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6화. 수양 대군과 윤씨의 변곡점
“얘야, 아이고, 아가야!”
뜻밖에도 부부인 윤씨보다 먼저 모습을 보인 이는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 윤씨였다.
홍 승휘의 예정된 죽음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수양 대군의 부인 부부인 윤씨가 사촌 언니인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를 앞세워 들어온 것이었다.
“어, 어머니!”
놀란 홍 승휘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윤서는 재빨리 홍 승휘의 귀에 속삭였다.
“선택해. 네 목숨이야 아니면 가문이야?”
“무, 뭐라고?”
“모르겠어? 네 어머니와 이모는 네가 승휘로 복권된 채 죽어주길 원하는 것을!”
“뭐?!”
“부부인 윤씨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언제든지 증언할 수 있는 네가 당연히 죽어 없어지길 원할 것이고, 네 어머니는?”
“내, 어머니는?”
약물과 중금속 중독의 영향으로 흐려진 뇌를 총가동하여 윤서의 말을 이해해보고자 홍 승휘는 눈알을 굴려대었다. 창백한 얼굴에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은 기괴하고, 그래서 안타깝기조차 하였다.
“아가야, 아가야!”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가 버선발로 엎어질 듯 방 안으로 들어와 허공을 바라보며 정신 나간 듯 “설마, 아니야, 설마! 우리, 그, 금아는!” 중얼거리고 있는 딸을 껴안았다.
“가자, 집으로 가자. 하아, 가여운 것. 가여운 것.”
“집으로?”
“그래, 가자. 흐흑, 가자. 가서 몸조리 잘하고,”
“몸조리를? 잘, 하면요?”
그럼 자연스럽게 병사를 해야 하는 내 운명이 바뀌나요?
텅 빈 눈빛으로 홍 승휘가 어머니께 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 어머니는, 왜.
그렇지만 안개 낀 듯 뿌연 머릿속에서도 어릴 적부터 숨 쉬듯 몸에 익힌 가문 내의 역할과 그 안에서 어머니의 애매한 처지를 파악했다.
남양 홍씨 자체는 명문가이지만 홍 승휘의 증조부는 여러 구설수로 파직을 당했고 조부와 부친은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다른 자식을 위해서라도 친정인 윤씨 가문의 후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겉으로는 공을 세워 ‘승휘’로 복권된 딸이 필요하다는 것을, 홍 승휘는 권 승휘의 일갈을 통해 쓰리게 이해했다.
홍 상궁이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는 것을 본 윤서는 매금이를 불렀다.
“매금아.”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그리하여 존엄한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홍 승휘가 가문을 위해 이대로 죽고자 한다면 그 선택을 존중할 작정으로 윤서는 매금이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는데 무엇인가에 치맛자락이 걸렸다. 돌아보니 홍 승휘가 손을 와들와들 떨면서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홍 승휘가 고개를 흔들었다.
“가지 마. 가지 마, 권 승휘. 내가, 내가, 우리 금아를 위해, 부탁할 것이 있었잖아.”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홍씨의 친정어머니에게 말했다.
“부인, 홍 승휘가 그간 받은 재산 관련하여 정리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먼저 돌아가시지요.”
“기다리겠네.”
뭐라 말을 못 하는 홍씨의 친정어머니 대신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방에 들어온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였다.
“우리 조카님이 아프지 않으신가? 살펴 데려가려고 들어온 것이네. 그 정도 편의는 봐주어도 되지 않는가? 아무리, 아무리, 흐흠.”
죄를 지은 몸이라고 하여도 말이지.
뒷말을 삼키며 부부인 윤씨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 조카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해 그리한 것이니 봐주겠다는 듯, 가엾다는 듯 눈에 눈물까지 가득 담은 이모의 모습이었다.
“!”
정말로 대단한 연기력이라고 감탄하던 윤서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놀라 매금이의 손을 꽉 쥐었다.
‘윤씨는 벌써 기억을 왜곡하였고, 그 거짓 기억을 진실이라 확신하고 있다!’
일관된 지각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뇌는 정보의 빈틈을 경험에 근거한 추측으로 메꾼다. 이 과정에서 자기애가 강한 인간일수록 스스로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해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간 스스로 조작된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가짜 기억의 조각을 주입한 후 진짜 기억처럼 만들어 내도록 한 심리 실험은 여러 책에 실려 있다.
어릴 적 백화점에서 일어났던 소동 한 조각을 거짓으로 주고, 일정 기간 눈을 감고 그 사건을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시키는 실험이 있었다.
‘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 기법이라고 불리는 이 실험을 통해 피실험자 중 한 사람은 마침내,
“하늘이 파랗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날, 나는 CD를 한 장 훔쳤어요. 그 때 조사를 하러 온 경찰은 갈색 머리였어요.”
하는 상세하고도 온전한 거짓 기억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증언한 실험이 있었다.
성공한 이들도 이처럼 스스로 인지 왜곡을 한다. 불리하기만 한 현실에서 성공할 수 있는 희귀 요소만 찾아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그를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헌신해 마침내 정말로 기적같은 성공을 이뤄내고야 만다.
윤씨도, 수양 대군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홍위가 태어나기 전의 세월 동안 세제(世弟)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장차 보위에 오를 미래를 위해 은밀히 준비하는 집념의 세월 동안 윤씨는 자신이 건넨 ‘임신 방해 약물’을 이제 와 진짜 보약이었다고 스스로를 속여 믿는 경지에 이르른 것이었다.
이렇게 강한 집념이 있었기에 무수히 많은 이들의 피를 딛고 기어코 용상을 걸머쥔 것이다!
“부부인!”
윤서는 매금이의 손을 놓고 윤씨에게 다가섰다.
“부부인!”
“왜, 왜 이러시는가!”
큰 키에 배까지 불쑥 튀어나온 윤서가 싸늘히 눈을 빛내며 다가서자 윤씨가 흠칫 몸을 굳히며 한발 물러섰다.
윤서는 그만큼 더 다가서서 윤씨의 손을 꽉 잡았다. 너무 강한 악력이라 윤씨가 헉 소리를 내며 이마를 찡그렸지만, 윤서는 윤씨의 손이 으스러져라 더욱 힘을 주었다.
고통과 함께 몸에 새겨진 기억은 어지간해서는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도원군의 목숨을 구한 것, 고마우십니까?”
“무, 물론이지. 물론일세. 내 하도 고마워서 은자 한 상자를,”
평소 누구에게도 주눅 들어본 적 없는 윤씨였지만, 전생까지 꿰뚫어 볼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권 승휘가 두려웠다. 게다가 잡힌 손은 얼얼하다 못해 부러질 듯 통증이 일었다.
“이거 좀 놓고 이야기하세!”
윤씨는 권 승휘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만삭의 여인, 그것도 세자의 총애를 받아 해산 후 세자빈이 될 것의 거의 확실한 여인을 밀쳤다간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몰라 윤씨는 마음처럼 세게 밀치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거렸다.
운동이라고는 숨 쉬는 것이 거의인 여인의 꼼지락쯤이야.
원체도 힘이 센 몸에 임신을 하고도 하루 두 시간은 걷거나 수영을 하며 출산에 대비해온 윤서는 윤씨의 입에서 “으으으으” 거친 신음이 터져 나올 때까지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놓고 말하래도! 손 뼈 다 부러뜨릴 셈이신가?”
참다못한 윤씨가 빽 고함을 쳤다.
그와 함께 그림자처럼 늘 윤씨를 따라다니는 조 전언이 “승휘 마마님, 결례가,” 말하며 윤서의 팔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안 뻗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매금이가 냅다 조 전언의 팔을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조 전언은 엌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권 승휘 마마님, 왜 이러십니까?”
난데없는 활극에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 윤씨가 울상을 지으며 윤서를 향해 사촌 동생의 손을 그만 놓아주라고 애원했다.
홍 승휘만 통쾌해서 손뼉을 치며 웃었다.
윤서는 홍 승휘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시끄러우니 그만 웃으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윤서는 손아귀의 힘을 조금 늦추고 윤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 자 한 자 끊어 천천히 말했다.
“도원군을 볼 때마다, 저를 볼 때마다, 오늘을 떠올리세요. 제가 그때 구하지 않았다면, 부부인 마님의 아들이, 죽었을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기억하겠네. 기억하겠어. 내 어찌 그 은혜를 잊는단 말인가?”
“잊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도 까맣게 잊고 반대로 기억하시는 분이시니 저에 대한 고마움도 쉽게 잊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윤서는 다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아앗, 이 사람이, 진짜!”
“아이고, 권 승휘 마마님. 어째 이러십니까?”
“마마님, 마마님, 제발 손을 놓고 말씀하시지요.”
두 윤씨 부인과 조 전언의 애원에도 아랑곳없이 윤서는 부부인 윤씨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귀하게만 살아오셨으니 이 아픔은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도모하실 땐, 이 아픔을 기억하세요.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고마움을 잊으시고 일을 벌이실 땐, 이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말을 마친 윤서는 손을 놓았다.
“자네! 자네! 이토록 오만방자하게!”
윤씨는 벌게진 얼굴로 험악하게 윤서를 노려보았다. 손등은 벌써 윤서의 손 모양대로 벌건 자국이 생겼다. 곧 퍼렇게 멍이 들 것이다.
그러나 윤서는 여유 있게 웃었다.
“은자 받는 대신 이리한 것이니 양해하시지요, 부부인 마님. 그리고 두 분은 그만 돌아가세요. 홍 승휘는 동궁의 여인이니 여염의 부인들이 마중을 오고 말고 할 위치가 아닙니다.”
안 나가면 사람을 시켜 끌어낼 모양으로 말하자, 부부인 윤씨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치욕스러운 홀대를 참기가 고통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윤씨는 또한 그만큼 집념이 강한 이였다. 몸을 던져 세손과 도원군, 두 명의 왕손을 구해낸 공이 큰 이를 상태로 분노를 표하면 손해만 볼 것이란 사실을 애써 상기할 만큼. 그리고 이렇게 불리한 입장에서는 ‘순종하라!’ 했던 남편 수양 대군의 말을 애써 떠올릴 만큼.
“자네 말씀이 옳으이. 내 조카 걱정되는 마음에 언니와 함께 들어왔는데 생각이 짧았구먼. 내, 언니와 함께 돌아가 기다리겠네.”
그래도 반드시 홍 승휘가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하겠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윤서가 홍 승휘를 살려두어 훗날에 대비하고자 한다는 것을 빤히 짐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말이었다.
“어, 어머니!”
홍 승휘가 놀라 친정어머니를 불렀다.
“홍 승휘!”
윤서는 엄한 어조로 홍 승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돌아가세요. 돌아가셔서, 왕손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다가 가슴뼈가 부러진 딸을 위해 뼈를 강하게 할 약재를 준비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동생, 가십시다. 돌아가서 기다립시다.”
윤서의 어조에서 강한 경고를 읽은 홍 승휘의 어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윤서는 마지막으로 부부인 윤씨에게 경고를 했다.
“변곡점이라고 아십니까? 힘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을 변곡점이라고 합니다, 부부인 마님. 귀하신 왕손인 도원군의 목숨을 구한 것이 우리 관계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전 믿습니다. 이 변곡점에서 부부인께서 어느 방향을 선택하시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 달리기 시작할 테니까요. 저는 우리 관계가 부디 서로 감사를 잊지 않는 관계이길 바랍니다.”
“···과연, 아는 것이 많아 전하의 총애를 받는 사람답게 유장한 말이로군.”
그 말을 남기고 윤씨는 쌩하니 나가 버렸다.
“어쩌려고?”
홍 승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광평 대군이 개입해 있잖아. 수양 대군을 위해 덮으셨으니, 광평 대군을 위해서도 덮으시겠지.”
박 상궁의 조직을 이용할 수도 있었던 일에 굳이 광평 대군을 끌어들인 이유였다.
세자와 광평 대군이 관계되어 있으니, 전하 내외께서 홍 승휘가 중간에 사라진 것을 아시더라도 모른 체 덮고 마시리라는 것을.
그리고 수양 대군과 윤씨는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증언할 이가 어디선가 여전히 숨 쉬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역사에 기록된 그 일을 저지르고자 할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리라는 것을.
그리고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 윤씨가 속한 전체 윤씨 가문에서, 마찬가지로 윤씨 가문의 일족인 수양 대군 부인 윤씨가 무엇인가 미심쩍은 일을 저질렀다는 의심을 하게 되면,
그러면 앞으로 부부인 윤씨가 무엇인가를 함께 도모하고자 할 때 그 인간 됨됨이에 대해 한 번 더 짚어보게 되리라는 것을.
이 모두를 위해 윤서는 우리 홍위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것에 죽음으로 죄를 묻고 싶은 홍 승휘를 살려두기로 결심한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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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손 각하! 여기요!”
이제 정말 예정일이 열흘도 남지 않은 날.
윤서는 건춘문 앞에 서서 세손 강서원에서 돌아오는 홍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