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화. 운명은 아쟁의 음률을 타고
“계란 썩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내뿜는 구덩이가 여기저기 많이 있는데, 그 구덩이 속에 든 것이 다 귀한 유황이라 합니다. 다 파내어도 일 년이면 다시 가득 찬다고 하니, 앞으로 우리 조선에 유황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윤칠월 이십팔일.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란 상투적 표현이 딱 들어맞도록 맑게 갠 초가을 오후, 경복궁 경회루에 왕실의 주요 인사가 다 참가한 연회가 열렸다.
아홉 달만에 유구국에서 돌아온 수양 대군과 한남군을 환영하기 위해 이향이 연 연회였다.
유구국 중산왕이 선물하였다는 붉은 색 화려한 비단 도포를 입은 수양 대군이 상석에 자리하신 세종과 소헌 왕후, 세자 이향을 향해 쉴 새 없이 이국의 풍광을 설명하였다.
“또 사철 더워서 무성하게 자라는 사탕수수를 일 년에 두 번이나 수확한다고 하니, 어마마마께선 이제 원 없이 설탕을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설탕과 호추를 한 되씩 각 전각에 고루 드렸으니 맛들 보소서.”
수양 대군이 또 전하의 후궁 신빈과 양 귀인, 그리고 대군과 군의 부인들을 향해서도 생색을 내었다.
“꼬리를 한껏 펼친 꿩 같구나.”
양 귀인이 슬쩍 윤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윤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깨물어 삼키며, ‘수양 대군의 인정 욕구는 여전하구나.’ 탄식했다.
그리고 유구국의 강한 햇살과 거친 바닷바람에 갈색으로 그을린 수양 대군의 얼굴을 상세히 살폈다. 반짝거리는 눈에는 큰 성과를 내었다는 자부심이 가득하였다.
“그래, 네가 외할머니께도 설탕을 드렸다지? 어제 문안을 드렸더니 설탕을 드시고 기력이 좀 나신다고 하였다. 장하구나, 참으로 장해.”
무사히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해 소헌 왕후께선 환하게 웃음을 보이셨다.
동쪽 상석에 중전마마와 나란히 앉아 계신 세종께서도 흐뭇한 눈길로 수양 대군과, 그 옆에 소박한 차림으로 묵묵히 앉아 있는 한남군을 바라보셨다.
“한남군은 어떠하였더냐? 처음에 뱃멀미로 고생하였다더니, 나중에는 좀 괜찮더냐?”
세종께서 물으시자 양 귀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뿌듯한 눈빛으로 큰아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옆의 신빈은 열흘 뒤에나 돌아올 계양군의 부재가 안타까운지 표시 안 나게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예, 인삼과 박하 달인 물이 뱃멀미에 도움이 된다고 권 승휘께서 챙겨주신 덕에 곧 기력을 되찾았습니다.”
한남군은 윤서를 보며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세종을 향해 고하였다.
“왜나 유구는 모두 섬나라인지라 선박을 짓는 솜씨와 항해술이 빼어납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대신들과 함께 배에 화포를 장착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방법을 고심하셨는데, 유구국의 조선술을 참고하면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한남군이 겸손하게 답을 올리자 세종께서 “그래. 네가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칭찬하셨다.
그러자 좌중의 관심이 한남군에게 쏠리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수양 대군이 이내 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유구국에 다녀오는 사이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벼락을 유도하고, 또 두창을 예방하는 침이 생겨나다니요? 이는 모두 우리 형님 저하께서 세우신 업적이 아니십니까?”
세종 옆에서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부드럽게 웃고만 있던 이향은 수양 대군의 말에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벼락을 막는 피뢰침은 우연히 만난 귀인에게서 얻은 지식이고,”
이 말을 하며 이향은 대각선으로 앉아 있는 윤서를 살짝 보며 눈을 가볍게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수양 대군과 그 옆의 광평 대군에게 돌렸다.
“두창 예방은 우리 광평 아우가 혜민국에서 밤낮없이 연구하며 의원들과 함께 알아낸 방법이니라. 마침 형혹성이 밝게 빛을 내며 심수를 향하고 있는 바, 올겨울에 역병이 돌 조짐이 보이니 너도 내일 한남군과 함께 살곶이 목장에 가 두창 침을 맞거라.”
“!”
수양 대군은 놀라 맞은편에 앉은 부인 윤씨를 바라보았다.
그제 인천으로 배를 몰고 들어왔을 때 포구까지 마중 나온 윤씨에게서 무당 무가이의 죽음과 함께 전해 들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무가이 그것이 곧 역병이 불어닥칠 조짐이라 하였습니다. 그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가이가 예언한 역병을 형님께서도 예상하고 계시다면, 그러면 무가이가 죽기 전 했다는 말, ‘권 승휘의 운명이 읽히지 않아 살(煞)을 날려도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진실이란 말인가.
수양 대군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화려하게 성장을 하고 연회에 참석한 부인 윤씨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저 여인이 모든 운명의 실타래를 마구 흩트리고 있단 말인가.’
수양 대군은 아직 정식으로 세자빈 책봉을 치르기 전인데도 대군의 부인보다 더 상석에 앉아 있는 권 승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윤서도 수양 대군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신에 썼던 것처럼, 도원군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보위에 대한 야망은 깨끗하게 포기하고 유국국과의 무역에만 힘쓸 작정이신가.’
윤서는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 수양 대군에게 눈빛으로 진심을 캐물었고.
‘한명회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지. 그 기다림의 끝에 너는 대체 어떤 운명을 내게 보일 것이냐.’
수양 대군 또한 윤서의 운명을 형형한 눈빛으로 물었다.
강렬한 눈빛으로 수양 대군과 윤서가 서로의 운명을 재고 있을 때, 마침 세종께서 두 사람의 눈싸움을 말씀으로 깨셨다.
“오늘 참으로 뿌듯하구나. 수양 대군과 한남군이 유구국과 친교를 맺고 돌아와 앞으로 유황과 우각, 초석을 어렵지 않게 구할 방도를 찾았고, 세자와 광평 대군이 또한 벼락을 막아내고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한 두창을 막아낼 방도를 찾아냈다. 해서, 내 너희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려고 이 연회를 열었느니라.”
세종께서 아들 하나하나를 뿌듯하게 눈에 담으시며 말씀하셨다.
윤서는 세종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이미 들어 알고 있기에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방금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보다 고개를 돌려버린 수양 대군의 일을 하나씩 짚었다.
‘한명회도 마침 한양에 돌아왔다지.’
수양 대군이 돌아오자마자 한명회가 돌아온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윤서는 이향에게서 한명회의 목숨을 받아냈다.
다만 원칙주의자 이향답게 불궤를 도모할 기색을 보이기 전까지는 감시의 눈만 붙여두라는 당부를 곁들인 허락이었다.
윤서 또한 짓지 않은 죄를 미리 단죄할 생각은 없었다.
‘이향이 건재하다면 수양 대군도, 한명회도 죄를 지을 기회조차 없다.’
늘 틀릴 수밖에 없는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아주 잘 맞추는 점사가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 것처럼, 윤서의 존재 자체가 이향과 우리 홍위의 비극을 막아줄 강력한 징표가 될 수 있겠지만.
손 놓고 역사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기에, 윤서는 박 상궁과 함께 운영할 포목 공장에 한명회의 부인 민씨를 이미 끌어들였다.
팔도를 유람하는 한량 남편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부인 민씨가 아주 빼어난 자수 솜씨를 가진 점을 이용한 포섭이었다.
“민씨에게 수 놓는 솜씨가 좋은 침 선비 스무 명을 보냈다. 이불이나 옷감 등으로 쓰일 면포에 자수를 놓아서 일본에 가져가 팔 것이라고 하였어. 그 남편 한가 놈이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며 계집질이나 일삼으니, 민씨가 곤궁한 살림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 기뻐하더구나.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그런 서방은 없는 것이 더 나은데.”
역사에서 한명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조금도 짐작 못하는 박 상궁은 한명회를 그리 헐뜯고 또 은밀하게 덧붙였다.
“침 선비 스무 명 중 셋이 면포에 수 놓는 솜씨만큼이나 사람 급소에 바늘도 잘 박아 넣을 수 있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한명회의 급소에 바늘을 박아넣을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윤서는 한명회가 한양을 벗어나 일을 꾸밀 때도 대비하고 있었다.
윤서가 수양 대군과 한명회의 연결 고리를 더 확실하게 감시할 방안을 고심할 때, 전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전하께선 열사나흘 전에 있었던 벼락 시연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실은 천막으로 걸어가면서도 반신반의했었다. 정말로 벼락이 내리칠지, 내리친다면 과연 무사할지.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벼락이 온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면서도, 무탈하게 땅으로 스며들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일을 이뤄낸 것이 세자니라.”
세종께서는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세자를 가리켜 보이셨다.
“상소를 올리며 세자의 개혁에 반발하던 자들 모두가 나처럼 눈앞에서 벼락의 기적을 확인하고 두창 예방의 효능을 믿게 되었다. 세자가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야!”
“아바마마! 망극한 말씀이옵니다.”
“아니다. 늙고 지친 나의 시대는 저물었으니, 너희 모두는 나를 보필하듯 세자를 보필해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야 하느니라! 내 이를 당부하기 위해 오늘 연회를 열었느니라.”
전하의 말씀이 끝나자, 경회루 바깥쪽에 있던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단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희 다섯이 사뿐사뿐 소리도 내지 않고 올라왔다.
느리고 장중한 궁중 음악에 맞춰 알록달록한 오색 소매를 펄럭이며 궁중의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중 정 중앙에 선 무희가 한 줌 허리에 아주 빼어난 미모에, 춤사위가 고혹적으로 고와 눈길을 끌었다.
“저것이 그 유명한 초요갱이니라. 평안 대군이 첩으로 삼은.”
이렇게 가까이서 춤을 보는 것이 처음인지라 윤서가 흥미롭게 무희들을 살피자, 양 귀인이 중앙의 여인의 정체를 슬쩍 속삭여주었다.
그러나 윤서는 온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다는 초요갱의 미모보다 그 여인을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앳된 평안 대군에게 관심을 돌렸다.
‘광평 대군과 평안 대군이 올겨울을 무사히 넘길 것인가.’
저 두 왕자의 운명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래서 결국 이향과 우리 홍위의 운명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광평 대군으로 하여금 두창 예방법을 찾아내도록 한 것이었다.
이제 벼락의 기적에 감읍한 자들이 파견 의녀와 의원들과 함께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전국적으로 두창 예방법을 실행하기로 되어 있다.
‘형수님! 왜 그렇게 유심히 보십니까?’
펄럭거리는 무희들의 옷자락 사이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광평 대군이 윤서를 향해 술잔을 들어 보이며 수려하게 웃었다.
“연회가 끝나고 우리 자가께서 잠시만 따로 뵙자고 하시네.”
갑자기 옆에서 부부인 윤씨가 말을 걸어왔다.
“면포와 도자기, 그리고 비누까지. 도조 가문의 상인들에게 상당량을 넘기기로 한 모양이야. 그자들이 조만간 한양에 온다고 하네. 그래서 그 무역에 대해 의논하시고 싶다 하셨네.”
“아, 저는 아무래도 아직 아기에 매여 있어서 저를 대리할 이를 하나 찾았습니다. 무역에도 밝고 실무에도 밝은데, 조만간 소개 드리지요.”
윤서가 말하자 윤씨가 환히 웃었다.
“우리 자가께서도 아무래도 공사가 다망하시지 않은가? 아까 한남군이 말한 것처럼, 유구국에서 데려온 기술자들과 함께 새로 배를 지어야 하네. 그래서 우리도 전반적인 무역을 관리해줄 대리인을 하나 찾았네.”
“대리인이요? 명례궁의 내관이 아니라, 따로 외부인을 영입하신 것입니까?”
윤서가 묻는 순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아쟁이 흐느끼듯 지이이잉 여인의 울음 같은 음률을 내고, 그 소리에 맞춰 초요갱이 느릿하게 학처럼 팔을 벌리며 오색의 소맷자락을 화려하게 펄럭거렸다.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올라왔다.
윤서는 윤씨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입에서 뱉어질 이름을 확신했다.
“그 대리인을, 제가 한번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