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화. 유두(流頭)절의 출산 (1)
“건 승위! 더운데!”
옥색의 고운 세모시 위에 아청색 쾌자를 걸치고, 머리에 청색 건을 쓴 홍위가 윤서를 향해 달려왔다.
건춘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호군은 정오 무렵 공부를 마친 네 살의 어린 세손이 배불뚝이 승휘 마마님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매일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자선아, 안아져!”
윤서 앞에 선 홍위는 헐떡이며 뒤따라 달려온 내관 자선에게 안아서 윤서 얼굴에 가깝게 붙여 달라고 요구했다.
아이를 갖기 전에 윤서가 늘 홍위를 훌쩍 안아 올리면 홍위는 윤서 귀에 대고 그날 있었던 일을 소곤소곤 이야기하곤 하였다. 이제 배가 불러 윤서가 안아주지 못하자, 자선에게 들어달라고 해서 윤서 귀에 속삭이는 것이었다.
“오늘, 도언군이 왔떠요, 어먼니. 구해 줘더 감사하다고 맛씀드려 다래요.”
(오늘, 도원군이 왔어요, 어머니. 구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달래요.)
단오제에서 윤서가 홍위를 구해낸 후, 홍위는 듣는 귀가 없을 땐 윤서를 ‘어먼니’라 부르며 존대를 했다. 그리고 출산이 가까워올수록 윤서 곁에 꼭 붙어서 종알종알 이야기하거나 책을 읽거나 조립을 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홍위 나름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을 낳은 직후 돌아가신 친모처럼 윤서도 아이를 낳다가 잘못될까 봐 홍위는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아 윤서도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매일 홍위를 마중 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홍위가 오늘 귓속말로 ‘어머니’라 부르며 전하고 싶은 소식은 도원군이 세손 강서원에 다시 나온 일이었다.
단오제에서 홍 승휘에 밀려 물에 빠졌던 도원군은 그 충격으로 한 달 넘게 명례궁에서 정양을 하고 이제야 다시 세손 강서원에 나온 모양이었다.
윤서는 다시 땅에 내려선 홍위 손을 잡고 거처로 향하며 물었다.
“도원군은 괜찮던가요?”
“응, 어굴이 토시토시 해지고 착해졌져. 친저해졌어.”
(응, 얼굴이 토실토실 해지고 착해졌어. 친절해졌어.)
“역시, 큰일을 치르고 나니 사람이 달라지는군요. 어서 가요. 중전마마께서 얼음을 내려주셔서 방이 시원해요. 중비가 아기씨 드린다고 설탕 듬뿍 넣은 복분자 화채에 얼음 동동 띄워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설땅! 설땅! 마지겠다! 언능 가자. 언능.”
(설탕! 설탕! 맛있겠다! 얼른 가자, 얼른.)
설탕을 한 숟가락 넣은 산딸기 화채가 있단 소리에 신이 나서 깡총거리는 홍위의 손을 잡고 걸으며 윤서는 부쩍 달라졌다는 도원군과 명례궁 사람들과 수양 대군이 보내온 설탕과 서신을 생각했다.
도원군만 친절해진 것이 아니었다.
부부인 윤씨도, 그리고 수양 대군도 달라졌다.
도원군의 소식을 들은 수양 대군은 윤서에게 직접 감사의 서신을 보내왔다.
현재 유구국에 가 있는 수양 대군 일행은 사나흘에 한 번꼴로 한양에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유구국에서 방박량진(사쓰마)을 오가는 도조(시마즈) 가문 소유의 상선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수양 대군의 수하가 시마즈 가문의 지배를 받는 상인 소유의 상선을 타고 방박량진까지 온 후, 그곳에 정박해 있는 우리 측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와 동래 역참에 서신을 전한 후 다시 방박량진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동래 역참에서 받은 서신은 파발을 통해 그날로 한양에 전해졌다.
정음으로 쓰인 수양 대군의 서신은 윤서가 벌써 세자빈이라도 된 듯 사뭇 정중하고 깍듯하였다.
[여기 유구국에 오기까지 거친 파도에 며칠을 시달리면서 물의 두려움을 뼛속 깊게까지 느꼈습니다. 비록 한강의 수심이 바다에 비해 얕다고는 하나 발이 닿지 않을 때의 공포는 동일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물에 뛰어들어 고귀한 우리 세손의 목숨과 함께 나의 목숨과도 같은 도원군까지 구해내셨고, 숨까지 불어넣어 살려내셨다니.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멀리 있어 직접 감사의 말을 올리지 못하나, 이렇게라도 글로 아비 된 마음과 함께 약소한 선물을 보냅니다.]
수양 대군이 선물로 보내온 것은 남방의 상인에게서 사들였다는 귀한 설탕 가루 세 말과 울금(카레) 등의 동남아 향신료, 산호와 진주 등의 보석이었다.
그 설탕을 홍위가 무척 좋아하여 요새 얼음 띄운 화채에 듬뿍듬뿍 넣어 먹는 중이었다.
윤서는 사흘 전 세종께서 보여주신 수양 대군의 유구국 보고서도 떠올렸다.
[유구국 증산왕이 깃발을 여러 개 들고 음악을 울리며 마중 나와 전하께서 내리신 국서를 무릎 꿇고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습니다. 대접과 봉양이 진지하고 공손하며, 우리 조선국과 앞으로 긴밀하게 무역하고 소통하기를 소망한다고 거듭 말하였습니다. (중략)
이곳에 와서 보니 듣던 대로 유황은 천지에 널려 있고, 각궁의 재료로 쓰일 물소 뿔이 풍요롭습니다. 그리고 남방에서 온 상인들에게 듣기로는 저 멀리 천축국에는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하여, 소신 이곳에 정식 무역소를 세우고 물소 뿔과 유황, 초석을 대량으로 무역할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수양 대군은 전하와 세자 저하의 치세를 더욱 강성하게 할 물품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양 귀인에게 오는 한남군의 소식에서도 수양 대군이 헌신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만 적혀 있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도원군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게 되어서 정말로 마음을 달리 먹었을까? 수양 대군은 국제 무역의 거두가 되는 것을 자신의 ‘별’로 정한 것일까.’
중비가 내온 색 고운 화채를 맛있게 홀짝홀짝 먹는 홍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서는 곰곰이 멀리 있는 수양 대군의 마음을 짐작해보았다. 그러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추석 즈음 수양 대군이 돌아오면 우리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로 하였으니.’
기존에 수양 대군 측에 잠입한 이들이 정체를 들켰기 때문에, 윤서는 새로 사람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몸을 쓰는 이가 수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운종가의 도자전에서 일하던 자 하나를 투자 상인으로 넣기로 했다. 박 상궁에게서 장부 보는 법을 제대로 배운 총명한 상인으로, 수양 대군이 장차 하기로 한 무역 업무에 거액을 투자하는 이로 행세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 투자 대금은 윤서에게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명회는 순천 등지를 유랑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간 거제 등지에 있다가 순천 쪽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별다른 점은 없이 늘 그렇듯 기생들 끼고 호탕하게 놀면서 산천을 주유한다고 하는데요.”
물론 윤서는 이 보고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지역이 하필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거제에 머물기 전의 행적이 불명확하다. 그 전에 대마도를 거쳐 수양 대군을 만나고 오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윤서는 이참에 한명회 주변에도 사람을 심게 하였다.
유구국에서 돌아오기까지 수양 대군이 별다른 일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 따로 감시인을 파견하지 않고 한남군을 통해 동향을 파악하기로 한 참이었다.
도원군의 소식에서 시작하여 그간의 일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있는 윤서에게 화채 그릇을 싹 비운 홍위가 소곤소곤 물었다.
“어먼니, 오느 아바마마 오지지요?”
(어머니, 오늘 아바마마 오시지요?)
어머, 내 정신을 좀 봐. 우리 홍위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
‘어먼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몽글한 것이 간질간질 피어나는 느낌이 드는 윤서는 홍위를 꼭 껴안고 말하였다.
“네. 내일이 유두(流頭)절이라서 종묘에 천신을 올려야 한대요. 그래서 오늘 오신다고 연통이 왔어요. 우리 아기씨도 내일 아바마마랑 함께 제를 올릴 것이에요.”
며칠 전에 비가 와서 임진강 물이 많이 불어 걱정이라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오늘 밤에 돌아온다는 파발이 와 있으니, 둥그렇게 뜬 달빛을 길잡이 삼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홍위를 바싹 끌어안는데, 아흑, 강렬한 통증이 배를 엄습하고 사라졌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통증이었다.
“조 상궁!”
윤서는 입을 살짝 벌려 심호흡을 한 후, 평온한 목소리로 조 상궁을 불렀다.
조 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덕이를 불러주게.”
윤서의 말에 조 상궁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호, 혹시?”
“응, 소란 떨지 말고. 차분하게.”
“예, 당장 불러오고, 권 승휘와 전 주부에게도 연통을 넣겠습니다.”
“응, 아지도 불러주시게.”
윤서는 홍위의 유모인 아지 이씨 부인도 불러오도록 부탁했다.
조 상궁이 나간 후, 윤서는 홍위의 손을 꼭 잡았다.
“아기씨.”
“응?”
“오늘 밤이나 내일, 아기씨는 동생을 맞이하게 될 거에요.”
“아기!”
큰 소리로 말하며 홍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크게 뜬 눈동자에는 어쩔 수 없이 공포가, ‘거가 나잉’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스며 있었다. 그렇지만 홍위는 세손인지라 그 공포와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얼굴만 하얗게 핏기를 잃었다.
윤서는 아이의 두려움에 가슴이 저몄다.
“아기씨. 자선당에 가서 아지랑 기다리시면, 나중에 아기가 응애응애 울고 있을 것이에요. 처음 태어나면 빨갛고 쭈글쭈글 하다니까 못 생겼다고 놀리면 안 돼요.”
윤서가 말하자 홍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논녀. 아가는 에쁘니까. 그럿지만,”
(안 놀려. 아가는 예쁘니까. 그렇지만,)
‘거가 나잉이 죽을까 봐 무섭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홍위가 울먹거렸다.
윤서는 아픈 마음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사실은 자신도 의료 시설이 변변치 않은 조선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무섭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부러 밝은 목소리로 홍위를 달랬다.
“아기씨, 혜민국에서 온 의녀 순덕이가 아주 경험이 많아요. 주정을 끓여 소독하는 법, 팔팔 끓여 세균을 제거한 물을 이용하는 법 등을 잘 알고 있고, 또 제가 운동도 열심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되면 우리 금똥이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해 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문이 열리고 아지 이씨가 들어왔다.
“드디어, 소식이 왔다고?”
“예, 우리 아기씨 좀.”
“아기씨, 저랑 같이 자선당에 건너가요. 가서 이야기 책 읽으면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지가 손을 내밀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홍위가 일어났다.
아지의 손을 잡고 나가려던 홍위는 문가에서 다시 몸을 돌려 윤서에게로 왔다. 윤서의 머리를 힘껏 껴안은 홍위가 귀에 속삭였다.
“어먼니, 꼭, 무다하져야 해요. 꼭, 무다하져요.”
(어머니, 꼭, 무사하셔야 해요. 꼭, 무사하셔요.)
그 순간 다시 무시무시한 통증이 윤서를 엄습했다.
윤서는 이를 악물어 신음을 참은 후, 가까스로 평온한 목소리로 홍위에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꼭 무사할 것이니까, 군주 자가랑 몽몽이랑 재미있게 놀고 밥 잘 먹고 코 잘 자면서 기다리세요.”
“네, 어먼니.”
홍위가 나가고 난 후 본격적인 출산 준비가 시작되었다.
윤서는 짚을 깔고 그 위에 기름종이를 깔아둔 건넌방으로 넘어갔다.
전순의와 함께 작은 권 승휘도 왔다.
전순의는 밖에서 대기할 것이고, 의술을 본격적으로 익힌 작은 권 승휘가 순덕이와 함께 출산을 도울 것이다.
해가 질 무렵, 본격적으로 진통이 시작되었다.
윤서는 너무 아파서,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서 끙끙거리면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