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화. 연생전의 벼락과 두창 예방 (3)
이해에는 윤달이 들어 7월이 두 번이었다.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는’ 윤칠월 보름께가 벼락 시범을 보이고 두창 예방 침을 찌르는 시기로 결정되었다.
“왜, 보름께에요?”
벌써 금똥이 곁을 비운 지 한 시진(2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생후 사십오 일째, 이렇게 오래 아기 곁을 비운 적이 없어 아까부터 마음이 초조했던 윤서는 천추전을 나오자마자 뛰다시피 사정전 뜰을 가로질렀다.
여름날은 길어 아직 해가 서산을 넘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춤추듯 일렁이는 윤서의 그림자 곁에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자신의 그림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걸 보며 이향이 대답했다.
“그때가 마침 일기가 혼란스러울 것이오. 관상감에서도 그렇게 예측하고 이순지 영감이나 내 생각도 그러한데. 부인, 천천히 걸으시오. 넘어지면,”
“저하. 집현전으로 가셔야지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금똥이 수유도 해야 하고, 우리 홍위랑 희아 저녁 수라도 챙겨야 하고요. 이따 뵈어요.”
궁금했던 점을 들은 윤서는 이향의 말을 끊고 몸을 돌려 거처로 빠르게 향했다. 키가 작은 조 상궁과 나인 넷이 뜀박질하듯 윤서의 뒤를 따랐다.
‘하아, 저리도 아이들이 간절할까.’
입에 먹이를 물고 아기 새들이 기다리는 둥지를 향해 날아가는 어미 새처럼 쏜살같이 사라지는 윤서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숙연한 감동이 들어 코끝이 찡해지는 이향 곁에 광평 대군이 와서 섰다.
“형수님은 직접 수유를 하고 잘 때도 데리고 주무신다고요? <육아보감>을 읽은 제 안사람도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만, 하시는 일이 많으신 형수님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다 하실 수가 있는가 감탄 반 우려 반으로 광평 대군이 말끝을 흐렸다.
“생후 일 년까지가 정서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고 하지 않니? 나는 아바마마께서 잠저에 계실 때라 유모가 키웠어도 어마마마 곁에 매일 있다시피 하였는데, 너는 궐에 들어와 커서. 어떠하였느냐?”
집현전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향이 광평 대군에게 물었다.
“하루에 한 번은 잠깐씩이라도 어마마마를 뵌 기억이 나요. 유모가 잘 돌봐줘서 외롭단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친모 바로 곁에 가까이 크면서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맞는 듯합니다. 수양 형님을 봐도 그러하고요.”
“···그렇지. 수양이 좀, 여유가 없지.”
“예, 내달이면 수양 형님께서 돌아오시겠네요. 추석 땐 안평 형님도, 임영 형님도 다들 상경하시니 오랜만에 우리 형제들 다 모이겠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 어느새 집현전 전각 앞에 도착했다.
“너도 함께 들어가자. 상소를 올린 자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지식 세계를 설명하고 설득할지 논의해야 하는데, 너도 의견을 보태거라.”
이향의 말에 광평 대군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다들 잘, 협조하고 있습니까?”
광평 대군이 이렇게 묻는 것은 최근 들어 이향이 아침마다 행하는 서연에서 서연관을 맡은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주자의 해석을 거치지 않은 유학 경서 원전을 진강하겠다고 선언한 일 때문이었다.
주희가 체계를 세운 성리학의 사서삼경을 기초로 또 주희가 지은 <주자가례>에 따라 관혼상제의 풍습을 세우고 유교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을 해왔던 집현전 학사들로선 적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세자 이향은 조선에 성리학적인 기본 질서가 확립되었으니 이젠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가 부강해질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연구할 때라고 선언했다.
서연의 주제도 <화폐 유통 시도가 왜 실패하였는가. 화폐 유통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로 잡아 서연관으로 참여하고 있는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조선의 경제 전반과, 화폐 경제가 발달한 송나라의 경제와 비교하라는 과제를 던졌다.
“기존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먹고 사는 것과 같은 실질적 학문도 진지하게 탐색하라는 저하의 명에 내심 반발이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내년부터 공물을 쌀로 거둬들이기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다 토지를 가진 이들에게 부담이 가서 암암리 불만도 많고요. 이래저래 형님 저하께서 참 힘이 드시겠습니다.”
“한번은 넘어가야 할 산인 것을. 아바마마께서도 힘을 실어주고 계시지 않느냐? 너도 혜민국에서 힘이 되어 주고 있고.”
이향의 어조는 서늘했다.
새로운 방향을 따라오지 않는 학사나 신하는 가차 없이 내쳐버릴 듯 단호한 이향의 태도에 광평 대군은 눈을 크게 떴다.
신하들과 협치를 중시하시는 부왕보다 더 부드럽다고 알려졌던 형님이 순간 피 묻은 칼날로 조선의 기틀을 세우신 태종을 더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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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마, 제가 한 말 때문일 것이에요.”
윤칠 월 십 일.
상소를 올린 자들이 어명을 받아 한양에 상경해 사정전에서 전하와 이향을 알현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윤서는 출산 후 처음으로 이향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두세 시간마다 깨던 금똥이가 드디어 술시 반각(저녁 8시)에 잠이 들면 인시(새벽 세 시)까지 깨지 않고 통잠을 자기 시작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간은 홍 내관이 이향의 목욕 시중을 들며 종기가 있는지 살핀다고 살폈지만, 아무래도 윤서처럼은 살필 수가 없는지라 마음이 내심 불안했었다.
이천에서 공수해 온 온천물 안에서 함께 목욕하며 몸을 살피는데, 이향이 벼락을 유도할 장치를 세운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전에는 참 애틋하도록 믿음이 갔었는데, 요새는 불쑥불쑥 불신하는 마음과 화가 치민다.” 하고 자조하듯 말했다.
“아바마마께선 꼭 행해야 하는 사안에 대해 학사들이 반대 의견을 낼 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거듭 다시 조사하라, 다시 안을 살피라 하시고, 그래도 어명을 거부할 때 질책을 하시거나 옥에 가두거나 하셨다. 그런데 나는 두 번을 말하기가 싫어.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윤서야.”
이향이 육아로 굳어진 윤서의 어깨를 풀어주며 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자의 성격이 좀 변하였다고들 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 윤서였다. 따스하고 다정하시던 성품이 날카롭게 변해 경청보다 지시하기를 즐기고 제때 필요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심하게 질책한다고도 하였다.
그간 밤에 여러 번 깨는 금똥이를 돌보느라 윤서도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이향은 자선당 동온돌에서 홀로 자고 있었다. 낮의 격무를 견디려면 밤 잠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윤서가 그리하시도록 하였다.
“꿈에 자꾸, 하아, 한참 큰 우리 홍위와 금똥이가 울고 있는 것이 나온다.”
“저하!”
윤서는 문득 이향이 홀로 겪고 있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무엇보다 배신감을 깨달았다.
집현전의 학사들은 오랫동안 이향의 서연관으로,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자 함께 학문을 닦아나간 동지이고, 이향이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국정을 함께 이끄는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자 초기부터 함께 해온 이들 절반 이상이 원래 역사에서 홍위를 지키지 않고 수양 대군에게 협력하는 무리였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이향이 전과 같이 그들을 신뢰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그 불신이 이향의 마음속에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윤서가 늘 수양 대군과 한명회의 동향을 살피는 것처럼, 이향도 신하들의 행태를 의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저하! 그건 제가 한 말 때문이에요.”
윤서는 몸을 돌려 이향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아이들에게만 집중해 있는 동안 이향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수척해져서 수려한 콧날이 더욱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저하. 이향.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원래 역사에서 있었던 참람한 일을 말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은 후회하나요? 내게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을?”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아바마마께서 짜 놓으신 세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야. 그럼 조선은 지금과 크게 변함이 없었겠지. 그리고 그 일도 결국,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요. 후회해도 소용없지요.”
윤서는 가여운 이향의 뺨을 쓸었다.
자신이 믿던 세계가, 자신이 믿던 사람들이 실은 산산히 부서지는 세계 속 배신자들이었다는 믿기 싫은 진실을 쥐게 된 자의 뺨을 연민의 마음으로 쓸며 또 속삭였다.
“왜 당신이 이름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윤서는 비로소 이향의 마음을 이해했다.
지금은 막연히 전체를 불신하지만, 이름을 알았더라면 그자를 살려둘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은 빼어난 신하인 자들을 짓지 않은 죄로 단죄하려 든다면 그건 미친 군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미친 군주가 되지 않기 위해 이향은 신숙주를 함길도 산골에 보내 새로 개척된 4군 6진 지역의 여진족에게 학당을 세워주고 문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여진족을 우리 조선의 문화에 교화시켜, 장차 있을 북방 경영의 초석을 놓게 하는 책임을 지운 것이었다.
그리고 정인지는 연일 대동법과 화폐 유통을 실행하기 위해 세법을 점검하고, 또 때때로 해안가에 직접 나가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염전을 어느 각도로 어떻게 층을 다르게 만들어야 효과적으로 바닷물을 가둬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지 측량하는 업무를 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그 두 사람은 지금 조정의 신하 중 유례없이 가장 혹독하게 이향의 쓰임을 받는 중이었다.
이제야 윤서는 자신의 존재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왜 신화 속 카산드라가 올바른 예언을 하고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저주를 받았다고 묘사되었는지도 불현듯 깨달았다.
윤서는 이향의 목을 힘껏 안고 신화 속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신화는 삶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이에요. 카산드라가 예언을 맞추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건, 실제로는 그 예언을 믿고 행동하는 순간 미래가 변하는 것을 상징해요. 그래서 미래를 보았다 한들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지요. 또 그런 맥락에서 신화는 카산드라의 예언을 누가 믿든 안 믿든 그 예언은 틀린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어요.”
“너의 역사 속 이야기도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
“예, 맞아요. 당신은 빼어난 군주고, 제 예언에 따라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당신 자신을 믿어요. 당신이 새롭게 만들 미래를 믿으세요. 결국은 틀린 예언을 한 제가, 매의 눈초리로 불순한 자들을 남몰래 감시하면서 당신 뒤에 서 있을 테니까요.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이향은 격정적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윤서를 당겨 품에 안았다.
홀로 잠든 밤마다 깊게 잠들게 하지 못하던 불안의 정체를 깨달았고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불안을 함께 나눌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금똥이가 통잠을 자니, 이제부턴 나도 다시 함께 자겠다. 네가 옆에 있어야 나도 깊게 잠을 잘 수 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불안과 믿음을 함께 나누며, 너의 예언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꾸나, 윤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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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아침부터 날이 흐리고 구름이 짙었다.
지난 이틀간 집현전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의 안내를 받아 왜 현물이 아닌 쌀로 납부하는 새로운 공물 제도가 필요한지, 화폐가 유통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의 두창을 이용해 사람의 인두창은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등을 배운 상소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동대문을 나서 살곶이벌로 향해야 했다.
이들은 주로 하삼도 지방에서 어명을 받고 올라온 유학자들로, 학문적으로는 정몽주와 길재 등의 학풍을 계승한 지방 소지주들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간 한양에서 벌어지는 여러 변화가 성리학의 근본 기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우려의 서신을 한양의 권문세족 측에게서 은밀하게 받고 상소를 올린 자들이기도 하였다.
“군주의 부덕이 벼락을 불러온다고 아직도 믿으십니까? 공들은 학문을 닦고 마음을 함께 수련하여 절대로 벼락을 맞을 리 없다고 믿으십니까?”
관마(官馬)를 키우는 널따란 목장 한가운데에 뾰쪽한 지붕을 가진 천막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 위로 지붕에 삐쭉 솟은 쇠 첨탑과 연결되어 하늘 높게 연이 날리고 있는 가운데.
내금위장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까지 진실된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전하께서 부덕하시다고 말할 자격을 갖추었다 자신하는 분이 계시면 앞으로 나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