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화. 고맙듭니다, 어머니!
평저선과 맹선에 나눠탔던 귀빈들이 백사장에 내려섰을 때 귀가 멍멍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윤서가 홍위를 구하고 수륙군이 도원군과 홍 상궁을 건져낸 직후.
대체 한강 한가운데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저리 소란인가 궁금하여 위험할 정도로 강에 다가서는 귀빈과 백성들을 위해 오위 대장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사고 경위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상 전하의 덕이 특히 높으시고 세자 저하의 영명하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매, 조종(朝宗)이 보우하사 물살에 휘말리신 세손 각하께서 무사히 구조되셨습니다. 세손 각하께서 오르셨던 평저선이 불어난 물살에 휘청하는 바람에 갑판 가장자리에 서 있던 도원군께서 먼저 물에 빠지졌고, 휘청하는 도원군의 손을 잡아주시려던 세손 각하도 함께 휘말려 물에 빠지시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본 동궁의 마마님께서 두 분 아기씨를 구할 마음으로 물에 뛰어드시고··· (중략) 한강의 용왕신의 따님이 되시는 것처럼 수영 실력이 빼어난 우리 권 승휘 마마님께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충심으로 세손 각하를 구해내셨습니다. (중략).”
그래서 윤서와 홍위가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렸을 때 백성들은 기쁨에 차 “세손 각하! 세손 각하!” 그리고 “권 승휘님! 권 승휘님!”을 연호하였다.
윤서가 땅을 딛었을 때 먼저 배에서 내리셨던 세종과 소헌 왕후께서 다가오셨다.
“할바마아! 할마마아! 소쫀, 무사하옵니다!”
홍위가 외치며 폭 안기자, 세종께선 홍위를 품에 당겨 안으신 채 어깨를 떨며 굵은 눈물만 흘리셨다.
임금의 눈물이 용안을 적시자 모든 신하들도, 종친과 백성들도 모두 백사장에 엎드려 울며,
“전하, 열성조(列聖朝) 가호가 세손 각하께 있음이옵니다!”
“전하, 천신의 보우하심이 우리 세손 각하께 있음이옵니다!”
외쳤다.
‘천신의 보우하심이 우리 홍위에게 있다!’
윤서는 순간 코가 찡해지도록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왜 전하께서 온통 옷이 젖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홍위와 윤서를 그대로 백성 앞에 세우신 채 눈물을 보이시는지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세자는 영영 처복이 없고, 세손은 태어날 때부터 대전의 촛대가 부러진 박복한 운명이다!’
벌써 여러 해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소문을 단숨에 잠재우게 될 일이 오늘 한강 단오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죽을 위기를 겨우 벗어났는데 “할바마마!” 씩씩하게 외치며 임금의 품에 덥썩 안기는 네 살배기 세손과,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세손을 구해낸 만삭의 후궁.
홍위와 윤서의 이 적나라한 모습이 그간 세자와 동궁에 드리워진 불길한 그림자를 모두 걷어낼 수 있는 모습이다.
세종께서는 이윽고 눈물을 그치시고 온 힘을 다해 홍위를 들어 올려 백성에게 똑똑히 보이며 외치셨다.
“천신과 열성조(列聖朝)께서 보우하신, 우리 조선의 세손이다!”
감격에 겨워 갈라진 목소리로 외치시는 임금의 말씀에, 백성들은 모두 두 손을 모아 엎드리며 소리쳤다.
“와아아아! 경하드립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가슴을 쿵쿵 뛰게 하는 감동적인 외침과 환호였다.
윤서가 눈물을 흘리자, 옆에 서 계시던 중전마마께서 옆에서 폭 안으셨다. 그리고 다정하게 등을 어루만지시며 함께 “흐흑” 흐느끼시다가,
“하늘이 널, 보내주셨구나. 하늘이, 널 보내주셨어. 윤서야. 하늘이 홍위를 위해, 너를.”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세종께서는 홍위가 무사한 모습을 백성에게 보이신 후 이향의 품에 넘겨주시고, 윤서를 향해 돌아서셨다. 그리고는 인자하게 웃으시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시며 중전마마와 윤서의 어깨를 함께 감싸 안으셨다.
“···전하.”
임금께서 이렇게 격의 없이 사사로운 친밀감을 백성 앞에서 보이셔도 되는 일인가.
세종께서 보이시는 뜻밖의 친밀함이 놀라워 윤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윤서의 염려를 알아채신 세종께서 등을 두드리며 속삭이셨다.
“임금도, 사람이니라. 네가 우리 홍위를 목숨보다 더 아껴······.”
말씀을 하시다 말고 세종께서는 “으흐흠” 울음을 삼키시며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중전마마도 다시 “으흑” 소리 내어 감동의 울음을 터트리셨다.
그렇게 감동의 순간이 지나간 후.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신 세종께서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사직의 위기가 될 일을 잘 대처하였구나. 내 오늘 네가 세운 공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럼요. 어찌 잊겠습니까? 큰 상을 내리셔야 합니다.”
중전마마께서도 한번 더 치하하셨다.
윤서는 뿌듯한 마음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어디 좀 편히 누웠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분께 인사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제 좀 쉬고 싶습니다.”
그러자 세종께선 빙그레 웃으시더니.
“저기 천막에 가서 휴식을 취하거라. 그리고, 홍가의 일은 조만간 중궁과 함께 따질 것이니, 기다리거라.”
“!”
역시, 보셨구나.
한글을 창제하시느라 말할 때의 입 모양과 혀 모양을 면밀하게 관찰하신 분이시니 망원경으로 윤서가 홍 상궁에게 한 말도 읽어내실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던 것이 옳았다.
이날 왕실의 단오제는 그 어느 해보다 성공적으로 성대하게 마무리되었다.
도원군과 홍 상궁은 혜민국으로 이송되었고, 윤서는 왕족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지어진 천막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조 상궁이 내온 어알탕과 제호탕을 조금 마신 후 그대로 낮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윤서는 현덕 왕후의 음성을 들었다.
- 네가 내 아들을 살려주었으니, 언제고 나도 네 아들을 살려주마! 고맙다, 후손아! 고맙다!
윤서가 자는 새, 전하와 중전마마 그리고 이향은 후궁들과 함께 백성들에게 일일이 수리취떡과 제호탕을 나눠주시며 연회를 베푸셨다고 한다.
그리고 도원군과 홍 상궁을 건져내 한층 기세가 오른 수륙군이 전투 시범을 보였다.
수륙군은 두 패로 나눠 맹선에 오른 후 촉 없는 화살로 원거리 전을 펼치고, 또 배를 서로 가까이 붙여 서로의 배에 사다리를 걸어 건너간 후 목검과 목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모의 전투를 선보였다.
"윤서야,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불꽃놀이다. 홍위랑 희아가 기다린다."
이향이 깨우러왔을 때는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었다.
윤서는 홍위와 희아의 손을 꼭 잡고 이향과 금성 대군이 함께 주도하여 만든 새로운 다발 연사 화포 시범, 그리고 정말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았다.
어둠이 짙어진 무렵, 백사장에 묻어 놓은 불화살에 불을 붙이자 파파파박 귀를 멍멍하게 하는 소리와 함께 불화살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가 하늘 가득 별똥별이 쏟아져 내리듯 강물 위로 떨어졌다.
"와아. 정말 멋있어요."
정말 현대의 불꽃놀이 못지 않아요.
윤서가 감탄할 때였다.
불꽃이 우수수수 빗방울처럼 화려하게 떨어질 때, 홍위는 꼬물꼬물 몸을 일으키더니 윤서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아기씨!”
윤서는 늘상 홍위의 뺨에 뽀뽀를 하지만, 홍위가 윤서의 뺨에 뽀뽀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놀라고 감격스러워서 윤서가 홍위를 보자, 홍위는 윤서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나를 구해줘더, 홍이를 구해줘더, 고맙듭니다, 어머니.”
“!”
어머니.
화려한 황금빛 어둠을 틈타 홍위가 한 애정의 고백이었다.
윤서는 그날 밤 오래도록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을 메우는 감격에 윤서가 계속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자, 희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한소리를 하였다.
“나중에 어마마마라고 부를 땐, 울지 말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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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제 이틀 후.
이향이 혜민국에 누워 있는 홍 상궁에게 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추궁하다가 손등에 움푹 긁힌 손톱자국만 가지고 돌아왔다.
왜 도원군을 밀었는지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화만 냈다고 말한 이향이 윤서에게 손을 내밀며 한숨을 쉬었다.
“금아까지 낳았는데도 내가 아는 여인인 것 같지가 않았다. 광인이 된 것만 같아.”
“······.”
윤서는 한때 몸을 섞었던 여인의 변한 모습에 상심한 이향을 뭐라 위로해야 할지, 위로를 하긴 해야 하는지 갈피가 안 잡혀 묵묵히 상처에 자운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가슴뼈에 금이 간 것 같은데. 나으면 내사옥에 가두고 추국을 할 예정이다. 무엇이 이유이든 홍위가 휘말렸으니,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이향이 또 말했다.
그런 이향에게 윤서는 윤씨 부인이 지속적으로 건넨 약재 때문에 원한을 가지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윤씨 부인이 몸에 안 좋은 약재를 지속적으로 건네서 금아가 저리 된 것이라면, 그 사실을 이제 알게 된 홍 상궁이 도원군을 죽이려 한 것이라면, 그 고발은 홍 상궁의 입에서 직접 나와야 한다!’
그래서 윤서는 이향의 머리를 빗겨주며,
“일간 제가 홍 상궁을 궐 안으로 데려온 후 물어 볼게요. 제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으니 혹시 털어놓을지도 모릅니다.”
하고만 말하였다.
홍 상궁을 궐 안으로 데려와야 하는 것은 도원군도 혜민국에 있기 때문이다.
홍 상궁은 가슴뼈에 금이 갔는지 굉장한 통증을 호소하는데, 도원군은 어려서그런지 별다른 통증 없이 거의 다 회복하였다고 전순의가 와서 말해주었다.
“그런데 부부인 마님께서는 도원군이 놀라셔서 경기를 할 수 있다고 한 열흘 혜민국에 머물면서 경과를 보셨으면 하십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전순의는 윤씨 부인이 도원군을, 그리고 옆방에 머물고 있는 홍 상궁도 함께 직접 지극하게 간호하고 있다고 하였다. 윤씨 부인과 사촌인 홍 상궁의 친정어머니도 여종 둘을 데리고 와 혜민국에 머물면서 홍 상궁을 돌보고 있다고 하였다.
‘평소의 윤씨 성격이라면 홍 상궁이 밀어서 강물에 빠졌다는 도원군의 말을 듣자마자 홍 상궁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잔혹한 성품의 윤씨가 오히려 홍 상궁을 지극정성 돌보는 것이야말로 약점이 잡혔다는 뜻!’
전순의의 말을 듣고 윤서는 윤씨 부인이 건넨 약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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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윤서가 중전마마께 홍 상궁을 궐에 데려와 치료하게 해 주십사 청하러 가려고 할 때였다.
마침 중궁전의 지밀 최 상궁이 윤서를 부르러 왔다. 중전마마와 함께 계신 세종께서 중궁전으로 윤서를 부르신다는 전언이었다.
“거기, 편히 기대앉거라.”
배가 불러 앉기 어려우니 격식을 따지지 말고 편히 보료에 기대앉으라 명하신 후, 중전마마께서 먼저 물으셨다.
“홍 상궁이 왜 도원군을 그리 미워하게 된 것이냐? 향이가 가서 물어봐도 답을 안 하였다는데, 윤서 너는 짐작 가는 것이 있느냐?”
“아직,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윤서가 답을 올리자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계시던 세종께서 눈을 반짝하고 물으셨다.
“‘아직’이라면, 곧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냐? 총명한 너이니 뭔가 벌써 짐작한 것이 있겠지. 고하거라.”
“먼저, 부부인 윤씨에게 하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부인과 홍 상궁은 서로 이모와 조카 사이인데 이렇게 원한이 깊어졌을 땐 그들만이 아는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윤서는 일단 화살을 본래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