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화. 왕실 단오제 (2)
윤서는 홍위와 희아의 손을 양쪽에 잡고 이륜 마차 앞에 서서 장엄한 행렬을 바라보았다.
정조 대왕 화성 행행도에 그려진 것처럼 온갖 깃발을 든 의장대와, 세종과 소헌 왕후가 타고 가실 이륜 마차를 겹겹이 둘러싼 붉은색 철릭의 호위군, 그 앞에 말에 탄 조정 대신들, 또 그 앞에 아청색 융복을 멋지게 입은 우리 이향까지.
경복궁 정문 앞에서 육조 거리, 그리고 남대문까지 이르는 넓은 길이 사천 명이 넘는 대규모 행렬로 꽉 메워 있었다.
음력으로 5월 5일 단오, 양력으로는 6월 하순쯤 될 초여름 이른 아침의 공기는 온통 화려한 수런거림 속에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윤서는 희아와 홍위와 함께 뚜껑이 없는 마차에 올랐다. 서양에서 의장용으로 쓰이던 마차의 모양을 윤서가 이향에게 대충 그려주었었고, 이향은 또 그것을 본래의 마차보다 더욱 멋지게 개량해서 총 다섯 대를 만들었다.
음악 소리와 함께 행렬이 시작되었다. 빽빽한 호위군 틈새로 길가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백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세손 아기씨는 자선이가 곁을 지킬 것이고, 군주 자가는 유모 백씨가 곁을 지킬 것입니다. 백사장 주변으로 어젯밤부터 자리 잡고 밤새 기다린 백성이 수만이라 하니, 두 분께선 호위 궁인을 벗어나셔서는 아니 됩니다.”
윤서는 아까 당부했던 말을 또 당부했다.
“그럼, 배는? 홍위 배동들과 배에 탈 때 자선이 못 데리고 타지 않아?”
“배는 가장자리에 호위 내관이 서 있어서 괜찮아요. 제가 걱정하는 건 사람들 붐비는 백사장에서 혹여 아기씨들 잃어버릴까 봐 서에요.”
“에이, 누가 감히!”
“감히!”
희아가 먼저 ‘감히! 하고 말하자 홍위가 ’감히!‘ 따라 말하며 둘이 키득거렸다.
투닥거리다가도 또 세상 다시 없이 사이좋게 웃는 남매를 보며 윤서는 자꾸 스멀스멀 드는 불안을 잠재웠다.
며칠 전부터 무엇인가 큰일이 다가오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서 조 상궁과 박 상궁의 정보망을 총동원해 수양 대군의 명례궁과 다른 후궁 거처를 살피게 하였는데 별다른 움직임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불안하게 수런거리는 직감의 속삭임을 무시하지 않고 윤서는 매금이에게 백사장에서 홍위에게 딱 붙어 있으라고 명을 내려두었다.
행렬 인원이 많아 단오제가 시작되기까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행렬은 한강진 앞 백사장까지 신속하게 나아갔다.
귀빈들이 자리할 곳을 제외한 백사장 양 옆과 저 위 용산까지 백성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의 다 흰색 한복 일색이라 사방이 온통 흰색의 물결이었다.
왕실 종친과 내외명부 여인들이 백사장에 세 단으로 길게 마련된 관람석에 앉고 주요 인사들은 금위군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정해진 배에 올랐다.
수륙군 이백 인이 한강의 중앙, 깃발이 세워진 뗏목까지 헤엄쳐 간 후, 그곳에 떠 있는 세 척의 전투함에 올라 서로 무기를 가지고 전투 시연을 보일 때, 전하를 비롯한 왕실의 주요 인사와 조정 대신들은 모두 배를 타고 가까이서 지켜보기로 되어 있었다.
관람용으로 준비된 세 척의 배는 갑판이 넓은 평저선이었다.
전하는 중전마마와 젊은 신하들과 배에 오르시고, 세자 이향은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원로 신하들과, 그리고 세손 홍위는 금성 대군과 광평 대군, 그리고 오산군 도원군 등 다른 왕손들과 함께 각각 배를 타게 된다.
수륙군 수영 지도의 원조 격인 윤서는 후궁 중 유일하게 세종께서 탄 배에 올라 아주 가까이서 수륙군의 수영을 지켜보게 되었다.
“권가야. 네가 저들에게 수영을 전수한 셈이니 제대로 잘 수영하고 잠수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개선할 점이 있으면 추후 제시하거라.”
하고 세종께서 어명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오늘 윤서는 붉은색 스란치마와 치자색 저고리 위에 연두빛 긴 비단 단삼을 입고 머리에는 가체를 둥글게 얹고 귀 위로 양쪽에 둥근 백옥 떨잠을 두 개를 꽂은 공식 예장 복장이었다. 겹겹이 갖춰 입은 옷 속으로 땀이 흐르고, 3kg 가까이 되는 가체 무게 때문에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뿌우뿌우 나각 소리가 울리고, 둥둥둥 큰 북 소리와 함께 수영 시범이 시작되었다.
근 이백 명에 달하는 수륙군이 현대의 내복처럼 생긴 검은색 상의와 일자 바지를 입고 한강 중앙을 향해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수면 위를 건장한 병사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헤엄치는 모습은 무척이나 역동적인 장관이었다.
“전하, 저 수영은 자유형이란 영법으로 속도를 내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원래 물속에 머리를 넣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호흡을 하는데 이런 강이나 바다 같은 곳에서는 저렇게 머리를 내놓아 시야를 확보하고, 크게 팔을 휘둘러 속도를 낼 수 있게 변형하였습니다.”
“오호, 그럼 다른 영법도 있다는 것이냐?”
“예, 전하. 나중에 홍, 호흠, 세손 아기씨께서 전하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저렇게 체계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으면 나중에 수전에서 전함 하나가 격침을 당하더라도 다른 배에 옮겨 타 다시 싸울 수 있으니 인명 손실이 참으로 적어지겠구나.”
“예, 휴대 화포가 발달되면 적의 배에 몰래 침투하여 화포를 던진 후 바다에 다시 뛰어들어 몸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호!”
윤서가 현대의 수류탄을 생각하면서 침투전을 말씀드리자, 세종께서는 더욱 흥이 나시는지 갑판 가장자리에 바싹 몸을 붙이셨다.
“전하, 몸을 조금 뒤로 물리시옵소서. 빠지시겠습니다.”
옆에 서 계시던 중전마마께서 손을 뻗어 전하의 융복 자락을 잡아당기며 잔소리하셨다. 그러자 세종께서는 허리춤에 차고 계시던 망원경을 들어 올리며,
“내가 빠지면 우리 권가가 건져줄 터인데, 무얼.”
말씀하시고, 눈에 망원경을 대고 병사들을 살피기 시작하셨다.
망원경은 군기감 제조 이천이 만든 기물이었다. 세종께 안경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볼록 렌즈, 오목 렌즈 원리를 설명해 줄 때 망원경도 그리고 렌즈가 두 개 들어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뚝딱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세종의 시대에는 참으로 괴물 같은 인재가 많기도 하였다.
’우리 희아도 수학 천재인데.‘
흐뭇하게 생각하며, 윤서는 세종 곁에 딱 붙어서서 좀 있다가 수륙군이 시범 보일 잠수 방법을 설명했다. 윤서의 설명에 신숙주를 비롯한 젊은 신료들이 종긋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전하를 모시느라 윤서는 바로 옆에 떠 있는 홍위의 배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 그래서 홍위와 오산군, 도원군 등 여러 왕손이 배에 오르려 할 때 홍 상궁의 딸 금아가 자신도 타고 싶다며 몹시 울었다는 사실도, 그래서 결국 보다 못한 광평 대군이 금아와 금아를 안고 있는 홍 상궁을 배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다.
“이제 반환점에 가까이들 갔다. 곧 맹선에 올라 전투 시범을 보이겠구나.”
세종께서 흥에 겨워 윤서에게 말씀하실 때였다.
갑자기 옆의 배에서 “으아아, 조심해!” “빠졌다!” 하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달렸다. 윤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옆의 배를 향해 달렸다.
“아아, 세손 각하!”
“도원군!”
“마마님!”
갑자기 홍위와 왕손이 타고 있는 배에서 비명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뒤이어 호위 내관들이 “세손 각하가 물에 빠지셨다!” 외치며 텀벙텀벙 물에 뛰어들었다.
“!”
윤서는 앞을 가로막는 호위 내관들을 밀어내며 온 힘을 다해 외쳤다.
“홍위야! 잎새뜨기! 잎새뜨기!”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이 외침이 부디 홍위의 귀에 가 닿기를 기도하며, 윤서는 왼손으로 부푼 배를 감싸고, 오른손으론 머리를 짓누르는 거추장스러운 가체를 뜯어 내던졌다.
관람용이기에 배는 강 중간에 정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서둘러 닻을 끌어올리며 노를 저어 빠른 유속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느리고, 또 너무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마마님, 아이고, 마마님!”
“윤서야!”
만류하듯 다급하게 달려드는 손길을 뿌리치고 오른쪽 어깨 아래 단추를 북 뜯어 단삼을 벗어던진 후 윤서는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다.
윤서는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솟구쳤다가 머리부터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리고 흐르는 물살을 타고 배의 뒤편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뿌연 시야에는 온통 허우적거리는 흰 바지와 춤을 추듯 나풀거리는 푸른 단령 자락뿐이었다.
홍위와 다른 왕손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으나 수영이 서툴러 오히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호위 내관들의 다급한 다리짓이었다.
푸하.
윤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내뱉었다. 열흘 전 내린 비로 수심이 깊어진 한강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홍위가 입은 아청색 융복이 저만치 보였다.
윤서는 다시 잠수하여 내관들 다리 밑을 지나친 후 수면으로 떠올랐다.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이 없으니 이젠 물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헤엄칠 수 있다.
’홍위는 지난 여름 내내 잎새뜨기를 배웠다. 겹겹이 벙벙한 비단옷을 입었으니 부력도 있을 것이고.‘
쿵쿵, 천둥처럼 귀를 울리는 불안을 달래며 윤서는 온 힘을 다해 아청색 형체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몸은 아주 가볍게 떠 쑥쑥 앞으로 나갔다. 배 속의 양수가 부레처럼 작용해 평소보다 훨씬 쉽게 몸이 뜬다는 걸 윤서는 몇 번의 수영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뒤에서 철썩 배 내리는 소리와 함께 착착 노를 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배를 띄워 홍위를 구하러 오는 구원의 소리를 들으며 윤서는 빠르게 홍위를 향해, 내 소중한 아이를 향해 미친 듯이 물살을 갈랐다.
20m, 15m, 10m, 8m.
거의 다가갔을 때 윤서는 홍위가 잎새뜨기 자세로 하늘을 보며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홍위야!”
윤서는 홍위의 목덜미 옷깃을 낚아채며 소리쳤다.
“홍위야. 내가 왔어.”
“으앙, 거가 나잉야!”
윤서가 오자 비로소 안도한 홍위가 으앙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목을 감아 매달렸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윤서는 왼손으로 홍위의 엉덩이를 받쳐 안고, 오른손과 다리로 물을 휘저으며 물속으로 몸을 세웠다. 양수 덕분에 비치볼을 품에 안은 듯 몸이 둥둥 떴다.
“아기씨, 다른 사람은?”
아까 ‘도원군’과 ‘마마님’ 하는 외침을 들은 것 같은데.
“떠내여 갔떠. 저기, 저기오. 입새 뜨기 못해서!”
(떠내려 갔어. 저기, 저기로. 잎새 뜨기 못해서!)
홍위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자색 옷자락과 분홍색 치맛자락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윤서야! 홍위야!”
“세손 각하! 마마님!”
때마침 작은 배가 빠르게 다가왔다. 이향과 호위 내관 수장 천가가 노 젓는 내관 넷과 함께 탄 배였다.
그 뒤로 열 척이 넘는 작은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영 시범을 보이던 수륙군이 소형 배에 올라 달려온 것이었다.
이향의 배가 홍위와 윤서 옆으로 바싹 붙었다.
“홍위야, 윤서야! 이리, 이리 올라오너라.”
이향이 배 가장자리에 서 홍위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호위 내관 천가가 무게가 쏠려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이향의 허리를 잡고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아밤마마! 아밤마마! 저기 도원군! 도원군이, 빠쪘쪄요! 홍, 홍 상궁이 미어쪄요!”
(아바마마! 아바마마! 저기 도원군! 도원군이, 빠졌어요! 홍, 홍 상궁이 밀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