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화. 왕실 단오제 (3)
“홍 상궁이, 누굴, 민 거니?”
윤서는 홍위의 창백한 뺨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시선은 한껏 커진 이향의 눈동자와 단단히 얽은 채였다.
“홍 상궁이, 너를, 홍위, 너를?”
목소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이 순간, 윤서는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 찢어 죽이고 싶은 살의. 팔다리를 다 잘라내 인간 돼지로 만들고야 말 살의.
제 안에 이렇게나 강렬한, 잔혹한 살의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정신 한쪽이 무너질 듯 아득해지는 걸 참아내며, 윤서는 다시 빠르게 물었다.
“홍위, 너를?”
“안니야. 도원군!”
“하아!”
안도감에 팔에서 힘이 쭉 빠지는 걸, 윤서는 서둘러 다시 단단히 홍위를 안으며 소리쳤다.
“저하! 홍 상궁은 도원군을 구하려다 이리된 것입니다!”
“!”
이향은 윤서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이 단오제는 새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한 줌 왕족과 중앙 지배층의 나라가 아닌 백성이 부강해지는 나라.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는 세종과 이향의 의지가 용산 위 거대하게 솟은 괘종 시계와, 한강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부표 다리와, 저녁에 선보일 화포를 통해 선언하는 날이었다.
이토록 중차대한 날에!
저기 백사장을 가득 메운 백성들, 이제 곧 들이닥칠 수십의 수륙군, 이제 막 노를 젓기 시작해 이쪽으로 미끄러져 오고 있는 세 척의 평저선 위 전하와 조정 신료들. 이 많은 시선 앞에서 왕실의, 세자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윤서의 냉철한 판단이라는 것을 이향은 바로 알아들었다.
“들었느냐?”
이향이 천가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저하. 너희 넷! 홍 상궁 마마님은 배에서 미끄러지는 도원군을 구하시려다 물에 빠지신 것이다!”
“예!”
궐에서 오랫동안 세자를 모셔온 호위 내관 천가도, 그의 빼어난 수하도 단박에 알아들었다.
“안니야!”
어린 홍위만 윤서 목을 감아 매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홍 상궁이,”
“아기씨!”
윤서는 홍위 귀에 빠른 말투로 단호히 속삭였다.
“아기씨. 홍 상궁은 나중에 엄히 처벌할 거에요. 그러나 왕실의 추문이 오늘, 밖으로 나가선 안 됩니다!”
“!”
홍위가 새카만 눈동자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윤서는 홍위의 눈동자 속을 지나가는 혼돈과, 충격과, 그리고,
“거가 나잉야. 으아아앙.”
왕관의 무게를 너무 일찍 이해하게 된 아기의 두려움을 보았다.
가슴에 선뜩, 칼에 베인 듯한 통증이 지나갔다.
이렇게 어린 네게, 나는!
“아기씨! 홍위야.”
나는 네게 사랑만 주려 하였는데. 안온한 애정으로 너를 키우려 하였는데.
미어지는 가슴으로 윤서는 홍위 귀에 대고 다시 속삭였다.
“홍위야. 내가 널 지킬 것이야. 오늘처럼, 무슨 일이, 어떻게 있어도. 그러나 홍위 네가 무사하니, 오늘은 왕실의 위엄을 위해 덮어야 한다.”
“···응. 오느처럼. 나두. 거가를, 지켜두께.”
“그래. 우린 서로를, 지킬 거야.”
속삭인 후 윤서는 재빨리 이향의 팔에 홍위를 넘겼다.
이향은 홍위를 힘껏 안고 이마에 정신없이 입을 맞춘 후, 마침내 다가온 수륙군에게 명령했다.
“저쪽부터 수색하거라. 홍 상궁이 세손과 도원군을 구하려다 함께 빠졌다!”
“예, 세자 저하!”
“세손 각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아!”
“마마님! 저희에게 맡기시고 배에 오르십시오!”
작년 여름부터 충실하게 수영과 잠수, 선상 침투와 전투 훈련을 해온 수륙군 병사들이 힘차게 환호하며 배 옆을 빠르게 스쳐갔다.
“홍위야. 천가에게 가 있거라.”
이향은 홍위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후 배의 후미로 물러선 천가에게 홍위를 넘겼다. 그리고 윤서를 향해 다시 팔을 뻗었다.
윤서는 아까 홍위가 가리켰던 곳을 다시 살폈다. 얼핏 보였던 자색 단령 자락도, 분홍빛 치맛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수륙군에게 맡기고 올라오너라.”
윤서의 걱정을 알아챈 이향이 배 밖으로 위태로울 정도로 몸을 기울이며 다시 재촉했다.
윤서는 실종 지점에 도달한 수륙군 병사들이 배에서 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전하와 조정 신료를 태운 평저선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서야! 우리 아기 생각해서, 어서!”
“한 번만요. 한 번만, 물속을 확인하고요.”
저들이 잘하고 있는지, 아까 호위 내관들처럼 어설프지 않은지 한 번만 보고요.
그리고······.
···도원군은 아이니까요. 어른의 죗값을 아이가 치르게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윤서야!”
“거가야!”
이향과 홍위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윤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수륙군 틈으로 헤엄쳐갔다.
“마마님! 저희가!”
“찾았는가?”
“찾을 것입니다!”
“찾아낼 것입니다!”
“배에 오르십시오. 물이 차갑진 않으나,”
“어서, 찾게!”
그 말을 끝으로 윤서는 몸을 솟구친 후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투명한 강물 속에서 수십 명의 수륙군이 능숙하게 물살을 휘저으며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취미로 철인 삼종을 즐겼던 윤서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정돈된 동작이었다.
윤서가 비로소 안심하여 다시 수면 위로 몸을 향할 때였다.
“찾았습니다!”
“끌어 올려!”
소란스러운 환호와 함께 자색 단령과 분홍 치마에 암적색 비단 당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헝, 숨을 쉬지 않습니다!”
다급한 외침이 또 들렸다.
“배에 올려요! 인공호흡!”
심장이 멈춘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인공호흡을 하면 충분히 살릴 수 있다.
윤서가 소리칠 때 조운선을 겸하기에 갑판이 넓게 평평한 전투선인 수륙군의 맹선이 도착했다.
맹선 위 병사들이 그물을 던졌다. 물속의 병사들이 그물을 끌어다 도원군과 홍 상궁을 감싸자, 배 위에서 두 사람을 끌어 올렸다.
배 측면에 여러 개의 줄 사다리가 내려졌다.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향이 탄 배도 맹선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거가야! 거가 나잉야!”
홍위가 윤서를 애타게 불렀다.
이향은 배를 맹선에 바싹 붙이게 한 후 사다리를 타고 배 위에 올랐다. 그리고 밑을 내려다보며 몸을 세운 채 홍위를 보고 손을 흔드는 윤서에게 말했다.
“올라오너라, 윤서야.”
“세손 아기씨, 저는 도원군과 홍 상궁을 살필 터이니 거기 배에서,”
“안냐. 나도 올라가 꺼야.”
“···그래요. 그럼 저 먼저 올라갈 테니 뒤따라 올라오세요.”
그래야지. 우리 홍위.
장차 세자가 될 우리 홍위는 두려운 일을 당했어도 모두에게 의연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 정도로 이미 의젓한 세손이니.
뿌듯하면서도 너무 일찍 어른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홍위를 안타까워하며 윤서가 줄 사다리를 잡자 천가와 다른 호위 내관 하나가 물에 뛰어들어 윤서의 뒤를 받쳤다. 세자의 후궁 몸에 내관이 아닌 일반 사내의 손길이 닿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재빠른 배려였다.
그렇지만 둘이나 몸을 받쳐 주는데도 사다리를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력 좋은 물에 수월하게 떠 있는 것에 그새 익숙해진 몸은 지구의 중력을 낯설어 했다. 게다가 출산을 오십 여일 앞둔 배불뚝이 몸을 한 까닭에 균형을 줄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기도 어려웠다.
“꽉 잡고 가만히 있거라.”
초조하게 지켜보던 이향이 병사들에게 사다리를 끌어 올리라 명했다.
수륙군 대여섯이 들러붙어 줄 사다리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향은 윤서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어깨와 등, 가슴에 은색의 사조룡보가 달린 아청색 융복을 벗어들었다. 그리고 윤서가 배 위에 오르자마자 윤서의 몸을 융복으로 감쌌다.
“저하!”
용보가 달린 융복을 입다니. 곧 전하와 조정 대신들이 도착하실 터인데.
윤서가 도로 벗으려고 하자, 이향은 다시 옷을 여며주고, 넓은 허리띠를 부푼 배 위쪽으로 단단히 둘러주며 속삭였다.
“옷이 젖어서 어여쁜 네 몸 선이 다 드러난다. 입고 있거라.”
“예쁘긴. 허리띠를 이렇게 위로 두르면 배가 두드러져 올챙이처럼 보이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다른 이의 옷을, 저하.”
그러자 이향이 윤서를 살짝 안으며 속삭였다.
“오늘 네가 무엇을 한지 모르느냐? 너는 오늘 조선을 구한 것이다, 윤서야. 곤룡포를 입혀 주어도 충분치 않은 큰 공을 세운 것이야.”
“···저하.”
두 사람이 둘만의 달콤한 분위기에 젖어들 때였다.
“마마님! 저희가, 그 처치법을 제대로 해 보질 않아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수륙군의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엎드리며 외쳤다.
윤서는 서둘러 도원군과 홍 상궁이 눕혀져 있는 앞쪽 갑판으로 갔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창백한 얼굴의 도원군을 막상 보게 되자, 홍위를 볼 때마다 이죽거리던 평소의 시건방진 얼굴이 떠올랐다. 또 이 아이가 장차 한확의 여식과 혼인하여 월산대군과 성종의 아비가 되었었다는 원래 역사도 떠올랐다.
‘이대로 두면. 이대로 두면, 수양 대군의 야심이 영영 망가지지 않을까.’
그리고 홍 상궁의 일도 이대로 묻혀 새 조선을 만들 이향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도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척만 하면.
머릿속이 팽 돌 정도로 강한 유혹이었다.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그대로 하게.”
윤서는 선 자세로 가슴을 압박할 수 있는 위치로 도원군을 옮기게 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앉아서는 가슴을 압박하는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홍 상궁의 몸도 도원군의 옆으로 옮겨졌다.
“인공호흡, 실시했는가?”
윤서가 묻자 이제까지 홍 상궁의 몸을 처지하던 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제길. 작년 여름 그렇게 일렀거늘!
윤서는 재빨리 도원군의 고개를 살짝 젖힌 후 코를 막고 입술을 벌려 숨을 두 번 불어넣었다.
“가슴뼈 중앙에 손끝 댄 후, 깍지 끼고 한 치 가량 가슴뼈가 들어갈 수 있게 서른 번 압박하게. 실시!”
윤서는 응급 처지 요령을 다시 지시하며 도원군의 가슴뼈 중앙에 손을 겹쳐 댄 후, 하나, 둘, 셋, 훅훅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젖혀 기도를 확보한 후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불어 넣어!” 소리치고 두 번 숨을 불어넣고, 다시 가슴뼈를 압박하길 서른 번, 다시 호흡 두 번, 다시 가슴뼈를 압박하기 서른 번, 다시 호흡 두 번.
철인 삼종으로 한강을 건널 때 유사시를 대비해 익혔던 심폐소생술을 윤서는 쉬지 않고 실행했다.
처음 시작할 땐 반쯤 내키지 않던 손길에 마음이 실리고, 염원이 실리고.
‘도원군, 살아나라. 살아서, 다른 미래를. 아비의 죗값으로 요절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도원군. 너도 홍위와 같이, 오래오래 살아서.’
뚝뚝, 굵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땀이 눈에 스며들어 쓰라린 눈물이 솟아나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뻐근해진 손으로 다시 코를 막고 숨을 후 불어넣고 얼굴을 떼었을 때.
“쿨럭” 소리와 함께 도원군이 물을 뱉어내었다.
“살았습니다. 살아나셨습니다!”
주변의 환호와 함께 도원군이 눈을 떴다.
윤서는 고개를 들어 홍 상궁을 바라보았다. 홍 상궁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
윤서는 홍 상궁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 휘청하는 윤서를 이향이 단단히 잡았다. 윤서는 이향의 부축을 받으며 홍 상궁 곁에 섰다.
“내가 하겠네.”
윤서는 홍 상궁의 가슴뼈 중간에 손을 대었다. 하나, 둘, 서른까지 강하게 압박. 손을 떼고 코 막고 후, 한번, 기다렸다가 다시 후 호흡 불어넣고. 가슴 다시 압박 시작.
‘살아서, 제대로, 죗값을, 치러야지. 홍 상궁.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야. 살아서, 살아서! 홍 상궁! 제대로! 죗값을 치르거라! 홍 상궁!’
속으로 절규하며 윤서는 가슴 압박을 지속했다.
주변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윤서 뒤를 지키는 이향도, 그 옆에서 이향의 긴 두루마기 자락을 꼭 잡고 윤서를 올려다보는 홍위도. 바로 옆에 누운 채 이제 홀로 숨을 쉬기 시작한 도원군도. 젖은 옷에서 피어나는 한기에 몸을 떠는 배 위의 수륙군 병사들도.
마침내 가까이 다가온 평저선 위의 세종과 소헌 왕후도. 조정의 대소신료와 대군들도. 엄마를 부르며 막무가내로 울던 금아도.
모두 침묵 속에서,
세자의 아청색 융복을 우스꽝스럽게 걸친 채, 물속을 헤집느라 비녀조차 잃어버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린 배불뚝이 여인이 죽어가는 여인을 다시 세상에 데려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묘한 감동으로 지켜보았다.
“!”
한참 가슴을 압박하던 윤서는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느꼈다.
홍 상궁이었다.
홍 상궁이 여전히 죽은 척하며 윤서의 치맛자락을 남몰래 잡아당기고 있었다.
윤서는 동작을 멈추고 홍 상궁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 그, 그만해. 가슴뼈, 부러지겠어.”
홍 상궁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윤서도 홍 상궁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너, 오늘, 입 닥치고 세손과 도원군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말해. 다른 말 하면, 네 딸 금아,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무, 뭐!?”
홍 상궁이 눈을 번쩍 떴다.
“하아.”
안도의 숨을 뱉으며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로 옆 배에서 망원경을 들고 이쪽을 살피던 세종 대왕의 시선이 윤서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