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09화 (109/255)

제 109화. 천주성과 팔곡성의 아이

“한, 명, 회!”

“!”

“내가, 죽, 으면, 하아, 그자, 를, 내, 저승, 동, 무로, 삼아, 줘! 이향!”

무시무시하게 밀려오는 격통에 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쉬면서도 권윤서는 할 말을 기어이 끝마쳤다.

그리고는 허억 허억 짐승처럼 숨을 뱉은 후 이향의 도포 깃을 찢어지도록 거머쥐며 다시 요구했다.

“약, 속!”

“윤서야, 너는 정말.”

불현듯 눈가가 뜨끈해진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홍위를 지키고 싶어 할 수 있는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고통의 극한에서, 죽을지 모를 공포의 끝에서까지, 어떻게 이토록 간절하게 홍위를 위태롭게 할지 모를 자를 죽여달라 말하는가.

그것도 평소 사람 목숨을 중히 여겨 도원군까지 기어코 살려내던 여인이.

“그자의 목숨을 네게 주마. 한명회를 네게 주마. 그러니 어서, 순산하거라.”

윤서의 진심과 집념에 감동한 조선의 세자 이향은 그리하여 목숨처럼 지켜오던 신념을 기꺼이 한번 부러뜨렸다.

“이향!”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푸른 안광을 빛내며 권윤서는 기쁜 듯 웃다가, 다시 밀려온 진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향의 가슴을 팍 밀어냈다.

“나, 가, 요! 사, 람들!”

“곁에 있고 싶소, 부인!”

손을 잡으며 함께 있어 주겠다는 이향을 윤서는 다시 뿌리쳤다.

“예, 쁜, 모습, 만.”

으흑, 고통을 뱉어낸 윤서는 뒤이어 “보, 이고, 싶어.”란 말을 힘겹게 덧붙였다.

뜻밖의 말에 이향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고통에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마저도 자신의 눈에는 여전히 어여뻐 보이지만, 이향은 늘 단호한 윤서의 말을 이번에도 들어주었다.

“그래, 밖에서 기다리마. 편안하게 아이를 낳는 것에만 집중하거라, 윤서야. 네가 걱정하는 모든 것은 내가 다 살펴줄 터이니. 편안하게. 아이를 낳는 것에만.”

그리고 무사하게, 윤서야.

아이와 함께 부디 무사하게 다시 나를 부르거라.

이향은 고개를 숙여 윤서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대었다. 땀을 많이 흘린 이마에서는 짭짤한 소금 맛이 났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이향이 속삭였다.

“사랑하오, 부인.”

다정하게 사랑을 맹세한 이향은 밖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들어오너라!”

“예, 아이고. 이거 삼 달인 물 좀 드소서, 마마님.”

산삼 가루 달인 물을 들고 문밖에 대기해 있던 박 상궁이 재빨리 들어와 윤서의 입에 약 주발부터 대주었다.

“한 시진 내에 아기씨께서 나오실 듯합니다.”

윤서의 상태를 확인한 순덕이 세자께 고하였다.

이향은 순덕과 함께 윤서를 부축해 백마 가죽 위에 눕도록 했다.

그리고 천장의 사슴 가죽 고리에 매단 흰 끈을 윤서 손에 쥐여준 후, 이마를 한 번 더 다정하게 쓸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 권 승휘가 무사히 해산할 수 있도록 너희는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예, 염려 마시옵소서.”

명을 내리고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이향은 다시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윤서야. 밖에 서 있을 것이니, 안심하거라.”

윤서는 대답을 못 하고 입꼬리로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산실을 나가는 이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보내는 이유가 혹시라도 잘못되었을 때 그 참혹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배려라는 걸, 이향이 끝까지 모르길 바라며.

윤서는 이향의 뒷모습을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

그 시각 선바위 밑 무가이의 굿당에서는 은밀하게 굿판이 차려지고 있었다.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와, 윤씨의 그림자 조 전언이 굿당 안에 앉아 의식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자신이 모시는 구천현녀의 상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 무가이가 천천히 돌아서 윤씨를 향해 다가왔다.

“정말로 행하시겠습니까?”

이제라도 산모에게 저주 살을 날리는 굿을 중지하겠냐는 물음이었다.

무가이는 단오제에서 지금 굿의 대상이 될 권 승휘가 윤씨의 아들의 목숨을 구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신께서는 머리를 깨질 듯 아프게 옥죄며 이 굿을 당장 중지하라 노여워하고 계셨다. 이대로 살을 날리면 애꿎은 제자만 또 몇 죽어나갈 것이다.

무가이의 물음에 윤씨가 깊게 한숨을 쉬더니 답을 올렸다.

“내가 그렇게 양심이 없는 사람인가? 그 사람이 내 아들을 살려주었으니 나도 아기는 무사하게 태어나길 바라네. 다만, 고래로 출산은 위험하지 않은가. 세자 저하께 빈궁의 자리가 늘 비어 있을 것이란 점사를 내고, 지난번에도 살을 날리길 주장했던 사람은 바로 자네야!”

“!‘

그러하였다.

세자에게 고독 살이 끼어 평생을 정궁의 아내 없이 쓸쓸하게 살 팔자라는 점사를 내놓은 것은 분명히 무가이 본인이었다.

‘박복한 세자와 단명할 세손!’

오 년 전에 그 점괘를 손에 쥔 후 장차의 부귀영화를 위해 수양 대군 편에 붙은 것도 자신이었고, 돌아가신 세자빈의 해산 날에 여기 이 자리에서 궐을 향해 죽음의 살을 연거푸 날린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작년 진성의 별이 기이한 빛을 발한 후 예언이 틀어져 버렸다.

게다가!

무가이는 굿당 옆 옹달샘에서 찬물로 목욕하며 올려다보았던 하늘의 별을 떠올렸다.

‘오늘 궁궐의 수라간을 상징하는 천주성(天廚星)과 여덟 가지 곡식을 나타내는 팔곡성(八穀星)이 저리 환하게 반짝거리는데. 이런 날에 태어나는 아기씨는 필시 한 번의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왕실과 나라 전체를 어마어마한 재물로 떠받칠 천하제일의 거부가 될 것인데.’

그 한 번의 고비를 무사히 넘길 것인가.

그것 또한 오늘 아기씨를 해산할 그 마마님과 관계되어 있고, 또 저기 저렇게 싸늘한 적의를 품어내고 있는 부부인과 관계가 되어 있으니.

[그 모든 것이 너의 죄다! 너의 죄다! 너의 죄다! 죽음으로 속죄하라!]

지끈지끈 울리는 두통에 섞여 구천현녀 신의 노여운 음성이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하아. 결국 날린 살이, 내게로 돌아오는구나.

탄식하며 무가이는 마지막으로 윤씨에게 그간 받은 무수한 재물에 대한 보답을 올렸다.

“부부인 마님. 모든 살(煞)은 한번 날리면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살을 맞은 자가 죽든지, 아니면 날린 자에게로 되돌아오든지 둘 중 하나만입니다. 그래도 정녕, 날리겠습니까?”

“뭬야? 오늘따라 왜 이리 사설이 긴가? 사 년 전에는 그리도 신이 나서 방울을 흔들며 방방 뛰던 자네가!”

“부부인 마님, 정녕 궐에 계신 그분을,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살고 싶어서, 이대로 죽기는 싫어서 무가이는 간곡하게, 머리까지 조아리며 거듭 물었다.

“!”

순간 윤씨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공포가 일었다. 무당의 눈이 일순간 검은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대군 자가께서 저 멀리 큰 배를 타고 무역을 하러 떠나실 때,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줄 모피 안감 도포를 입혀드리며 윤씨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었다.

우리 자가를 천한 뱃꾼으로 만든 배후, 권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어떤 싸움은 끝까지 가야만 하는 운명의 전장이지. 내 물러서지 않을 것이야!”

“좋습니다, 부부인 마님. 제 몫은 제가 받고, 마님 몫은 마님께서 장차 받으실 것입니다.”

무가이는 백 일 동안 매일 천 배를 하며 기도를 올린 정안수가 든 주발을 들어 입 한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에 푸우우 뿌린 후, 눈도 귀도 먼 박수무당이 챙챙챙 치는 제금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석삼불 오시는 길에 은하수로 다리 놓으시고. 정성으로 비오니 바람과 구름 간 데마다 순풍에 나리시고, 그리하야 목숨으로 참회를 구하오니, 구천현녀 품 안에서!”

챙챙챙챙!

박수무당의 제금 소리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하늘에서 진성과 천주성과 팔곡성이 동시에 환하게 빛을 내기 시작할 때.

오방 색색 무복을 펄럭거리며 격렬하게 춤을 추던 무가이가 윤씨를 향해 칼을 쑥 내질렀다.

“무가이! 자네!”

조 전언이 윤씨의 앞을 막아서며 일갈했다.

챙챙챙챙.

무아기는 다시 칼날을 거둬들여 자신의 목 가까이 휘저으며 윤씨를 향해 사설을 늘어놓았다.

“부부인의 살은 부부인에게로, 이 무가이가 날렸던 살은 무가이에게로. 구천현녀님의 뜻을 받자와 기원하나이다!”

소리친 무가이는 챙챙챙챙 소리에 맞춰 빙그르 몸을 돌리며 동시에 칼날을 목의 급소에 대고 팔도 빙그르 돌려 내렸다.

“아, 아니! 이게!”

윤씨와 조 전언이 놀라 뒷걸음질로 굿당을 빠져나올 때, 무가이의 숨은 벌써 끊어져 있었다.

*****

살을 날리면 서너 명의 제자가 죽어 나갈 것이기에 영험한 무당 무가이가 제 목숨으로 때늦은 속죄를 하던 순간, 윤서는 마침내 태어날 아기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한명회까지 알렸으니. 금똥아, 이제 엄마한테 오렴.’

무사히 너를 맞이하기 위해 하루 두 시간씩 걷고, 수영하고, 호흡법을 익히고, 머릿속으로 출산 장면을 몇 번이나 생생하게 그려보았단다.

무사히 너를 맞이하기 위해 이 엄마는 최선을 다했으니, 너도 최선을 다해 어서 엄마를 만나러 오렴.

윤서는 천장에 내려진 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순덕과 박 상궁을 바라보며, 후 히히 숨을 뱉고 천천히 말하였다.

“시, 작!”

윤서의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정말로 쉴 새 없이 진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앗.

윤서는 의녀 순덕이 지시하는 대로 호흡을 하고, 힘을 주고, ‘우리 엄마는 무통 주사를 맞고 편히 낳으셨다는데, 젠장 젠장!’ 조선 현실을 욕도 하다가.

인삼탕을 세 모금 마신 후 으아아아 죽을힘을 준 끝에 마침내!

“······!”

엄청난 것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첫닭이 울고 여명이 푸르스름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사내 아기씨이옵니다, 사내 아기씨이옵니다!”

아이를 받아낸 순덕이 기뻐 소리쳤다.

박 상궁이 으허허헝 울면서 문을 열고 뜰에 선 이향에게 “저하! 사내요. 튼실한 사내 아기씨요!” 소리치며 다시 으허헝 울고.

문밖에 서 있던 이향이 뛰어 들어와 손을 잡고 “사랑하오, 부인. 정말로 고생이 많았소, 고생이 많았소!” 하는데,

윤서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윤서의 눈과 귀, 모든 오감은 순덕이 안아 든 아기에게만 집중되었다.

순덕과 의녀 둘은 능숙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기와 윤서를 연결한 탯줄을 끊고 온몸에 묻은 오물을 닦고, 입 안까지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그리고 아기의 몸에 부드러운 천을 돌돌 감아서 드디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기만 바라보는 윤서의 가슴에 올려주었다.

“으앙, 으앙.”

그때까지 울지도 않던 아기는 윤서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힘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

기이한 감정이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마법의 주술처럼 윤서 안을 휘저어 격렬한 감정을 이끌어내었다.

자신 안에 이토록 강렬한 감정이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강렬한 애정이 파도처럼 온몸을 감싸, 이제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을 격렬한 환희로 바꿔 놓았다.

“세상에! 이향!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죠?”

“!”

권가가 세자의 휘를 함부로 부르는 것을 들은 박 상궁은 놀라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다른 의녀들은 휘를 알지 못해도 후궁이 세자를 대하는 태도가 놀랄 정도로 거리낌이 없다는 것에 놀라고 있을 때.

“정말로, 정말로 사랑스럽구나, 금똥아.”

이향과 윤서만은 서로와, 서로의 사랑의 결실만을 눈에 담으며, 오롯하게 행복하기만 하였다.

*******

“예쁘긴 한데, 너무 빨갛다.”

“···게독 빨가먼, 어떡하지, 눈나?”

(···계속 빨가면, 어떡하지, 누나?)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동생이잖아.”

“응, 논니는 것들 다 때여주 꺼야.”

(응, 놀리는 것들 다 때려줄 거야.)

다음 날 오후. 종묘에서 천신제를 올린 후 찾아온 홍위와 희아가 금똥이를 보고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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