냐?”
“···저는,”
순간 수양 대군은 멈칫했다.
여기서 몰랐다고 하면 자신은 무사할 것이다. 그럴 의도로 하문하시는 것이니. 그러나 자신이 빠져나가면 안사람은 이제 온전하게 무사하거나,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만 맞이하게 된다.
자신도 알고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고 말씀드리면, 임영 대군처럼 대군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지방에 유폐될 수 있지만, 안사람도 함께 부부인의 작위를 잃는 정도로 끝이 날 것이다.
“대군 자가. 의금부까지 알려진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르셨다고 고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훗날의 기회를 잡으실 수 있습니다.”
궐에 들어오기 전 한명회가 냉철하게 조언한 말이 떠올랐다.
“권 승휘 그것이 소첩을 의금부에 끌고 가게 한 것은 홍 조카가 권가 그것이 쓴 문서를 잘못 고했다가 상궁으로 강등당하고 유폐되었던 일보다 더 심각한 일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어요. 그리고, 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의금부에서 돌아와 여전히 자신을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보며 조카의 목숨까지 손에 쥐여준 안사람의 얼굴도 떠올랐다.
망설이던 수양 대군은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저는, 몰랐습니다, 전하. 저는 오늘 유구국에서 온 배 짓는 기술자들과 유황과 동 등의 무역품을 싣기에 최적화된 배를 어찌 건조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노량진에 나가 있었습니다.”
수양 대군은 미래를 위해 잠깐 아내의 안위를 뒤로 미뤄두기로 하였다. 역공의 강력한 수단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 외에 권 승휘가 저지른 죄가 더 있습니다. 권 승휘는 감히 전하께서 벌을 내리신 홍 승휘를 중간에서 빼돌려 숨겼습니다!”
“!”
세종께서 윤서를 보셨다.
놀라신 눈빛이 아니었다.
아들이 고발한 내용은 이미 알고 묵인하고 계셨지만, 일이 이렇게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아무리 아끼는 며느리라도 그냥 넘어갈 줄 수 없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눈빛이셨다.
또한 네가 벼랑 끝에 설 때엔 반드시 안전하게 물러설 퇴로를 준비하였을 것이니 어서 풀어놓으라는 격려의 눈빛이기도 하였다.
세종은 이만큼은 윤서를 아끼고 계셨다. 며느리에게 유독 매정하신 시아버지로서는 이례적인 애정과 신뢰셨다.
그 마음을 따스하게 가슴에 담으며 윤서는 성심을 담아 고하였다.
“제가 홍 승휘를 빼돌린 것은 사실입니다, 전하. 그리고 오늘 부부인을 의금부로 끌고 가게 한 일엔 그 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부인을 의금부에 끌고 가지 않고 그냥 내사옥에 가뒀더라면 이번에도 그냥 묻힐 것이니까요.”
“!”
세종의 얼굴빛이 단박에 변하셨다.
“권가 네가 제시하는 그 모든 것에 한치의 조작이 없어야 한다!”
“아바마마!”
“닥치거라, 이놈! 마누라가 감히 국가의 일에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 든 것도 모자라 사병 운운하는 대역무도한 말을 입에 담게 두다니! 못난 놈!”
“!”
늘 인자하시기만 하셨던 부왕의 격한 꾸지람에 수양 대군은 움찔했다.
하필 처음 들은 꾸지람이 세자의 애첩 앞에서라는 사실이 굴욕적이었다. 아들의 목숨을 구해주었기에 때가 올 때까지 그에 맞게 대접해주고 있지만, 대군이 되어 저런 천한 것과 보위를 놓고 다퉈야 하는 현실이 모욕적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읽히지 않는 운명으로 판을 어그러뜨리는 저 천한 변수를 이 기회에 제거해야 한다!
“소자가 안사람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오나, 권가는 지엄하신 아바마마의 명을 어긴 기군망상 죄와, 사적으로는 부모의 명을 어긴 강상의 죄까지 함께 범하였습니다.”
수양 대군이 다시 고하였다.
그러나 세종께선 아들보다 윤서를 보고 계셨다.
벼랑 끝에 섰으면서도 손 내밀어 붙잡아 줄 세자까지 오지 못하게 한 너는,
세손이 어미처럼 따르고 겨우 태어난 둘째 손주는 이제 갓 백 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평소 아이들 목숨만큼은 가리지 않고 살리려 드는 어미가 되어서 스스로 칼끝에 발끝 하나 걸친 너는.
대체 왜!
서슬 퍼렇게 “내 아들을 위태롭게 하면 너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시던 전하께서 우리 홍위와 금똥이의 할아버지의 얼굴로 손주의 어미에게 묻고 계셨다.
‘그 의문에 대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전하.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에만 익숙한 제가 강력한 심리적 금기를 깨고 왜 인간 하나를 죽여 없애기로 끝내 마음을 먹었는지, 이제부터 그 이유를 고하겠습니다.’
드디어 이 손에 타인의 피를 묻힌다.
다정한 이향과 겉만 냉정한 희아와 애달프게 사랑스러운 홍위와 그리고 바라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을 듯 어여쁜 금똥이와 사랑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아끼고 사랑만 하기에도 너무 짧았던 인생인데.
부모님께 아낌없이 사랑받고, 그래서 좋은 딸로 행복하게 살았던 이십칠 년의 삶도 돌아보면 너무나 꿈처럼 짧기만 했던 세월인데.
윤서는 무겁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내키지 않는 입을 열어 걸어보리라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컴컴한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홍 승휘에게서 온 서신, 그리고 일전에 부부인 윤씨가 홍 승휘를 위해 지었다고 한 보약 처방지에 대해, 또 실제 지어진 약재에 대해 고할 것이 있습니다.”
“!”
수양 대군은 눈을 크게 떴다.
부인이 종조카인 홍 승휘에게 줄곧 보약을 지어준 일은 알지만, 설마 그 약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부부인 윤씨가 낸 처방지의 종이 중 몇 장이 쓰여 있는 날짜 당시에 만들어지지 않던 종이라는 것을 조지서에서 오래 일한 장인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산사에서 해독약을 복용하며 둔해진 미각을 회복하기 위해 혀와 입 주변에 계속 침을 맞아온 홍 승휘가 서신을 보냈습니다.”
“!”
“!”
“그러니, 전하. 이 기회에 윤씨가 왕손 회임을 방해하기 위해 약을 써왔다는 홍 승휘의 주장을, 다시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