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화. 윤씨의 운명, 윤서의 운명 (1)
“······”
모지리의 말을 들은 권 승휘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자신을 보며 고개를 젓자, 윤씨는 문득 불안해졌다.
‘간파한 것인가?’
설마!
설마 고작 열아홉 보모 나인 출신의 천한 계집이 팔도를 주유하고 천기를 읽는 한명회의 계책을 꿰뚫어 본다고!
그럴 리가!
수양 대군이 인천을 통해 들어 온 다음 날 밤, 명례궁의 후원 별채에 전각에 한명회가 은밀하게 들었다.
“조선에 기이한 변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면서 천기가 얽히고 있습니다. 천하의 판이 이리 어그러지면 예측 불가한 변수가 생겨나, 대업에 걸림돌이 됩니다.”
이번 겨울부터 살풍(殺風)이 불어닥치며 왕실의 주요 인사가 연이어 죽어 나가고, 그로 인해 세자와 세손을 둘러싼 하늘의 보호막이 깨져나간다.
이것이 조선 팔도를 주유하며 한명회가 읽어낸 천기였다.
고려 조부터 조선 개국까지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던 명문가의 후손이면서도 한명회 자신은 정작 금상과 세자가 통치하는 조선과 상생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처럼 다른 이의 목숨줄을 끊어서라도 대업을 걸머쥘 역천(逆天)의 기상을 가진 수양 대군을 통해 권력을 도모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다 이 손바닥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데 딱 한 사람, 운명이 읽히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
정말로 속을 꿰뚫듯 눈빛이 형형한 한명회의 말을 들었을 때, 윤씨의 머릿속에 “정녕 궐에 계신 그분을,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하고 절박하게 묻던 무녀 무가이의 음성이 재생되었다.
“그것이, 궐의 여인 권 승휘입니까?”
“맞습니다. 몰려오던 살성(殺星)의 빛이 옅어지기에 그 연유를 찾기 위해 일전에 살곶이 목장에 갔었지요. 거기서 확인했습니다. 천기의 흐름에 잡히지 않는 운명을 가진 그 여인이 작금의 혼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 그 여인부터 없애야 한다는 말씀이신가?”
“자가께서 직접 손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아직 살업의 피를 손에 묻히실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지리를 이용해 권 승휘를 몰아내거나 최소한 왕실 내 입지를 약화시킬 복안을 짜내게 된 것이었다.
“미끼로 던지는 이는 그럴듯해야 합니다. 누가 봐도 미끼임을 짐작하지 못하게 제법 이름이 있고, 그 자신도 미끼로 던져진 처지라는 것을 결코 알아채지 못할 자여야 합니다. 적당히 야망이 있는 자를 통해 대군 자가께서 순진하게 잘 속는, 그래서 결코 세자 저하께 해가 될 수 없는 무해한 왕자임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자를 통해 대군 자가와 부부인을 공격하게 되면, 자식 사랑이 끔찍하시어 흘려야 할 피를 제때 흘리지 않아 결국 후대 더 큰 피바다를 만드실 금상 전하께선 공격한 그 여인을 벌하시어 이 사태를 덮으려 하실 것입니다.
“일차 목표는 화포를 탑재한 무역선이 여러 척 필요하단 사실만 전하께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선원이 대군 자가의 사람들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위의 대가리 몇만 포섭하면 늘 배곯는 무지렁뱅이들이야 저절로 따라올 것이니까요.”
모지리의 말을 통해 무장 무역선을 얻어내는 것이 일차 목표라고 설명한 한명회는 이 광대놀이의 최종 목표를 아울러 제시했다.
“그리고 무역선 건이 목표한 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 가지는 이룰 수 있습니다. 생각이 짧은 아녀자는 국가의 큰일에 관여해서는 아니 된다는 경계심 말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 부부인께서도 함께 생각이 짧은 아녀자로 몰리셔야 합니다.”
자칫 친정까지 일시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였지.
그러나 지금 방납 비리로 한씨 일가와 우리 윤씨 일가까지, 왕실과 밀접하게 인척 관계에 있는 가문의 가주가 유배 가 있는 상황인지라 그렇지 않아도 사람 죽이는 걸 극도로 피하시는 전하께서는 나에겐 눈을 감으실 것이라 하셨다.
‘그래. 널 죽이진 못해도 날개를 꺾어 궐 안에 쳐박을 순 있지.’
세 걸음 더 나가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책사 한명회의 충고를 다시 되새기며 윤씨는 침묵한 채 자신을 주시하는 권 승휘의 눈을 마주 보았다.
“······.”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침묵은 상대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해진 상대는 스스로 단서를 흘리게 된다. 왜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백주대낮에 저리 순진한 얼굴로 늘어놓는지.
윤서는 입꼬리를 올린 채 필시 희생양으로 던져졌을 모자란 사내와, 미련하지 않으면서도 미련함을 가장하고 있는 부부인 윤씨를 침묵으로 압박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
예상한 대로 윤씨는 윤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윤서는 엎드린 모지리의 너른 등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윤씨에게 물었다.
“부부인께서 저 모지리를 대리인이랍시고 데리고 여기 내수사에 오신 것, 그리고 오셔서 저 모지리를 통해 이토록 엄청난 일을 입에 담으신 사실을, 수양 대군 자가께서도, 아십니까?”
오호라, 과연 한명회로다!
윤씨는 “그 여인은 반드시 이 일이 대군 자가와 관계가 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자가께선 모르신다고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대군 자가께서는 아무런 영향도 안 받으시고, 모지리 혼자 욕심을 부린 것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라고 조언한 한명회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한낱 승휘에 불과한 자네도 독자적으로 목가구 공장과 비누 공장을 세워 한양의 재물을 싹싹 긁어모았네. 그런데 부부인인 내가 이런 정도를 독자적으로 못한단 말인가?”
“그러시군요. 자가께선 모르시는 일이란 말씀이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이 더 간단하군요.”
뜻 모를 말을 한 후, 권 승휘는 밖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예, 마마님. 소인 여기 있습니다.”
윤서의 일을 돕는 강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역도 셋을 의금부에 끌고 가라!”
“예, 사람 불러 곧 오겠습니다. 매금아, 네가 이 앞을 지키고 있거라!”
강 내관이 매금이를 보초로 세워 놓고, 내수사의 힘 센 노비들을 부르러 갔다.
“하! 자네. 나까지 의금부에? 미친, 겐가?”
나까지 의금부에 끌고 가라니.
위아래 모르고 날뛰는 권 승휘답게 이리 쉽게 걸려드는구나.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이 기쁘면서도 여기서 계획을 들키면 일이 틀어질 것이기에 윤씨는 짐짓 화를 냈다.
“감히 대군의 부인을 의금부에 끌고 가라니. 그것도 아직은 종4품 내명부의 말단인 자네가, 정1품의 부부인인 나를, 감히!”
윤씨가 묻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뜻밖이어서 당황한 모지리가 눈동자를 떨며 윤씨에게 여쭸다.
“부부인 마님. 들어가게 되더라도 대군 자가께서 곧 꺼내주실 것이지요?”
어지간한 양반들도 한번 들어가면 몸 성히 나오는 일이 드문 곳이 의금부다. 어머니의 주인이었던 한계미 어르신의 부탁으로 뛰어든 일인데!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대군 자가와 얽힌 일인데.
모지리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부여쥐고, 이번 일에 뛰어들게 된 조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 유구국에 두 번만 다녀오면 양인으로 속량시켜 주신다는 약조도 잊지 않으셨지요?”
쯧쯧.
정말로 모지리였네.
윤서는 혀를 차며 아직도 자신이 희생양으로 던져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모지리가 윤서 쪽으로 기어 오며 소리쳤다.
“소인은, 소인은 대군 자가의 명을 받아,”
“닥치거라, 이놈. 우리 자가의 존안은 뵌 적도 없으면서, 천한 입에, 감히 자가를 담다니!”
윤씨 뒤에 서 있던 조 전언이 튀어나와 모지리의 뺨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 밖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당장 들어와 이 자를 끌어다 의금부에 하옥시켜라!”
그러자 뜰에 시립 해 있던 명례궁의 나인과 환관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지 후다닥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리고 뒤이어 아이쿠, 아얏, 아구구, 비명 소리가 요란하였다.
“이, 이게 무슨.”
놀란 조 전언이 문을 활짝 열자, 댓돌 아래 뜰에 명례궁 호위 하인 다섯 명이 모두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쓰러져 신음하고, 그 옆에는 매금이가 몸 풀리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듯 목을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귀하게만 자라나 대군의 부인으로 영화만 누려온 윤씨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 정말로 나를? 하! 전하의 정식 며느리인, 나를!”
“전하께서는 아들들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상대적으로 며느리들에겐 가혹하시다는 것, 여차하면 이혼도 마구 시키신다는 것,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전하의 가혹함은 오만하고 방자한 자네를 향할 것이네.”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리고 부부인 마님!”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윤씨를 내려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 우리 세손 아기씨를 마음에 품고부터 세상이 참 무서운데요. 내 아이 어떻게 될까 무서워서, 조금의 나쁜 짓도 필사적으로 피하게 되던데요. 그 죗값 내 아이가 받을까 봐.”
“하! 세손이, 너의 아이라! 나를 의금부에 끌어가고도 네가 그 자리를 유지할 것 같으냐?”
“부부인께선 도원군을 거의 잃을 뻔하시고도 그 아이의 존재가 그리 간절하지 않으신가 봅니다. 부모의 기본 의무는 자식 제 앞가림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는 것인데. 그 의무마저 이렇게 함부로 저버리시니, 저승길에서 차마 눈 못 감으실 일은 없으시겠네요.”
“무, 무엇이라!”
“승휘 마마님,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자네도 꽤 영리한 것 같은데, 가지를 가려 둥지를 틀었어야지.”
윤서의 말이 끝날 때 내수사의 건장한 하인들이 몰려왔다.
쓰러져 있던 명례궁의 호위가 내수사 하인들 앞을 가로막으려 하였다.
부질없는 시도였다.
명례궁의 호위가 허리춤의 몽둥이를 손에 쥐기도 전에 매금이가 몸을 붕 띄운 후 한 놈은 머리통을 후리고 내려오면서 다른 한 놈의 가슴팍을 걷어찬 다음 땅에 딛은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휭 돌리며 오른쪽 발로 다른 놈의 양물을 다시 한번 걷어찼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두 호위는 주요 부위를 가리며 스스로 엎어졌다.
‘영화네, 영화야.’
우리 매금이 이십일 세기에선 전 세계 최고의 액션 배우로 이름을 날릴 텐데, 시대를 잘못 태어나서.
마음 같아서는 “브라보! 우리 매금이! 잘한다!” 외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윤서는 눈으로만 열렬하게 감탄을 보내고, 몰려온 이들에게 명했다.
“이 둘은 끌어가고, 부부인 마님은 공손하게 가마로 모시게. 의금부로.”
“권 승휘. 전하와 중전마마께서 자넬 그냥 두지 않으실 걸세. 영영 승휘로 살거나 아니면 홍가처럼 상궁으로 내려앉아서 바깥세상 구경도 못하게 될 것이야.”
저주를 날린 윤씨는 조 전언의 부축을 받고 우아하게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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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윤서에 의해 의금부에 보내졌다는 보고를 들으신 세종께선 일단 둘째 며느리는 명례궁으로 돌려보내라 명하신 후 윤서를 천추전으로 불러들이셨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세종께서는 벌써 이 각 동안이나 침묵하시는 중이셨다.
그때 밖에서 “전하의 부르심 없이 들어가시지 못합니다.” 하고 누군가 막아서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