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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13화 (113/255)

제 113화. 연생전의 벼락과 두창 예방 (4)

광나루 너머 저 멀리 동쪽, 구름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신념을 가지신 선비께선, 어서, 나오시오!”

내금위장이 거듭 재촉했다.

그러자 서른여섯 명의 선비 중 하나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섰다.

초가을이라 하나 아직 날이 후텁지근한데도 속저고리부터 겉의 무명 도포가지, 겹겹의 옷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정하게 껴입은 초로의 선비였다.

키는 작으나 제법 다부진 선비는 백여 장(300m) 이상 떨어진 사각의 천막으로 가는 대신 몸을 돌려 뒤쪽 용봉 차일 아래 앉아 계신 세종 앞으로 향했다.

“저 하부지는 왜 이쪽으로 와? 천막은 저쪽인데.”

윤서의 손을 꼭 잡고 앉아 있는 홍위가 속삭였다.

“전하께 고할 말씀이 있는가 보아요.”

홍위의 귀에 속삭이며 윤서는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은 채 공손한 걸음걸이로 전하를 향해 걸어오는 선비를 바라보았다. 벼락을 몰고 올 거센 바람에 삐뚜름하게 걸린 우스꽝스러운 갓 아래에서도 선비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잘 모 했다고 마하까?”

(잘 못 했다고 말할까?)

내금위장이 앞으로 나오라고 우렁우렁 외칠 때부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천막으로 나갔다가 벼락을 맞게 될까 봐 작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지도록 걱정하던 홍위가 기대에 찬 어조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오늘 벼락을 유도하는 시연에 종친들도 참가하란 명을 내리셨다. 기이한 자연 현상에도 과학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을 벼락을 통해 보여주어 장차 시행될 두창 접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시려는 국왕의 의지였다.

그래서 미리 피뢰침이 여러 군데 설치된 이곳 간이 관람대 중앙에 전하 내외와 이향,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자리했고, 윤서는 홍위와 희아와 다른 종친들과 함께 왼쪽 편에, 도성의 일반 백성은 오른편에 나눠 앉아 있었다.

윤서는 벌써부터 백성의 안위를 걱정할 줄 아는 홍위의 마음이 어여뻐 작은 목소리로 벼락 천막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천막에 가서 앉아 있어도 벼락을 직접 맞진 않아요. 저 위 연에서 연결된 줄을 타고 내려온 벼락이 땅으로 들어가게 설치했거든요.”

“맞아. 저기 천막 꼭대기에서 벼락이 타고 내려갈 쇠줄이 네 개나 그 밑의 땅으로 연결되어 있어. 우리 궐의 전각에 설치된 것과 같은 피뢰침이야.”

윤서의 설명에 희아도 상세히 거들었다.

이향과 함께 천막의 피뢰침 설치에 참여한 이순지에게서 수학과 과학 전반을 배우고 있는 희아는 오늘 눈으로 직접 벼락이 내리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흥분해 있었다.

“소리보다 빛이 더 빠르대. 그래서 구름이 충돌할 때 번개가 먼저 번쩍하고 조금 있다가 우르릉 천둥 소리가 들리는 거야. 스승님이 그러시는데 그래서 번개 빛이 보인 시간이랑 천둥 소리가 들린 시간의 차이를 재어서 계산하면 번개가 얼마만큼 떨어진 곳에서 쳤는지도 알 수 있대.”

“어머나, 이순지 영감께서 그런 것까지 알아내셨어요?”

“응, 그래서 앞으로 천둥 번개가 칠 때마다 거리를 계산해 보기로 했어.”

“싯! 조옹히 해 바. 저 하부지가 머라고 고하는지 드어보자!”

(쉿! 조용히 해 봐. 저 할아버지가 뭐라고 고하는지 들어보자!)

“벼락과 인간의 선함과는 관계가 없어. 바보 같은 말이나 하겠지.”

“안냐, 씩찍한 선비야.”

(아냐, 씩씩한 선비야.)

희아와 홍위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윤서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천재는 조금의 단서를 가지고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통찰을 해 내는구나.’

전기가 없는 세상에서 양전하, 음전하라는 과학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할 방도가 없어 구름이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 번개라고만 말했는데, 희아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이순지는 벌써 광속과 음속의 속도 차이와, 그를 이용해 번개가 발생한 지점의 거리 계산법까지 추론해냈다.

‘그럼 성리학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따지는 저분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인간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이해한다.

십오 세기 지식인은 이 상황을 어떤 논리와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진 윤서는 마침 금군 둘에게 앞을 가로막힌 선비를 주시했다.

“이 이상은 못 가십니다.”

금군 둘이 팔을 교차해 선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래는 칼이나 창을 가지고 호위를 서야 하는데, 오늘 번개와 벼락 때문에 호위 금군은 모두 목검만 허리에 차고 있었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되자 선비는 그 자리에서 임금을 향해 엎으려 절을 올렸다.

“소인 밀양의 김내곤, 감히 전하께 아룁니다. 오늘의 일은 전제가 틀린 무리한 요구임을 통촉하옵소서.”

“응? 이리 앞으로 와 고하거라.”

세종께서 손짓하시자, 금군이 길을 내주었다.

김내곤이란 선비는 공손히 일어서서 임금 앞으로 나아가 다시 엎드렸다.

“몸을 일으키고 고하거라.”

어명에 따라 몸을 일으킨 김내곤은 갓을 바로 하고 옷깃을 차분하게 무릎 위에 모은 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했다.

“동중서는 공자님의 <춘추>를 연구한 후 가르치시길 ‘제왕은 하늘의 아들로 오직 제왕만이 하늘의 명을 받을 수 있고, 그리하여 백성과 만물은 제왕의 명을 통해 하늘의 명을 따르는 것이다.’라 말하였습니다. 제왕이 하늘의 뜻을 잘 섬겨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가의 여부는 천지 사물의 변괴를 말하는 재이(災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성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김내곤은 천지와 인간은 같은 종류의 기를 가지고 있기에 세상 속 음양의 조화가 깨어져 기의 흐름이 어지러워지면 하늘의 기운도 흐트러져 홍수, 한발, 벼락과 같은 재이가 발생한다는 유학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을 차분하게 설파한 후,

“하늘이 재이를 통해 깨우치고자 하는 대상은 우리 동방의 군주 되시는 전하시옵니다. 우리 같은 필부가 어찌 하늘의 노여움의 대상이 되고, 하늘의 어여뻐하심의 대상이 되오리까. 오늘 소인이 저 천막에 나아가 벼락을 맞아 까맣게 타 죽게 된다고 하여도 이는 소인의 부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하의 부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옵니다.”

하고 당당히 고하였다.

윤서는 “오호” 내심 감탄했다. 김내곤의 논리는 유교의 기본 가르침인 ‘천인감응설’의 틀 안에서 정교하게 들어맞았다. 그리고 벼락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도 임금 앞에 나와 믿는 바를 고하고 있는 태도로 보아 배운 바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전하께서는 무엇이라고 답을 하실지.’

윤서는 저편에 앉아계신 세종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기특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시고, 그 옆에 앉은 이향은 표정의 변화 없이 김내곤을 바라보다 저 멀리 동쪽 하늘을 살폈다.

한층 더 검게 짙어지는 먹구름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내곤, 너는 지난 닷새간 한양에 머물며 과인이 행하는 일과, 또 과인이 만든 글자인 정음을 배우고 정음으로 쓰인 여러 서책을 읽었다. 직접 목격하니 어떠한가? 아직도 과인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재이의 변을 당했다고 생각하는가?”

“소인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게 되었다고 유서와 재산 분재기까지 꼼꼼하게 작성하고 상경하였던 김내곤은 뜻밖의 알찬 환대로 채워졌던 지난 닷새간을 떠올렸다.

처음 사정전에 들어왔을 때 월대 위에 세워진 거대한 괘종시계가 주던 경이와, 돈의문 밖 목공장에서 만든 의자의 편안함, 한양 주택가의 깔끔함과 활기, 한강에 만들어진 부표 다리의 편리함.

그리고 무엇보다 한나절도 안 되어서 배울 수 있는 소리 문자 정음과, 정음으로 쓰인 <육아보감>의 놀랍고 낯선 성찰, 거처로 제공된 태평관의 시중 노비가 눈물을 흘리며 읽기에 강제로 빌려다 읽다가 너무 절절해서 저고리의 소맷부리가 흠뻑 젖도록 만든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 등.

확실히 전하의 조선은 눈이 부시게 급변하고 있었다.

김내곤은 땅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느낀 바를 솔직히 고하였다.

“유학자인 소인은 혼란스럽습니다, 전하. 한양은 너무 많은 물자가 사치스럽게 흥성거리고, 천한 이들조차 정음으로 제 생각을 거리낌 없이 써서 유통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어지러이 눈과 귀를 괴롭힙니다.”

김내곤이 말을 끝마칠 즈음 저 멀리 동쪽이 더욱 어두워졌다.

“전하, 반 시진(한 시간) 내로 곧 번개가 칠 것입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이향이 세종에게 고했다.

그러자 갑자기 세종께서 끙 소리를 내며 비대한 몸을 일으키셨다.

“전하!”

놀란 이향과 대전 내관이 재빨리 세종을 부축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홀로 바로 서신 후 좌중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성현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옳다. 그러나 또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한계를 지니기에, 근본적인 진리조차 당대의 한계 내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세종께선 돈의문 밖 목공장에서 권윤서에게 쌀 한 섬의 기적을 듣는 순간 뒤통수에 벼락을 맞은 듯 머리가 확 깨어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끼고 아껴서 오래 먹어보아야 결국 쌀 한 섬이지만, 그 쌀 한 섬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웃 채소 가게로, 땔감 가게로, 포목점으로 돌 때 총 네 섬으로 불어나는 재화 유통의 기적을 깨달았을 때.

사치를 경계한 성현의 가르침이 실은 재화가 엉뚱한 곳에 낭비됨을 경계한 것이지 상업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했던 바였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존중하되 과학과 실리에 근거한 정치를 이끌겠다는 조선의 새로운 방향을 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세종께서는 천천히 김내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씀을 이으셨다.

“재이(災異)는 군주의 부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 현상의 일부다. 그러나 재이가 군주의 부덕을 나타내는 징표가 된다는 성현의 말씀은 여전히 옳다. 재이가 발생하여 백성이 고초를 당하는 것은 군주가 미리 재이에 대처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 미흡한 대처가 바로 군주의 부덕함에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하여, 과인은 오늘!”

김내곤 앞에 다다른 세종께서 손을 내미셨다.

“김내곤 너와 함께, 벼락이 군주의 과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군주는 또한 충분히 재이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마땅히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보일 것이니라!”

“전하!”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하, 소인 김내곤 홀로 증명하겠습니다.”

사방에서 아우성이 솟았다.

저 천막 안에 들어가 있어도 별 탈 없을 것이란 사실을 가장 확고하게 확신하는 이향조차 창백해진 얼굴로 전하의 팔을 붙들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소자가 하겠습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만류하는 효자 세자의 귀에 세종은 단호하게 속삭이셨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난 완전히 정무에서 손을 떼고 중전이랑 여기저기 유람할 것이니 그리 알거라. 그러니 이건 내가 세자 네게 주는 양위 선물이다. 천막은 잘 설치 했겠지?”

“물론입니다. 연에서 내려오는 쇠줄을 천막에서 이십 장(60m) 이상씩 길게 벌려 묻었기 때문에 천막 자체에 벼락이 닿지 않습니다. 하오나 강한 빛과 큰 소리가 함께 날 것이기에,”

“나는 너를 믿는다, 향아. 아들로서도, 세자로서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리고 윤서가 벌써 귀마개를 만들어 주었는데, 무얼.”

세종께서 목에 걸고 있는 참나무 귀마개를 들어 보이셨다.

벼락 시연에 참가하게 된 우리 홍위와 희아가 혹시 벼락 소리에 고막이라도 상할까 걱정되었던 윤서는 전하 내외와 이향, 홍위와 희아, 그리고 주요 대신 용으로 귀마개를 서른 개 급한 대로 만들어 바쳤던 바였다. 목공장의 공장장이가 머리에 쓸 수 있게 참나무에 열을 가해 굽힌 후 귀가 닿는 부위에 솜으로 속을 채운 귀마개였다.

“이거 쓰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니라. 김내곤, 너도 귀에 솜뭉치를 넣었느냐?”

오늘 시연에 참가한 이들 모두에게는 귓구멍을 틀어막을 솜뭉치가 주어졌고, 번개의 징후가 시작되면 모두 양손으로 귀를 단단히 막으라는 지시도 벌써 내려져 있었다.

“예, 예, 전하. 여기, 이렇게.”

설마 주상 전하께서 직접 벼락의 중심에 서시겠다고 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김내곤이 얼이 빠져 허리춤에 매단 비단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전하, 전하께서 덕이 높은 성군이심은 이미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옵니다. 구태여 전하께서 나서실 사안이 아니옵니다. 소신이 가겠습니다.”

“소신이 가겠습니다.”

신하들이 눈물로 만류하는데 저 멀리 검은 구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경들도, 거기 상소인들도 모두, 함께 가자. 어서!”

세종께서 짓궂게 명하셨다.

“저, 전하······!”

“······!”

눈물로 만류하면 없던 일로 하시리라 기대했던 신하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천막에 벌써 피뢰침 설치가 정교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향과 금성 대군, 이순지뿐이었고, 간밤 목욕할 때 이향에게서 들은 윤서와 홍위, 희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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