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화. 연생전의 벼락과 두창 예방 (5)
벼락이 몰아칠 천막에 기어이 가시겠다는 전하의 말씀에 신하들 모두 창백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세종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너희가 평소 임금을 위해 무엇이라도 다 할 것처럼 충성을 부르짖지만, 과연 그 말속에 몇 할이나 진심이 들어 있는가 물으시는 웃음이셨다.
바로 그 순간.
“하바마마! 소죤이 가옵니다!”
(할바마마! 소손이 가옵니다!)
홍위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좌중의 눈이 모두 다 어린 세손에게 쏠렸다.
“소죤이 하바마마 모시고 천막에 가겠즙니다. 하바마마께져 선정으 폇치신 것은 온 세상이 다 앗 것입니다. 그리구 천막은 아바마마께져 지으셨으니까요! 하바마마께져 아바마마를 믿으시는 거처엄, 소죤도 아바마마를 믿싸옵니다!”
“!”
“!”
“!”
세상에.
사방은 온통 윙윙윙 번개를 몰고 올 거센 바람 소리뿐이었다.
모두 입을 벌리고 용감하기 짝이 없는 세손을 바라보는 사이, 홍위가 세종께 달려가려 했다.
“홍위야!”
아직 홍위의 휘(諱)를 공개적으로 부를 수 없는 신분이란 사실도 잊고 윤서는 홍위를 말리기 위해 옆자리를 향해 빠르게 팔을 뻗었다.
그러나 벌써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릴 정도로 몸이 날랜 홍위는 윤서 팔이 닿기 전 이미 의자에서 몸을 빼내 저만큼 떨어져 섰다. 그리고 윤서를 바라보며 의젓하게 말했다.
“난 하바마마와 아바마마를 믿어요, 어먼니! 그리고 나는, 세죤입니다!”
그리고 윤서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몸을 돌리고 휘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세종을 향해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갔다.
‘그래도 안 돼!’
번개가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홍위는 너무 어리다. 빛도 강하고 소리도 클 것인데!
홍위를 안아서 도로 데려오기 위해 윤서가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희아가 “그냥 계세요, 어머니!” 속삭이며 윤서의 손을 꽉 쥐었다. 희아는 얼굴을 가까이 붙여 윤서에게만 들리도록 다시 말했다.
“어머니, 제왕의 일입니다.”
‘제왕의 일’이니 어머니 자격으로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아홉 살 평창 군주는 그러나 말과 달리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제왕의 일!’
윤서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왕관의 무게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그 왕관의 무게를 고작 네 살 홍위는 본능적으로 알아, 할바마마 세종께서 무엇을 보이고자 하시는지 이해하고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평창 군주 희아도, 왕실의 일원이라면 미래의 군주가 행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서선 안 된다고 사사로운 정을 떨며 억누르고 있다.
‘이렇게 뼛속까지 왕족다웠던 아이들이!’
윤서는 후후 숨을 뱉어내며 목에 치미는 슬픔을 삼켰다.
그리고 떨고 있는 희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눈을 몇 번 깜빡여 눈물을 지우고 표정을 평온하게 고치고, 등과 어깨도 꼿꼿하게 세웠다.
내가, 너희를 지킬 거야. 왕실의 일원으로.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왕족이 해야 할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오오, 세손. 좋다. 할아비랑 가자꾸나.”
세종께서 달려온 홍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백여 장 (600m) 떨어진 거대한 천막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이향도 걸음을 옮기려는데 영의정 황희가 팔을 잡았다.
“주상 전하와 세손 각하 모두 안전하실 것을 믿어 마지않지만, 세자 저하께서는 여기서 중전마마와 종친들을 살피시지요. 전하는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만일의 일에 대비하여 세자 저하께선 여기 남아 계시라는 말을 에둘러 고하고 늙은 신하가 비척비척 전하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비장한 표정의 김내곤이 그 뒤를 따르고, 홍위의 스승 성삼문도 성큼 전하를 따랐다.
그리고 세손까지 앞장서시니 저 천막 안에서 벼락에 맞아 죽을 일을 없겠다고 확신한 신하들이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움직였다.
“어서, 너도 가라니까.”
갑자기 윤서가 앉아 있는 뒤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할바마마 하시는 일에 힘을 보태드려야지. 세손 각하도 가시지 않았느냐. 너는, 첫 손주가 되어서!”
속삭이듯 재촉하는 소리에 이어 희아 또래의 소년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청색 쾌자를 입고 머리에 같은 색의 건을 쓴 도원군이었다.
어머니 윤씨 부인의 성화에 앞으로 나선 도원군은 건너편 중앙석에 앉아 계신 중전마마께 다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앓았다면서. 도원군 너까지 갈 필요 없다.”
중전마마께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리셨다.
마음 같아서는 홍위도 도로 안아 데려오라고 하고 싶으신 중전께서는 위험하지는 않다고 해도 바로 위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천막에 병색이 아직도 남아 있는 첫 손주를 보내고 싶진 않으신 마음이셨다.
“아닙니다, 중전마마. 소손도 가서 할바마마께 힘을 보태 드리고, 두창 예방 침도 어서 맞고 싶습니다.”
도원군은 의젓하게 고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려 벌써 삼십 장(100m)도 넘게 멀어진 전하 일행을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독하시네, 우리 숙모님.”
희아는 윤서에게 살짝 속삭이고 이제 제법 가까워진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저 천막이 안전하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는 윤서는 그래도 홍위를 못 가게 막고 싶어 하였는데, 그런 완전한 확신도 없으면서 아들을 보내다니, 대단한 욕심이라고 비꼬는 말이었다.
“······.”
윤서는 몸을 돌려 부부인 윤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줄 뒤에 앉아 있던 윤씨가 몸을 일으켜 윤서에게 다가왔다.
윤씨는 윤서 앞에 무릎을 꿇듯 앉아 공손하게 손까지 모은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도원군도 전하의 손주가 아닌가? 그래서 따르도록 한 것이네.”
윤서가 꾸짖기라도 한 듯 윤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그러자 뒤에 앉아 있는 다른 대군 부인들이 윤서의 등에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아직 정식으로 세자빈이 된 것도 아니면서 감히 부부인을 비난하다니,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윤서의 등 뒤로 따갑게 쏟아졌다.
다른 종친 부인들의 반감을 더욱 부추길 요량으로 윤씨는 거의 엎드릴 듯 자세를 취하고 윤서를 치하하였다.
“권 승휘가 우리 도원군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내 어찌 잊겠는가? 혹여 그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내 어찌 살아서 우리 대군 자가를 다시 뵐 수 있겠는가? 내 그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 것이네. 그러니 혹여 우리 도원군이 나서서 기분 상하였다면, 부디 마음 푸시게.”
비굴하도록 감사를 표하고 또 거듭 변명을 하여 윤서가 부당하게 유세를 떨고 있다고 평판을 훼손하려는 의도였다.
하아.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세종께서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이론에만 치우치는 성리학을 걷어내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정치 철학으로서의 본래 유학을 되살리는 한편 민생을 위한 실용 정책을 펴시겠다는 새로운 통치 이념을 몸소 증명하시고자 벼락이 내리치는 천막으로 스스로 걸어가고 계시는데, 대체 여기서 이것이 무슨 수작인가.
실망감이 절로 들었다.
“부부인. 제가 도원군을 구해드린 일에 대한 치하는 충분히 다 받았으니 더는 거론하지 말아주십사 저번에 부부인께서 손을 내밀어주셨을 때 거듭 당부드렸습니다. 그 일을 벌써 잊으신 것입니까?”
“아! ”
윤씨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날, 홍 승휘가 궐을 나가던 날 윤서에게 손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통을 당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도원군은 장차 우리 세손 각하를 보필할 인재이니 세손 각하의 뒤를 따라 전하를 보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중전마마께서도 윤허하셨지요. 중전마마께서 이미 윤허하신 일을 왜 아랫사람인 제게 물으시는 것입니까?”
윤서가 냉정하게 말하자 윤씨가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칼을 빼들었으니 이대로 물러나긴 너무 체면이 구긴다고 생각했는지, 윤씨가 다시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까 자네가 세손 각하의 휘를 스스럼없이 부르기에, 나는 자네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세.”
아직 정식 세자빈이 아니면서 세손의 휘를 함부로 부른 것을 문제 삼는 행위였다.
그러자 희아가 싸늘하게 윤씨를 쏘아보았다.
“곧 정식으로 어마마마가 되실 것이기에, 저도 우리 홍위도 권 승휘를 사사로이는 ‘어머니’라 부르고 있습니다. 위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는 마음을, 숙모님도 도원군을 잃을뻔하셨으면서, 그 애타는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아! 그렇구나. 내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어.”
희아의 말에 윤씨가 한발 물러섰다. 도원군도 세종께 갔고, 또 이미 윤서의 무례를 뒤의 부부인과 군부인이 들은 것으로 일차 목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런 장난질을 더 봐줄 필요가 없다. 윤서가 윤씨를 향해 스윽 손을 내밀었다.
“곧 번개가 치고 벼락이 저 연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전하와 우리 세손 각하와 도원군의 무사함을 기원할 때입니다.”
“!”
윤씨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날 손을 꽉 잡힌 후로 시퍼렇게 들었던 멍 자국의 흔적이 아직도 조금 남아 있다. 으스러질 듯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자, 너의 몫의 살은 네가 받으라던 무가이의 절규와, 장차를 위해 납작 엎드려 순종하라는 수양 대군의 당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렇지. 모두 무사하실 것이네. 번개가 쳐도 무사하시다면, 우리 자가 돌아오시는 일도 다 무탈하실 것이네. 그럼, 이만.”
다시 손이 잡혀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진 윤씨가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갔다.
윤씨가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욕심을 내보이는 새.
세종께서 홍위의 손을 잡고 천막에 먼저 들어가셨다.
모두 거대한 천막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무렵.
거센 바람과 함께 우르릉 꽝꽝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검은 구름이 동쪽에서 빠르게 흘러왔다.
“모두 귀를 막고 엎드려라!”
금위대장이 우렁우렁 외치자, 호위군 모두 풀 위에 엎드렸다.
윤서는 희아 귀에 쓴 참나무 솜 귀마개를 한번 꼼꼼하게 살핀 후 눈을 감았다.
‘실용과 과학이 중시되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긴장을 풀기 위해 윤서가 실없이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변형하여 중얼거리는 순간 번쩍, 눈앞을 온통 하얗게 채우면서 저 먼 하늘 위 연 위로 번개가 쏟아졌다.
“저언하!”
“저언하!”
“세손 각하아!”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꽈르르릉, 고막을 찢는 듯한 천둥도 몰아쳤다.
삼백 장(1km) 정도 높이로 떠 있는 연 위에 정확하게 세 번 번개를 뿌린 검은 구름은 일 각(15분)이 되기 전에 서쪽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 한가운데 전하께서 홍위의 손을 잡고 천막 바깥으로 옥체를 드러내셨다.
“전하의 성덕이 하늘에 닿았음이옵니다!”
“와아, 천세, 천세, 천천세!”
모두 감동하여 외치는 사이로 다시 천천히 걸어오신 세종께서는 홍위와 함께 상소를 올렸던 자들 앞에 서셨다.
“하늘의 저 연이 보이는가?”
눈앞을 번쩍번쩍 밝혔던 번개에서 무사하게 돌아오신 전하를 유령 보듯 벌벌 떨며 보는 유학자들에게 세종께서는 하늘의 연을 가리켜 보이셨다.
“저 연과 연에 연결된 네 개의 쇠줄이 바로 번개를 막아내기 위한 피뢰침이란 기물이다. 연생전의 일 이후 세자가 군기시의 장인들과 힘을 합쳐 백성들을 벼락에서 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벼락은 검은 구름이 몰려와 생기는 자연 현상이지만, 군주와 너희가 노력하면 그 위험을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설마 임금께서 직접 벼락이 내리칠 수 있는 천막에 세손과 함께 거동하시며 상소의 무례와 오류를 지적하실 줄은 몰랐던 자들이 떨며 대답했다.
“공자께선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여, 늙고 병약해진 나를 대신해 우리 조선을 다스릴 세자는 앞으로 백성의 삶을 부강하게 하는 것을 정치의 제 일 과업으로 삼을 것이다. 하니, 백성된 너희 또한 성현의 말씀을 부단히 익히고, 세자의 지도를 따라 실제 삶을 바르고 윤택하게 하는 데 매진하기 바란다.”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공자께서 백성의 삶을 먼저 풍요롭게 한 후 교육을 논하라 하신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전하의 성덕에 크게 감읍하였습니다.”
번개에 혼이 빠졌던 이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그러자 세종께서는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면 저쪽에 마두창을 앓는 말들을 따로 가둬둔 우리가 있다. 나와 세자가 여러 대군과 힘을 합쳐 마두창으로 인간의 두창을 예방할 방도도 또한 마련하였으니, 모두 가서 두창을 예방할 침을 맞거라. 광평 대군! 모두를 말 목장으로 인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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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후 수양 대군의 배가 인천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