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0화. 연생전의 벼락과 두창 예방 (1)
금똥이의 출생은 왕실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백성들은 단오제 때 한강에서 세손과 왕손을 살린 후궁께서 용신의 가호로 아드님을 무사히 순산하셨다고 기뻐하였다. 이들의 기쁨에는 권 승휘 마마님이 운영하시는 여러 공장이 자신들의 생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양의 명문 세족 사이에서도 금똥이의 존재는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왕세자의 둘째 아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좀 더 복잡하였다.
“별이 빛나서인게요, 전하. 금똥이가 태어나던 날 밤 왕실의 재물을 상징하는 천주성과 나라 전체의 곡간을 상징하는 팔곡성이 함께 빛났다는 소리, 못 들으셨소?”
6월 말의 밤.
경복궁 북쪽 후원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노천탕에서 함께 노곤노곤 몸을 담그던 효령 대군이 세종에게 세간의 소식을 전하는 중이었다.
“천하 재물의 기운을 받은 아이가 하필 또 조선 팔도 거부로 떠오르는 모친에게서 태어났소. 그런데 또 하필 요새 기존 거부들의 처지가 어떠합니까? 박가, 한가, 윤가 가문의 것들이 공물 대납 비리, 정포(품질 좋은 면포)를 면포(품질이 못한 면포)로 슬그머니 바꿔 납부하는 횡령 비리로 걸려 다 유배를 가 있습니다. 그러니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인 게지요.”
“아니 지들이 죄를 지은 것하고 우리 금똥 어미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요? 그나저나 양녕 형님은 어디서 뭐 하고 계시는 겐가, 이 좋은 것도 못 해보고.”
뜨끈한 목욕물에 기분 좋게 몸을 담그고 계신 세종께서 퉁명스럽게 답하였다. 큰아들이 만든 이 훌륭한 목욕탕을 큰형님께 자랑하지 못하여 내심 유감이었기 때문이다.
북쪽에 설치된 커다란 무쇠솥에서 석탄으로 데운 물이 졸졸졸 흘러들어와 남쪽으로 흘러나가게 설계된 이 노천탕은 세자 이향이 토목에 일가견이 있는 정분, 이천 등과 함께 세종을 위해 경복궁 후원에 만든 목욕탕이었다.
그리고 오늘 목욕물은 또 특별하게도 얼마 전 발견한 이천 온천에서 공수해 온 것이었다.
이향이 사람을 시켜 온천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실은 윤서가 현대에서 이천에서 온천욕하고 쌀밥 정식을 먹은 덕분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시는 세종은 그저 세자의 효심이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궐 밖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는 효령 대군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무슨 관계냐니요, 아우님. 금똥이 어멈이 우리 세자 저하의 총애를 받아 공장을 운영하면서부터 조선의 신분 체계가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조금씩 생겨나나 봅디다.”
“!”
“거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항차 양민으로 속량도 해줄 거라 했다 들었습니다. 머리 검은 짐승인 노비들이 글을 알게 되면, 그리고 돈맛을 알게 되면 어찌 될까, 그 풍조가 확산되면 어찌하나, 근심들이라는 말이오.”
“머리 검은 짐승이라니! 감히 나의 백성에게!”
세종이 발끈 진노하시자, 부처님 같은 얼굴의 효령 대군이 눈썹을 찌푸렸다.
“에헤이, 아우님도 늙으셨네. 화를 다 내시고. 제가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간이 그리 말들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주 근거가 없는 말도 아니지 않소. 이 나라는 본시 유교를 국시로 한다며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
세종께선 입을 꾹 다무신 채 세자와 권윤서를 생각하셨다.
작년 세자가 본격적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십여 년이 넘는 자신의 재위 기간이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나라답게 세우는 기간이었다면, 세자의 대리청정 일 년 남짓은 본격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은 근원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농업은 본업(本業)이고 상업은 말업(末業)이란 인식하에 천시되던 상업과 공업에 여러 대군과 왕실이 직접 진출하고 있다. 그 뒤에는 장차 세자빈이 될 권윤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는 걸, 세종 본인이 가장 잘 아신다.
“결국 밥그릇 싸움이 아니겠소? 저들은 아마 왕실이 저들 밥그릇을 걷어차고 있다고 불안을 느끼는 것인가 보오. 그 와중에 천하 재물을 다 거머쥔다는 별자리의 아기씨까지 태어났으니.”
효령 대군이 세종의 심중을 말로 대신 표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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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우려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느냐?”
천추전 안.
효령 대군의 말을 전한 세종께서 세자에게 물으셨다.
신중하게 전하의 말씀을 곱씹은 이향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바마마, 일전에 날로 불어나기만 하는 노비 수에 대해 아바마마께서 염려를 표하셨을 때 윤서가 올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명나라의 초대 황제가 사노비를 폐지한 것은 일리가 많습니다. 인간은 습관의 존재인지라 집에서 노비들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다 보면 그 오만함이 뼛속까지 배어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된 양 명령하고 지배하려 들기 쉽습니다. 그런 자들이 또 유학을 공부하면, 유학에서는 학문과 마음을 닦으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자신들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쉽습니다. 나아가 임금마저 끊임없이 수신(修身)을 해 군자가 되어야만 제왕의 자격이 있다고, 자신과 같은 군자의 무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방자해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지?”
세종께서 윤서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기셨다.
옮겨 말하며 곱씹으니 권윤서야말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참 무모하도록 직설적이라고 세종께서 속으로 혀를 차셨다.
“그 아이는 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때때로 아주 예리하게 본질을 짚어내더구나. 집현전의 몇몇 젊은 것들도 유학만 고집하고 다른 학문은 잡학이라 이단시하며 시야가 좁고 강퍅하지 않느냐?”
“그래서 과거에서 잡학의 품계를 높이고, 잡학이라 뭉뚱그려 부르지 않고 각 분야를 제대로 부르게 할 예정입니다.”
“그렇지. 정명(正名)은 매사에 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공자께선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느니.”
세자 네가 행할 급진적인 변화에 과연 타당한 명분이 있느냐, 그 명분으로 결국 제 기득권과 밥그릇을 놓지 않으려는 무리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
“지금 수양이 배를 타고 가 유구국에서 무역을 탐색하고 있고, 안평과 임영은 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공업을 감독하고 있고, 광평은 혜민국에서 의술을, 금성은 군기시에서 야금과 화포 제작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아바마마의 혜안 깊으신 명을 받자와 제가 진두지휘하며 아우들과 함께 해 내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왕실이 앞장서 말업이라 하는 분야에 헌신하며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이제 우리 조선의 국시(國是)를 재고할 때가 되었다고 설득할 수 있단 뜻이냐?”
“예. 설득할 수 있고 설득해야만 한다고 소자는 생각하옵니다.”
세종의 물음에 이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답을 올렸다.
“당장도 두창 예방을 위해서 소와 말의 농포에서 농을 채취해 사람에게 옮기는 예방 접종을 해야 하는데 그거 맞으면 마소처럼 미련해진다는 미련 맞은 소문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하여 소자 당장 내달에 왕실과 종친부터 침을 맞게 할 것입니다. 왕실이 먼저 모범을 보이면 저들도 따라 오겠지요.”
지난 일 년 남짓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쌓아온 자신감이 충만한 태도였다. 그래서 듬직하고 뿌듯하면서도 세종께선 또 아비 된 마음으로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반발이 클 터인데?”
“아바마마께서 제게 주역의 대상전을 가르쳐 주시며, 때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국가 경영에 필요한 부역은 지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자 생각에 국시를 새로이 하는 것 또한 부강한 조선을 위해 반드시 지워야 하는 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네가 백성에게 먹고 살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네가 북방을 돌아보고 난 후 갑사를 비롯한 전문 군인을 늘리겠다는 계획도, 노비를 양민으로 속량시키는 계획도 모두 기반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비에서 양민이 되었을 때 주인이 주던 호구지책이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떠돌다 굶어 죽거나 도적 떼가 되거나 할 뿐이다. 그것이 노비보다 나은 삶이냐?”
“지금 당장은 무리일 것입니다. 작은 공장 하나에서도 이십 년을 잡고 시작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다 못 이루더라도 홍위 대에서는 완성을 보지 않겠습니까?”
“홍위!”
세손의 이름이 나오자 진지하던 제왕의 얼굴에서 인자한 할아버지의 얼굴로 표정을 바꾸신 세종께서 요사이 통 세손 얼굴을 못 보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희아도 뜸하게 들르고.
“홍위와 희아는 요새 무얼 하기에 할아비를 찾지도 않는 게야?”
“희아는 이순지에게 수학을 배우느라 바쁘고, 홍위는······, 강서원 수업 끝나면 윤서 곁에 딱 붙어 있습니다.”
“윤서 곁에? 아니 갓난아기 때문에 정신없는 윤서 곁에는 왜? 젖어미도 안 쓰고 직접 키운다고 하지 않았어?”
“···샘을 냅니다, 홍위가.”
“무어?”
*****
그러하다.
네 살배기 이홍위 세손 군은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많이 사랑해 주는 ‘거가 나잉’이 이제 막 보름이 된 동생을 더 많이 사랑할까 봐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빨갛고 쭈글쭈글하던 피부도 이제 뽀얗게 팽팽해졌다. 그런 아기가 입을 오물오물하며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신기하고 어여뻤다.
어여쁜데.
그런 아가가 ‘어먼니’의 품에 폭 안겨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불안하고 마구 샘이 났다.
그러면서도 또 천자문에서 배운 ‘孔懷兄弟(공회형제: 형제를 깊게 마음에 품으니) 同氣連枝(동기연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이어진 가지니라)’ 가르침 때문에 마음 놓고 미워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울먹울먹하면서 윤서의 무릎 위로 엉덩이를 쑥 들이밀고 손가락을 빨며 동생을 슬며시 밀어내는 것이었다.
말로 떼도 못 쓰고, 소심하게 엉덩이만 들이미는 홍위가.
윤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래서 적극적인 몸조리가 끝난 열흘 후부터 아기를 잠시 홍위의 유모 이씨 부인과 보모 나인에게 맡기고 건춘문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강서원의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홍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세손 아기씨!”
세자빈으로 공식 책봉하는 의식인 책례(冊禮)는 길일을 잡아 세심하게 준비한 후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다. 관상감에서 뽑은 윤서의 세자빈 책봉 길일이 새해 이월이기에, 윤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승휘’였다.
“아기씨, 어서 오세요!”
나인 시절 불렀던 것처럼 큰 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윤서를 보면, 홍위는 세손의 행동거지 따위를 잊고 짧은 다리로 힘껏 달려와 윤서의 품에 뛰어든다.
아직 관절이 다 여물지 않아 거뜬하게 안아 올리는 대신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하며 윤서는 묻는다.
“오늘 수업은 어떠했어요?”
그럼 홍위는 수유하느라 모유 냄새가 짙게 밴 윤서에게 잠시 폭 안겨 있다가, 고개를 떼어내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광평 삼쭌이 두창 에방 하는 거 선명해 줬더요, 어먼니. 그언데, 그거에 찐니면 머이가 만처염 번한다은데, 사시이에요?”
(광평 삼촌이 두창 예방 하는 거 설명해 줬어요, 어머니. 그런데, 그거에 찔리면 머리가 말처럼 변한다는데, 사실이에요?)
홍위는 요새 발음마저 아기처럼 퇴행하였다.
윤서는 홍위의 손을 꼭 잡고 자선당으로 돌아오면서 소곤소곤 말해준다.
“아니에요, 아기씨. 그거 맞으면 아주 약하게 열이 나거나 몇 개 농포가 솟는 정도로 두창을 앓고 난 후 다시는 두창에 걸리지 않는 거에요. 그러니까 꼭 맞아야 해요.”
“···그애도, 아가도 맞아?”
(···그래도, 아가도 맞아?)
윤서 말을 듣고도 작디작은 아가가 망아지 머리로 변할까 봐 걱정되어서 걸음을 뚝 멈추고 홍위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아기는 몇 달 있다가요. 홍위 형아가 씩씩하게 맞고 난 후 아가는 형아 따라서 맞을 거에요.”
“응! 내가 헝아니까, 씩!씩!하게 먼저 맞을 거야.”
그렇게 다정하게 손을 잡고 돌아와, 홍위가 좋아하는 우유와 설탕 화채를 마시는 것까지. 둘이서 온전하게 반 시진을 보내고 나면 홍위는 이제 의젓한 형님 노릇을 하며 오후를 보낼 수 있다.
그렇게 윤서는 자신의 존재가 불러온 나비 효과에서 한 발 물러선 궐 안에서 홍위와 희아, 그리고 금똥이를 키우는 데 전념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대조전 옆의 연생전에 벼락이 떨어지고, 세종의 승은을 입은 궁인인 사기 차씨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하늘의 꾸짖음이니 근신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세종께 신하들은,
“하늘의 천둥·벼락은 양기(陽氣)가 서로 부딪치는 것으로, 그 기운에 저촉되는 자는 죽는 것입니다. 나무와 돌과 새와 짐승에 이르기까지 또한 간혹 벼락을 맞아 죽는 일이 있는 것이온데, 어찌 사람의 일이 선하고 악한 것에 관계가 있겠습니까. 또 연생전(延生殿)은 본래 정전(正殿)이 아니옵고, 또 큰 벼락이 이른 것도 아니므로 재변(災變)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26년 7월 10일 기록 인용)
고하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정 내에서보다 재야에 있는 반가의 유학자들에게서 최근 일어나는 일에 대해 조목조목 왕과 왕세자의 부덕을 지적하는 상소가 줄지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