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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95화 (95/255)

제 95화. 수양 대군과 한명회의 유구국 행 (1)

“윤서야. 수양이 써 보낸 보고서니라. 한번 읽어 보거라.”

지방 수령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부당한 방납 이익을 취한 죄목으로 한확이 파직되어 평안도 정주로 유배를 떠나던 날이었다.

세종께서 오전 일찍 윤서를 천추전으로 부르셔서 수양 대군이 대마도에서부터 상송포(上松浦, 나가사키), 방박량진(房泊兩津, 사쓰마시) 등지에 머물며 작성해 올린 보고서를 보여주셨다.

유구국을 향해 항해를 떠난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수양 대군은 이제 겨우 방박량진(사쓰마시)을 지나고 있었다.

일정이 이렇게 지체되는 것은 수양 대군이 항해하는 도중 들르는 주요 거점 도시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 일대 유력 가문의 인사들을 접견하고 쌀 열 섬씩을 선물로 나눠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일대의 유력 가문과 왜적 떼의 두목까지 만났고, 일지도를 거쳐 또 상송포(나가사키)로 건너가 한 달을 넘게 머물며 그 일대의 유력 지배 가문과 가신 가문을 만났다.

그리고 현재는 방박량진(사쓰마시)에 머물면서 그 지역 지배 가문과 가신 가문을 만나고, 일본의 각 지방 세력이 유구국과 그 아래 남만의 세력과 어떻게 교류하고 무역하는지 상세히 조사하고 있었다.

수양 대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처음에 세종과 이향은 의아해했으나, 한확의 일을 처리하면서 국제 외교 관계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에는 사람을 보내 수양 대군의 외교 행보를 독려하고 계셨다

그리고 선물용으로 가져간 쌀이 바닥나면 증서를 발행해 동래 부산포에 와서 받아 가도록 하라는 어명도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국외로 내쳐진다는 불안감에 떠날 때는 몹시 의기소침해 있던 수양 대군은 한남군이 어머니 귀인 양씨에게 은밀하게 보내온 서신 속 표현에 따르면 ‘꼬리를 한껏 펼친 수탉처럼 뻐기면서 마치 순행 나온 황제라도 된 것처럼 왜의 세력을 상대하고 있다’고 한다.

윤서는 세종께서 건네주신 수양 대군의 보고서를 받아서 찬찬히 읽었다. 조선에 도착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면서 윤서는 작문은 능숙하게 하지 못해도 읽고 대강의 뜻을 이해할 정도로 한자에 능숙해졌다.

“와, 전하. 이대로만 조사해 오시면 이 항해로를 따라 우리 조선도 남만과 교류하며 초석과 우각을 마음껏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쪽에서 만드는 빼어난 물품을 팔 수 있는 방안도 많이 보입니다, 전하.”

의례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수양 대군의 보고서는 도표를 활용하여 각 지역의 유력 가문의 이름과 현재 가주, 그를 모시는 가신 세력의 이름, 무기 종류와 병사의 수, 화폐의 쓰임새, 지역 특산품, 조선과 중국에 대해 가진 외교적 태도, 특산품, 주로 수입하는 물품의 종류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지?”

수양 대군을 칭찬하는 윤서의 감탄에 반사적으로 기분 좋게 얼굴을 풀으셨던 세종께서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내 다시 얼굴을 굳히셨다.

“그래. 여기 나온 정보만 가지고도 우리 조선의 국부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이 많이 보이는구나. 그런데,”

“예, 전하.”

“왜 다른 말을 더 덧붙이지 않는 것이냐?”

“예?”

“너답지 않게, 왜 더 말하지 않는 것이냐?”

“!”

윤서는 세종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눈치챘다.

그러나 윤서는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못 알아들은 척 눈을 깜빡거렸다.

윤서가 이리 신중하게 처신하게 된 것은 3월 말, 단천 은광 개발의 전체 틀을 완비해 놓고 동궁으로 돌아온 엄 상전의 충고 때문이었다.

엄 상전은 방납 비리를 고발하는 벽서의 뒤에 윤서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을 베껴 퍼트린 비구니가 묘향산 골짜기 깊은 암자로 숨어들 수 있게 은밀하게 주선하였다.

그러면서 윤서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하였다.

“일을 치밀하게 성사시키는 솜씨는 칭송할 만하나, 권 승휘 마마님. 어떤 상황에서도 벽서나 유모의 기록 뒤에 마마님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전하께 인정하셔선 아니 됩니다. 전하께서 확실한 증거를 손에 쥐고 하문하실 때조차 모르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부인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생사가 달린 문제의 처결권은 군주만이 쥐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엄자치가 태종부터 세종, 그리고 이향까지 가까이 모시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군주는 사람을 죽이는 계책을 내는 자를 본능적으로 꺼린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현명한 신하는 다른 이의 잘못을 고발할 때 비위 사실만을 고할 뿐, 그자를 어찌 처벌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형까지를 주청 드려서는 아니 된다고 윤서에게 충고했다.

“군주도 인간인지라 자신이 누군가를 죽게 하였다는 사실을 기꺼워할 리가요. 훗날 자신이 죽인 이의 죽음을 두고 군주는 스스로 책임을 지기보단 죽이라 주청하였던 신하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러니 마마님께선 뒷공작을 벌여도 앞에서는 세상 자비로운 듯, 너그러운 듯 행세하여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충고는 군주 대대로 절대적 신임을 받아온 엄자치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서는 세종께서 다른 때처럼 심중의 말을 숨기지 말고 털어놓으라 명하시는데도 못 알아들은 척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세종께서 뒤를 향해 손을 흔드셨다.

천 상궁이 두꺼운 종이 뭉치를 가져와 윤서 앞에 내려놓았다.

“읽고, 두 보고서의 차이에 대해 고하거라.”

세종의 명에 윤서는 앞의 몇 장을 읽다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신숙주가, 작성한 것입니까?”

“그래.”

“······.”

천 상궁이 가져온 종이 뭉치는 지난해 일본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신숙주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그런데 그 세부 내용이 놀랍도록 수양 대군이 작성해 올린 보고서와 유사하였다.

굳이 보여주지 않으셔도 되련만.

아까 윤서가 극찬할 때 설핏 보였던 뿌듯한 웃음은 세종께서 수양 대군을, 그 많은 아들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계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징표였다.

그런 군주께서 아들의 후궁에 불과한 며느리에게 이런 치부를 내보이시는 의도는, 아까 캐물으시던 의도와 같았다.

윤서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같은 곳을 돌아보셨기에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하오나 신숙주는 신하의 입장에서 조선에 도움이 될 측면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여기,”

윤서는

[오랑캐를 대하는 방법은 나가 싸움에 있지 않고 내정을 먼저 바로 세우는 데 있으며, 외방에 있지 않고 나라 안 조정에 있으며, 전쟁하는 데 있지 않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다.]

라고 쓴 구절을 짚어 보였다.

“이는 모두 신하가 군주께 조언 드리는 충정의 말입니다. 하오나 수양 대군의 보고서는 그와 결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결이 다른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수양의 결은

[여기 방박량진(사쓰마시)은 일찍이 도진(시마즈) 가문이 지배하는 곳으로 유구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유구국에서 도진 가문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방안을 찾는다면 향후 우리 조선에 더욱 유리할 것입니다.]

하는 문구에서 보이듯 지배 관계를 염두에 두고 세를 분석하는 방식이었다.

‘세종께서는 수양의 야망을 읽으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왜 그에 대해서 고하지 않는지 추궁하시는 것이다.’

윤서는 가만가만 본격적으로 부풀기 시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어심을 헤아리기 위해 애썼다.

‘왜 이향에게 경고하지 않으시고 내게 말씀을 하시는가.’

그것은 연일 바쁜 이향에 대한 배려이자, 윤서를 향한 경고였다.

이향은 방납 비리 죄목으로 박종우, 윤번, 윤사로 등에게서 몰수한 재물을 기반으로 화폐 유통을 준비하고, 가뭄에 대비해 전국의 저수지와 보를 새로 파고, 수운과 육로를 정비해 공납을 쌀로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 여러 과학 기물 개발을 독려하고, 여러 여진 부족과 일본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신을 만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유 없이 일하는 아들에게 수양의 야망을 경고했다가 자칫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 두려운 아비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윤서에게는 경고였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아이가 태어나 수양 대군의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무언의 경고. 또한 내 손으로는 차마 행할 수 없으니 네가 홍위를 위해, 뱃속의 그 아이를 위해 나서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하셨다. 또한 한확의 처리에서 보여준 너의 치밀함을 믿으신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왕가의 일은 이렇게나 복잡하고 미묘하였다.

“그래서, 권가야.”

윤서가 무의식적으로 배를 쓸며 생각에 잠긴 모습을 지켜보시던 세종께서 답을 재촉하셨다.

윤서는 힘껏 헤아린 어심에 맞춰 대답을 올렸다.

“여기 방박량진이 무역하기에 아주 좋아 보입니다, 전하. 전하께서 상공업을 육성하여 조선의 가난을 물리치고자 하신다고 명을 내리시면 제가 면포 공장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유구 모두 질 좋은 면포가 늘 부족하니 이곳 방박량진에 북경에서처럼 상점을 내고 싶습니다.”

쓰시마를 무역 거점으로 삼아 물품을 사고팔면서 동시에 일본의 동태도 살피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유력 지배 가문 인사들을 일일이 접견하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고 있는 수양 대군의 동향 또한 미리 파악하겠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래, 그리하거라. 필요한 자금은 내수사에서 내어줄 것이니.”

세종의 얼굴이 밝아지셨다. 원하시던 대답이었다.

“예, 전하. 상재가 빼어난 이들은 권력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아주 빼어납니다. 큰 재물은 늘 권력과 손을 잡고 가기 때문입니다.”

윤서는 그리 아뢰고 천추전을 나왔다.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고 있었다.

‘이따 희아랑 홍위랑 수영을 해야겠다.’

윤서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한확의 일을 처리하고 난 후 윤서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홍위와의 관계였다.

출산 후 몸조리를 하느라 잠시 못 만나게 되면 홍위가 아기 때문에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윤서도, 그리고 윤서의 우려를 들은 이향도 세심하게 홍위를 배려하고 있었다.

****

그 시각 쓰시마 번의 방박량진에 머물며 도진 가문의 인사들과 긴밀하게 친교를 나누는 수양 대군은 이런 삶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기 쓰시마 번의 번주들처럼 해외로 무역선을 보내며 세력을 키우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대마도를 거쳐 뒤따라온 집사에게서 한양의 소식을 들었다.

“무어라, 한확의 처지가 급변하였다고?”

“예. 윤번 대감께서도 방납으로 얻은 부당 이익이라며 천 석에 해당하는 면포를 바쳐야 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시고요.”

“하! 그럼 우리 혼사는.”

“마님께서 추문에 휩싸인 가문과의 혼인 약조는 없던 일로 하여야 한다고,”

“아니지요, 아니지요. 이제 막 여덟 살밖에 안 된 아기를 두고 벌써 파혼이라니요. 명의 정세가 어찌 변할 줄 알고 그리 함부로 파혼을 논하신답니까?”

갑자기 다다미 방 저쪽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데 저리 무엄하게 말을 엿듣게 둔 게야?”

“아, 너른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면서 막무가내로 따라온 한씨 가문 분이십니다. 한번 불러서 보시지요. 나리, 이리로 건너오십시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등장하였다.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 공신 한상질을 조부로 두고, 개국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한상경을 종조부로 둔 명문가의 손자이나 여기저기 떠돌며 놀기 좋아해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한 한씨 가문의 한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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