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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05화 (105/255)

제 105화. 홍 상궁을 보내는 방식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월 스무날.

출산 예정일이 한 달가량 남았기에 광평 대군이 해산을 도울 혜민국 의녀들을 데리고 윤서의 거처를 찾았다.

“의녀 중 순덕이와 곱단이가 가장 유능하고 대가댁 해산을 책임지고 주관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중 순덕이가 더 침착하여 평소 손발을 맞추던 의녀 다섯을 더 데리고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순덕아, 인사 올리거라, 권 승휘 마마님이시다.”

광평 대군의 말에 순덕이와 다섯 의녀가 절을 올렸다.

“잘 부탁하네.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저쪽에 거처를 정하고,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면 될 것이야. 조 상궁, 거처를 안내해 주시게.”

“예, 마마님.”

조 상궁이 혜민국의 의녀인 순덕 일행을 데리고 나갔다. 방문을 나서던 의녀 하나가 잠깐 뒤를 돌아보며 광평 대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평 대군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입니까?”

“예, 저 아이가 대신할 것입니다.”

“좋아요. 한 시진 후 애오개에서.”

“예. 거기서 오대산 암자까지 내처 내달릴 것이니, 형수님은 걱정 마옵소서. 모두 말 못 하는 이들만 있는 암자인지라 말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과 형수님 일인데요. 게다가 우리 안사람도 곧 해산이지 않습니까? 중대한 일을 앞두고 죄수도 풀어주는데, 하물며.”

윤서는 수려한 광평 대군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올해 광평 대군은 두창(천연두)으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막고자, 그래서 운명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자 만날 때마다 광평 대군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게 된다.

이향의 몸 구석구석을 사흘에 한 번은 빈틈없이 살피는 것처럼.

“말을 이용해서 두창을 예방하는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의원들 대상으로 세 번에 걸쳐 실험하였는데 이번 3차까지 동일하게 약간만 앓고 넘어갔습니다. 한번 앓으면 다시 앓지 않고요. 그래서 지금 경기의 말 목장마다 고름 딱지를 모아오도록 사람을 보냈고, 형님께서도 그쪽 고원과 여진족의 말 목장에서 모아오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곧 충분히 모이고 나면 아이들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예, 이번에 모아오면 대군 자가부터 접종하기로 한 거, 꼭 하셔야 합니다, 꼭!”

윤서가 진지하게 부탁하자 광평 대군이 “아이고, 형수님. 알았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하며 너털 웃었다.

웃는 모습이 큰형인 이향과 닮아서, 윤서는 벌써 떠난 지 이십 일이 다 되어가는 이향이 불현듯 몹시 그리웠다.

윤서가 눈시울을 붉히자 광평 대군이 위로했다.

“형수님. 모든 것이 다 잘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저 마음 편히 계십시오.”

그리 말하고 광평 대군도 물러갔다.

“매금아!”

윤서는 매금이를 불러서 몸을 일으켜 달라고 한 다음, 조 상궁과 함께 유 승휘의 거처로 향했다.

유 승휘는 시원하게 바람이 통하는 대청마루에 앉아 금아에게 <햇님 달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흥,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가 말했어요. 떡 장수 아주머니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조청 꿀 떡 하나를 호랑이에게 줄 수밖에 없었답니다.”

“조청 꾸 떡 먹고 짚어.”

(조청 꿀 떡 먹고 싶어.)

“꿀 떡 드시고 싶으세요? 여봐라, 꿀떡이랑 감 식혜를 내오너라.”

홍 상궁, 아니 공식적으로 세손과 도원군을 구하려 물에 뛰어든 공으로 다시 승휘로 복권된 후 지병으로 오늘 사가로 돌아가 요양하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기로 예정되어 있는 홍 승휘의 딸 금아는 유 승휘가 맡아서 기르기로 결정되었다. 유 승휘가 금아를 친딸처럼 기르고 싶다고 중전마마께 간곡히 청했기 때문이다.

윤서는 유 승휘에게 탕약과 더불어 중금속을 해독하는 데 탁월한 채소와 과일, 미역을 많이 먹이도록 했고, 그래서 금아는 전보다 훨씬 피부도 깨끗해지고 발음도 좋아지고 있었다.

또 신경질적이고 기분이 급변하는 친모 홍 승휘와 달리 매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몸으로 기발하게 놀아주는 유 승휘와 지내면서 주눅 들어 눈치 보는 것도 많이 줄었다.

“그래도 친어미만 하겠소? 가끔 자다가 ‘옴마’ 부르며 우는데 마음이 아주 짠하오.”

유 승휘가 이따금 금아가 안쓰럽다면서 하는 말이었다.

“금아 현주님!”

뜰에 들어선 윤서가 부르자, 유 승휘가 먼저 몸을 화다닥 일으키며 물었다.

“지금이오?”

“예, 작별 인사는 하게 해드려야지요.”

“하아. 이거 참. 하아.”

유 승휘가 어쩔 줄 모르며 금아에게 팔을 뻗었다.

“아기씨, 이리 오세요.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가요.”

“오머니?”

금아의 얼굴이 환해지다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배, 아파.”

금아가 아프면 늘 찾아와 살피는 이향을 보기 위해서 홍 승휘는 찬 성분의 매실액에 피부에 좋지만 과량 복용할 때 복통을 유발하는 포공영을 달여 먹였다고 하였다. 유 승휘와 이십 여일 지내면서 배가 아프지 않자 금아가 엄마가 보고 싶으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그거, 아기씨 피부 좋아지라고 어머니가 먹인 약이에요. 덕분에 이렇게 피부가 깨끗해진걸요.”

윤서의 육아서를 읽은 후 아이들에겐 안전한 애정을 깨우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배워둔 유 승휘가 거짓말로 금아를 달래며 안고 일어섰다.

후유.

옅은 한숨을 내쉬고 윤서는 앞장서 홍 승휘의 거처로 향했다.

거의 모든 짐이 사가로 옮겨지고 궐에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유모만 곁을 지키고 있는 홍 승휘의 거처는 썰렁했다.

윤서와 금아를 안은 유 승휘가 들어설 때 홍 승휘는 마침 뜰을 향해 난 문을 활짝 열고 보료에 기대 화단에 핀 작약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아야!”

이십 일 가까이 보지 못했던 딸을 반갑게 부르며 몸을 일으키려던 홍 승휘는, 그러나 가슴뼈의 통증 때문에 다시 자리에 앉으며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 이런 꼴 보이고 싶지 않아.”

“홍 승휘!”

윤서가 엄하게 불러도 홍 승휘는 여전히 고개를 돌려 금아를 외면했다.

“나중에, 나중에 좋은 기억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도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 홍 승휘.”

윤서가 타이르자 홍 승휘는 고개를 팽 돌려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너는 언제나 그렇게 착한 척이지! 하!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홍 승휘가 발작적으로 화를 내자 겁을 먹은 금아가 “으아앙, 오머니”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저거, 진짜, 어미가 되어서, 끝까지!”

유 승휘가 벌컥 화를 내며 신발을 신은 채로 대청마루를 올라 홍 승휘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권 승휘의 말씀 못 들었소? 이제라도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을 좀 하시오. 이리 가엾게 두지 말고.”

그렇게 혼을 내며 유 승휘가 금아를 홍 승휘의 품에 억지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허튼짓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홍 승휘를 내려다보았다.

막상 금아를 품에 안자 홍 승휘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금아의 등을 쓸었다. 그리고 아주 다정하게 속삭였다.

“금아야. 엄마는 몸이 많이 아파서 외할머니 댁으로 가 치료해야 한단다. 우리 금아, 유 승휘 어머님 말씀 잘 듣고, 씩씩하게 잘 커야 해.”

“응, 오머니. 언제, 와?”

“언제? 우리 금아가 다 크면. 어여쁘게 다 커서 좋은 낭군, 우리 금아만 사랑해주는 좋은 낭군님 만나면, 그럼, 엄마가.”

홍 승휘는 용케 울음을 참는데, 유 승휘가 울컥, “흐흑”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함께 거할 땐 그토록 서로 미워했어도 결국 같은 처지였다는 서글픈 연민이었다.

“유모, 그거.”

홍 승휘가 구석에 앉아 옷고름으로 눈을 훔치고 있는 머리 허연 유모를 불렀다. 그러자 유모가 곁에 놓인 자개함을 가지고 왔다.

유 승휘가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두 단으로 된 자개함을 금아에게 열어 보였다.

“금아야. 이거 엄마가 그간 모은 패물이랑, 그리고 이 밑에 칸에는 궐에 들어와 받은 땅과 노비 문서다. 이 재산 문서는 권 승휘 어머니가 잘 불려줄 거야. 그렇게 불린 재산이면 너 머리가 어설프다고,”

홍 승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꾹 깨물고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자꾸 터지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금아 너, 머리가 어설프다고, 네 낭군이든 누구든 무시하지 못할 거다. 유 승휘, 들었지? 나중에, 금아 혼인할 때, 이 문서 권 승휘한테 달래서 금아한테 꼭 챙겨 줘.”

“하나만 하소. 원망만 하든지, 고마워만 하든지!”

유 승휘가 팽 화를 냈다.

홍 승휘는 아랑곳없이 금아에게 또 말했다.

“너 속상하게 하는 이 있으면, 아바마마한테 일러. 네 아버지는, 마음이 따스한 분이라, 너 속상한 거, 그냥 두지 않으실 거다.”

“응, 오머니. 아밤마아, 죠아요.”

“그래, 이제 유 승휘 어머니랑 돌아가. 엄마는 권 승휘 어머니랑 할 말이 있어. 우리, 금아, 잘, 커야 한다. 두 분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약 잘 먹고, 응?”

“응, 오머니. 빤니 와요.”

(응, 어머니, 빨리 와요.)

홍 승휘 품에서 풀려난 금아가 유 승휘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유 승휘가 금아를 받아 안고 홍 승휘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홍 승휘가 이제껏 참았던 가슴 통증을 끙끙거리는 소리로 풀어놓고는 두 손으로 가슴뼈를 누르며 허리를 굽혔다.

“잘 부탁하오, 유 승휘. 잘 부탁하오.”

“몸이나 일으켜요. 겨우 붙은 가슴뼈 도로 떨어지겠네. 죽을 때 죽더라도 덜 아프고 죽어야지!”

유 승휘는 벌컥 화를 내고 금아를 안고 휭 나가버렸다.

홍 승휘는 유 승휘가 대청 마루를 내려서 뜰을 지나 대문을 나갈 때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금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마가, 왔어?”

사가에서 자신을 데리고 갈 가마가 왔냐는 소리였다.

궐에서는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와 직계 왕손만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홍 승휘는 병을 핑계로 사가에 나가 죽어야 한다. 그렇게 홍 승휘는 알고 있었다.

“왔어. 좀 있다가 혜민국의 의녀가 와서 가슴을 더 단단하게 동여매 줄 거야. 가마가 흔들릴 때 겨우 붙은 뼈 도로 떨어지지 말라고.”

“죽는 마당에 그까짓 뼈 따위.”

“조 상궁!‘

그러자 밖에 서 있던 조 상궁이 주변을 살피고 윤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귀가 없단 뜻이었다.

윤서는 매금이의 부축을 받아 홍 승휘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홍 승휘. 본가로 가다가 애오개에서 가슴뼈가 너무 아프다고 울어야 해. 그러면 좀 있다 와서 붕대를 매준 의녀가 밖에서 무슨 일이냐고, 잠시 내려보시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부축을 받아 내려서,”

“싫어!”

“무슨 말인 줄 알고 싫다는 거야?”

홍 승휘가 비웃었다.

“내가 네 수작 모를 줄 알고! 너, 착한 척하려고 나 빼돌리려는 거지. 나중에 저하한테 네가 그렇게 착하다고 보여주려고. 생색내려고. 네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내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하께서 보내는 거야.”

윤서가 조용히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홍 승휘의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커졌다.

“···뭐?”

“그래도 자식을 낳은 여인인데 죽게 둘 수 없다고, 저하께서 내게 부탁하고 가셨어.”

“정,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멀리 가서 금아 위해 기도하면서, 살아. 살아서.”

“하, 하지만 탄로 나면 우리 금아도, 우리 어, 어머니도.”

“탄로 날 리 없지만, 탄로가 난다 해도 전하나 중전마마께선 모른 체 하실 거야. 세자 저하의 뜻이니까.”

전하 내외께선 둘째 아들과 손주의 앞날을 위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을 덮으셨다. 왕권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은 먼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명실상부 군주의 위용을 갖추고 당당하게 조정을 이끄는 세자 이향은 이 일을 이대로 묻히게 놓아두어서는 아니 된다고, 윤서는 생각했다.

이향이 보위에 올랐을 때를 위해서라도, 우리 홍위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모든 계산을 떠나 인간으로서도.

이제 힘을 잃은 여인에게 도원군을 죽이려 한 책임은 폐서인하여 출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윤서는 생각했다.

“너는, 왜?”

세자 저하야 그렇다 치고 너는, 너는 왜?

홍 승휘가 물었다.

윤서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몸 섞어 아이까지 낳은 여인을 죽게 놓아두는 사내를, 제 아이의 어미를 구하지 않는 아비를, 어떻게 남편으로 믿고 살겠어, 홍 승휘.”

“너! 너는, 대체!”

홍 승휘가 눈을 크게 뜨고 윤서를 보며 입을 벙싯거릴 때였다.

“명례궁 부부인 마님 오셨습니다!”

뜰에서 조 상궁이 크게 소리쳤다.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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