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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08화 (108/255)

제 108화. 유두(流頭)절의 출산 (2)

이럴 때 엄마가 곁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가진 후 부모님이 그리운 순간이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도 절실하게 부모님이, 특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온몸을 꿰뚫는 진통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그리움에 윤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흑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여러 귀부인의 출산을 도와본 경험이 많은 의녀 순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마님. 호흡도 잘하고 계시는데, 어디 다른 곳이 불편하신지요?”

“정말, 이렇게 우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아파요?”

작은 권 승휘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박 상궁 마마님 좀.”

“···아! 밖에 계시는 거 같던데. 손 씻고 소독하고 들어오시라고 할게요.”

출산은 보통 친정어머니가 함께한다. 특히 권력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왕실 내명부 여인의 출산은 친정어머니와 유모가 산모 곁에 꼭 붙어서 주변 인물을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권 승휘의 친정 모는 딸의 등골만 빼먹던 존재로 그나마도 멀리 귀양을 가 있다지. 그래서 평소 친어머니처럼 살펴준 박 상궁을 찾는 게로구나.

작은 권 승휘가 가엾다는 듯 윤서를 보고 의녀 하나에게 밖으로 나가 박 상궁을 모셔오라 명했다.

“많이, 아프냐······?”

온몸을 소독하고 흰 두건을 꼼꼼히 착용하고 들어온 박 상궁이 윤서의 손을 잡고 물었다.

“괜찮, 하아!”

한 차례 격통이 지나가길 기다린 후 윤서는 박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사극 드라마에서 보듯 천정에서 붙잡고 힘을 줄 끈과, 방문에 잡고 힘을 줄 은제 말발굽도 다 걸려 있었지만 윤서는 걸어 다니다가 편히 기대기 좋게 만든 등받이에도 앉았다가, 또 엎드렸다가, 그때그때 도움이 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저하는 언제 오신다니? 이럴 때 와서 격려의 말씀도 좀 들려주시고, 응?”

예정일보다 일찍 산통이 시작된 것이건만, 박 상궁은 순행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세자를 원망했다. 그러다가 후후 호흡하는 윤서를 안쓰럽게 보고 또 슬며시 말을 바꿨다.

“임진강에서 오는 큰길로 사람을 보냈으니 지금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계실 게다. 그분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시겠니? 그러니까 힘을 내거라.”

“예,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박 상궁의 팔을 잡고 거닐자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윤서는 순덕이 건넨 수건으로 뺨의 눈물을 닦고 박 상궁에게 배시시 웃어 보일 여유까지 생겼다.

“우리, 아기씨는요?”

“세손 아기씨랑 군주 자가 모두 중궁전에 계셔. 아니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보소. 우리 귀한 마마님께 예의를 다 잊었습니다.”

덩달아 여유를 찾은 박 상궁은 윤서가 예전의 그 권가 나인이 아니라 장차 세자빈이 되실 귀하신 몸이라는 걸 비로소 떠올리고 예를 갖췄다.

그 점이 더 고마웠다. 박 상궁에게 늘 '어리버리한, 그래서 마음 쓰지 않을 수 없는 권가 나인'으로 각인되어 조건 없는 애정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점이, 윤서는 지금 사무치게 좋았다.

*****

권 승휘의 진통 소식은 왕실 내부에 여러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궁전의 중전마마는 특히나 더 마음을 졸이셨다.

권 승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친어머니처럼 권 승휘를 따르는 세손도, 제 몸처럼 권 승휘를 아끼는 세자도 어찌 될지 상상조차 안 되기 때문이다.

“아직 소식 없지?”

“이제 겨우 세 시진(6시간) 지났습니다. 초산이니 최소 두세 시진은 더 걸릴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초산은 오래 걸리지. 우리 홍위는 어찌하고 있다더냐? 그 어린 것이 요새 불안해서 권 승휘 치맛자락만 붙들고 졸졸 따라다니던데.”

“자선당에 평창 군주님과 계시는데, 저녁 수라도 거의 못 드셨다고 하옵니다.”

“그래? 안 되겠다. 가서 홍위랑 희아랑 다 불러오너라. 아이들 좋아하는 그, 설탕 듬뿍 묻힌 찹쌀 꽈배기인가 하는, 권 승휘가 해주던 거 수라 상궁더러 해서 좀 내오라 하고.”

“예, 마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호가 우리 권가에게 있기를. 나무아미타불.”

소헌 왕후께선 또 엄마 같은 존재를 잃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손주들을 위해 권 승휘의 순산을 간절하게 기도했다.

****

세종께서는 천추전에서 세자가 적어 보낸 북방 순행 보고서를 살피며 문득문득 권가가 했던 말들을 곱씹고 계셨다.

“군주의 후계자는 성현의 학문을 배우며 동시에 고금의 여러 군주의 왕재와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평가받게 됩니다. 모든 군주가 실은 재위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완성에 이른 군주인데도 세자 저하께는 처음부터 완성된 군주의 자질을 암암리에 요구합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부왕의 신하들에게 혹독한 평가의 기간을 오래 거친 후계자들은 그래서 대개······,”

언젠가 천추전에서 왜 위대한 왕에게 위대한 후계자가 생겨나지 못하는 일이 잦은가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란 명령에 권가가 올린 답변이었다.

그때 세종은 권가가 차마 고하지 못하고 삼킨 뒷말을 번뜩 이해했다.

‘나이가 훨씬 많고 권한도 막강한 신하들, 그래서 마음먹고 작당을 하면 세자를 바꾸려 들 수도 있는 신하들의 평가에 오래 노출되면 될수록 주눅이 들고 그럼 지력과 용력, 신체의 건강마저 모두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나 또한 세자 책봉 두 달만에 보위에 올랐음에도 재위 초에 아바마마의 신하들인 유정현, 조말생 등에게 얼마나 많은 압박을 받았던가.’

그러니 성군이라 칭송받는 완벽한 부왕 밑에서 그만큼 잘난 신하들에게 끊임 없이 평가를 받아온 세자 향의 처지를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라는 말이었다.

‘권력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심리적으로 이리 세심하게 읽어내어 보듬으니 지나치게 공손하고 예만 차렸던 향이가 요새 능구렁이 신하들을 아주 제대로 잡아대고, 홍위도 그리 당당해진 것이고.’

게다가 홍위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자들에겐 치밀하고 냉철하게 수를 쓰니 역설적으로 다른 아들들을 마음 놓고 아낄 수 있다고 세종께서는 감춰둔 자신의 마음 한 자락도 슬며시 들여다보시며, 부디 무탈하게 순산할 수 있게 빌었다.

그때였다.

“전하, 세자 저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오! 들라 하라. 들라 하라.”

사십여 일간 북방 구석구석을 몸소 돌아보며 새로 개척한 사군과 육진 지역을 온전히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안을 구상하고 돌아온 세자다.

소수의 수행만 거느리고 길도 제대로 없는 곳까지 때로 노숙을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세자를 세종이 반가히 맞이하였다.

문이 열리고 온몸이 땀으로 젖은 세자가 성큼성큼 들어와 엎드렸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임진강 하류에 홍수가 났다더니, 강물을 건너다 빠지기라도 했는지 융복 자락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전하, 함길도와 평안도 전역을 돌아보고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엎드려 절하는 등 뒤도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질주하는 말발굽에서 튀어 오른 진흙 덩어리가 그대로 달린 옷으로 문안을 든 무례한 세자를 물끄러미 보시던 세종은,

“가! 어서 가서, 윤서나 들여다보거라. 씻고, 소독하고. 그래야 산후병 안 걸린다니.”

하고 도로 이향을 내보내셨다.

이향은 한 번의 사양도 없이 그대로 천추전을 나왔다.

임진강 나루에서 윤서가 벌써 진통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은 이향은 파주 관아에서 저녁을 먹고 오기로 되어 있었던 일정을 변경하여 말만 갈아타고 그대로 한양으로 내달렸다.

호위 내관 천가가 “아이고, 저하. 달빛이 밝다곤 하나 그래도 밤길이옵니다. 제발 좀 천천히 달리시옵소서!” 애원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재촉해 달려오는 길 내내 이향은 윤서가 무사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 세자빈을 잃었다.

게다가 윤서는 처음으로 마음에 깊게 담은 여인이니 혹시 잘못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앞이 깜깜했다.

게다가 우리 홍위는 또.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이향은 전하를 뵐 땐 의관을 정제해야 한다는 예법마저 무시하고 그대로 천추전에 들었던 참이었다.

“윤서는, 어찌, 하고 있어?”

천추전을 나왔을 때 돌아오셨단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자치에게 이향이 물었다. 목소리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잘하고 계시니 심려 마오소서. 의녀 순덕이 출산을 도운 경험이 풍부하온데 한 번도 잘못된 경우가 없다 하옵고, 전순의와 다른 어의도 모두 대기하고 있습니다. 의술을 익히신 권 승휘 마마님도 곁을 지키시고요.”

“그래. 그래야지.”

“저하, 일단 씻으시지요. 홍 내관더러 목욕물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윤서가 혜민국을 맡은 후 출산 과정에서 ‘위생’의 개념이 극도로 중요해졌다.

출산하는 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모두 각종 식물을 발효하여 만든 술을 한 번 더 증류해 얻은 주정으로 소독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드나들 때마다 주정을 희석한 물에 손을 소독하게 하였다.

그 결과 산후 직후 감염으로 인해 열이 심하게 나면서 죽게 되는 산후병은 상당히 줄었다.

‘그래도 태반이 분리가 안 되어서 출혈이 심한 경우도 있다.’

윤서가 그 어떤 의원보다 출산에 대해 과학적으로 잘 알고 대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향은 끝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서두르라는 데도. 어째 이리 손이 굼뜬 게냐. 어허 참.”

긴장하면 더 손이 느려진다는 걸 알면서도 홍 내관을 마구 혼을 내면서 씻고 난 이향이 윤서의 거처로 향했다.

뜰에 들어서자,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뜰에는 전순의를 비롯한 내의원의 어의가 셋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세종께서 그만큼 윤서의 출산을 중히 여기시기 때문이었다.

“준비한 대로 잘 진행하고 있는 것이냐?”

“예, 아까 불수산을 준비해 드시게 하였고, 나삼도 달여 드시게 하고 있습니다. 의녀 말로 잘하고 계시다 하오니, 심려 마시옵······, 아니, 저하. 들어가시게요?”

답변을 올리던 전순의가 놀라서 예의도 잊고 저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여염에서도 산실에 남편이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러나 이향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산실로 들어갔다.

윤서는 마침 박 상궁의 팔을 짚고 걷다가 진통이 와 허리를 굽히고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저하! 아니, 저하!”

이향을 먼저 발견한 박 상궁이 놀라 부르짖고, 순덕을 비롯한 의녀들과 작은 권 승휘는 서둘러 엎드려 예를 표하였다.

“윤서야.”

그러나 이향의 눈에는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벅지를 짚은 채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윤서가 자신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며 환히 웃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윤서야.”

눈앞이 흐려질 정도의 통증이 이향의 목소리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리를 편 윤서의 눈에 대충 상투를 틀고 얇은 도포만 걸친 채 달려온 그리운 이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잠시, 다, 나가요.”

“마마님, 그것이.”

“나가, 요. 나, 저하, 하, 고 할, 이야, 기가, 있으니.”

“나가거라. 좀 있다가 다시 부를 터이니.”

이향이 명하자, 박 상궁까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저기, 함, 께, 앉, 아요.”

윤서는 고운 곡물가루로 속을 채운 등받이에 이향과 함께 기대앉았다.

이제 진통은 일 분 간격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곧 아이가 나올 것이다.

별일이 없을 것이다. 이 아이는 무사히 태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향. 나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 만, 사람, 이름.”

“윤서야!”

혹시라도 내가 잘 못 되면 이향. 우리 홍위를 위해서 나는 이 이름은 꼭 말하고 죽어야 해.

윤서는 이향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후 히히 후 히히, 연습한 대로 빠르게 뱉어내는 호흡 사이로 윤서는 재빨리 한 사람의 이름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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