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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03화 (103/255)

제 103화. 홍 상궁과 수양 대군 부인 (2)

“그간 홍 상궁을 위해 지었던 탕약의 처방전과, 그에 해당하는 약재란 말씀이지요? 처음 입궁했을 시기부터 다 모은 처방전.”

“그래! 그러하네. 왕가의 후손을 낳을 몸이 아니었는가. 체질도 변하니 그에 맞춰 처방도, 약재도 변해야 한다기에 계속 참고하도록 보관하라 일러둔 것이야.”

“참으로 꼼꼼하게도 위하셨군요.”

윤서가 빈정거렸지만, 부부인 윤씨는 못 알아들은 척 오히려 눈물까지 글썽이며 맞장구를 쳤다.

“꼼꼼해야지. 왕손에 관계된 일에 내 어찌 추호의 허술함이 있었겠는가.”

강적이었다.

윤씨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간의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치밀한 모략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손쉽게 중전마마의 선량한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래, 잘했구나.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풀고 가야 맞다. 윤서야. 네가 이 약재와 처방서를 가져다 홍 상궁에게 보이고 그대로 맞는지, 추가되거나 빠진 약재가 있는지 묻거라. 최 상궁, 이것들을 다시 빠짐없이 챙겨 우리 권 승휘에게 주거라.”

“예, 중전마마.”

최 상궁이 허리를 굽히고 다가와 보따리를 도로 솜씨 좋게 포장하였다.

“!”

윤서가 주관해 처방전과 약재를 면밀히 확인하란 중전마마의 말씀이 내리자 윤씨의 눈에 일순 한기가 스쳤다. 그러나 윤씨는 이내 숨을 훅 들이마시며 쿵 떨어진 심장의 박동을 되돌리고 재빨리 맞은편의 권 승휘에게 두 손을 모아 조아렸다.

“부디 잘 살펴주시게, 권 승휘. 도원군의 목숨을 구해준 것처럼, 이 배은망덕한 추문에서 나 또한 구해줄 거라 믿네.”

“!”

배은망덕이라니!

최고 권력을 향해 강한 집념을 품은 인간은 이렇게까지 뻔뻔해지는가. 호기심마저 느끼며 윤서는 시선을 들어 윤씨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윤씨의 갈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홍 상궁이 윤씨의 절반이라도, 아니 절반의 또 절반만큼이라도 치밀했다면 윤씨의 수작질을 쉬이 밝혀낼 수 있을 터인데.’

한탄하며 윤서는 많은 경우의 수를 셈하였다.

약재에 손을 쓸 방법은 많았다.

진실로 저 처방전에 저 약재 그대로였다고 하더라도 넘겨지는 과정에서 슬쩍 다른 약재를 더 섞을 수도 있었고, 처음부터 약재를 무색무취의 유해 성분에 담갔다가 건네주는 방법도 있을 수 있었다.

“중전마마.”

속내를 꿰뚫듯 빤히 바라보는 윤서가 두려웠는지 윤씨는 갑자기 일어나 두 손을 이마에 겹쳐 모으고 중전마마께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엎드려 “흐흑” 울음을 터트리며 애절하게 고하였다.

“우리 도원군이 큰일을 겪고 나니, 어마마마, 자식이 무사한 것 외에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세손 각하께서 무사하신 것도, 또 우리 도원군이 무사한 것도, 으흑, 모두 전하와 중전마마께서 크나큰 덕을 쌓으신 덕분입니다.”

윤씨가 애절하게 우니 반신반의하시던 중전마마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뭐니 뭐니 해도 중전마마와 윤씨 사이에는 그간 쌓인 세월의 정이 있었다.

추문을 일으켜 줄줄이 폐서인 되는 이향의 못난 부인들과 달리 영민하고 효심 깊게 전하와 중전을 모시며 귀한 첫 손주를 턱 낳아 바친 애정의 세월이 두 사람 사이에 분명히 있었다.

윤씨는 그 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소첩, 전하와 중전마마의 은덕과 우리 권 승휘의 크나큰 은혜를 눈물로 고하는 서신을 단오제 밤에 당장 파발로 대군 자가께도 보내었습니다. 지금 그, 박, 박량진에 머무시다 유구국을 향해 출항해 거친 바다를 헤쳐가고 있을 자가께서야 한참 있다가 이 소식을 알게 되겠지만, 얼마나 기뻐하며 감읍할지요.”

“오, 유에게도 사람을 보내었느냐? 잘했다. 잘했어.”

매일 마음 졸이며 안위를 걱정하는 수양 대군까지 윤씨 입에서 나오자 드디어 중전마마께서도 비단 당의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시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그래, 그래. 우리 손주가 잘못되었으면 유가 그 먼 곳에서 그 마음이 어떠하였겠느냐.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아이고, 우리 유가 무사히 돌아올 것이니 너도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의연하게 기도하거라.”

하아.

오늘에서야 왜 세종께서 수양 대군을 크게 경계하지 않으셨는지, 이향이 왜 수양 대군을 미리 제거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수양 대군 부부는 용의주도하게 야망을 숨길 줄 알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회를 기다릴 줄도 알았다.

‘이번 일은 홍 상궁만 처벌되는 것으로 종결될 수 있다!’

너무 오래 전 일에 홍 상궁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전무하다. 윤씨의 태도로 보건대 관련된 이들은 벌써 다 제거하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중전마마께서 무의식적으로 이 일이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신다. 과거 친정의 멸문을 겪은 공포를 다시 되풀이 겪고 싶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부부인 마님.”

그래도 확실하게 경고를 해 두어야지.

윤서는 중전마마와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윤씨를 불렀다.

“부부인께서 성의로 하신 일에 이리 곡해를 당하시어 상심하셨으니 저도 또한 마음이 아픕니다. 중전마마께서 상세히 살피라 명하셨으니 제가 홍 상궁에게 뭔가 착각한 것이 아닌지 다시 살피라 하고, 또 여러 어의에게도 처방전과 약재를 보여 교차 검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어의에게까지 교차 검증하겠다는 윤서의 말에 윤씨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윤씨는 눈 한 번 깜빡하는 새 다시 흐흑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말하였다.

“부디 그래 주시게. 흐흑, 우리 도원군을 생각하면 당장 홍 상궁을 어떻게 하고 싶네. 하지만 홍 상궁은 내 조카가 아닌가.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그 신경독인지 하는 것이 잔뜩 들어 있는 백분을 그리 발라서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런 끔찍한 망상에 빠져 그리한 것이니. 아이고, 불쌍하고 가여워서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탈 인재가 너무 일찍 태어나셨네.

******

“조 상궁, 엄 상전을 불러오게.”

중궁전에서 나오자마자 윤서는 엄자치부터 찾았다. 수양 대군 측에 심은 간자가 발각된 것 같다는 이야기와, 어떻게 대처할지부터 논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 상궁부터 먼저 엄자치를 불러오게 보내고, 매금이와 다른 나인들과 함께 천천히 거처로 돌아가던 윤서는, 중궁전 뜰 한가운데서 문득 걸음을 멈춰섰다.

“왜? 발, 아파?”

임신 막달이 되자 다리에 쥐가 자주 났다.

평소라면 이향이 윤서의 신음을 듣고 일어나 발가락을 힘껏 젖혀 통증을 가라앉힌 후 뭉친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었을 것이지만, 요 며칠 그 일을 매금이가 하고 있었다.

단오절 다음 날 이향이 바로 평안도와 함길도로 시찰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향은 작년 기근이 심했던 평안도와 함길도의 농사 현황, 함길도 경흥의 탄광 개발과 단천의 은광 개발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김종서, 신숙주 등을 거느리고 시찰을 떠났다.

“아니야. 아파서가 아니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달리 돌아가기 시작해서.”

“응? 바퀴가? 빠졌어?”

“아니다. 혼잣말이야.”

윤서는 다시 걸음을 떼며 달라진 역사를 되짚었다.

‘홍 상궁은 결국 죽을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성종 때까지 영화를 누리며 오래 살았던 홍 숙빈, 지금의 홍 상궁은 오늘 일로 죽음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홍 상궁이 죽게 되면 그와 5촌 조카의 관계인 문 승휘의 세력도 동궁 내에서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이번 일은 홍 승휘와 문 승휘 세력을 제거하여 동궁 내에서 수양 대군의 입김을 완전히 제거한 것에만 만족하는 정도다.

그 정도도 큰 성과이긴 하나.

‘그래도 철저하게 조사해야지. 홍 상궁은 우리 홍위와 도원군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 책임을 져야만 하지만, 과거 일을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밝혀야 한다.’

윤서는 엄 상전을 통해 지문을 채취해 문서의 위조를 밝혀내는 전옥서 소속 사리(使吏)를 섭외하려 하였는데, 이전에 보약 처방전을 낸 의원이 이미 죽고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이 일에 홍 상궁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재는 봐도 무엇인지, 달라진 점이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고, 약을 달였던 본방 나인도 벌써 죽고 없었다. 처방전에 적힌 대로 탕약을 달여 맛을 보게 해도, 수은 중독 증상으로 입 안에 상처가 많아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아주 미약하나마 실마리를 전순의에게서 나왔다.

“처방전 자체는 진짜인 것 같습니다. 이 처방전은 모두 다 여인의 몸을 임신하기 좋게 만드는 탁월한 처방전에, 약재도 귀한 것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홍 상궁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예를 들어 입궐 초기 홍 상궁의 몸이 원래 뜨거운 양인의 체질이었다면, 여기 부자는 열증을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부자는 소량으로 몸을 덥게 하는 약제지요.”

그러나 전순의는 이전 홍 상궁의 체질을 진맥해본 적이 없으니 이것은 물증이 되기 어렵다는 말만 하였다.

윤서가 이미 예상한 대로였다.

윤서가 여기까지 알아냈을 때가 5월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윤서는 중전마마께 보고 드리기 전에 엄 상전과 먼저 의논했다. 이향이 부재한 지금, 궐 안의 일을 믿고 의논할 이가 엄 상전과, 내수사에 나가 있는 박 상궁이 유일했다.

“이미 오래전에 벌어져서 달리 입증하기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도, 중전마마께서도 홍 상궁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나머지는 덮으려 하실 것입니다. 아들과 큰손주의 안위가 함께 걸려 있지 않습니까?”

“그럼 전순의의 의견을 아예 보고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정확하게 보고 하십시오. 그 부분을 빼 놓으면 아마도 마마님이 부부인과 결탁하려 한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 아니!”

내가 어찌 수양 대군과 결탁한다는 말인가.

윤서가 황당해서 헛웃음을 짓자, 엄 상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기씨가 생기시지 않습니까? 뱃속의 아기씨가 사내 아기씨라면, 우리 세손 각하께 가장 위협이 될 이가 누가 되게 되겠습니까?”

“!”

윤서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궐에서 최고 권력자를 가까이 모신 엄 상전은 냉철하였다.

“지금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께선 마마님이 어여뻐 어쩔 줄을 모르시고, 그리고 사내 아기씨를 낳으시게 되면 당장 양원이나 혹은 어쩌면 세자빈으로까지 책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마님은 결국 며느리입니다. 그것도 영민하고 출중하며 세자의 총애를 지극히 받고 있는 세자빈이자, 세손 각하만큼 총명한 아기씨를 가진 세자빈이시지요. 이럴 때 마마님께서는 윗전께 숨기는 것이 있다는 인상을 드려서는 절대 아니 되십니다.”

엄 상전의 충고는 “윗전의 뜻을 힘껏 살피고 동시에 아는 모두를 진실하게 고하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마마님이 아주 귀하게 되셔도 결국 저나 박 상궁의 처지와 근원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씀, 기억하십니까? 그 의미는, 마마님이 내명부 권력의 정점에 오르지 않는 한, 언제나 삼가 윗전의 뜻을 살피고 받들어야만 모두가 무사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윤서가 알아낸 대로, 하나의 가감 없이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전하께서 천추전으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세종께서 은밀히 부르셨다.

“오늘 나와 나눈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것이다.”

천 상궁에게 차를 내주라 이르신 후에도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시던 세종께선 이렇게 비장하게 말문을 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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