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화. 세종의 관용, 세종의 잔혹
세종이 한확을 편전으로 부르신 것은 4월 13일, 한양에 돌아온 지 열이틀이 훌쩍 지난 날이었다.
그간 한확은 초조한 마음으로 입궐하라는 어명을 기다려야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먼 사행길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조정 대신과 종친들로 연일 집이 잔칫집처럼 북적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걸하는 거지패나 시주를 원하는 중들까지도 찾아오지 않아 거대한 저택이 절간처럼 고요하였다. 세상의 인심은 이토록이나 변덕스럽고 무정하였다.
“추운 사행길을 오가느라 노고가 컸다. 또한 황제께 면복 두 벌과 상복 한 벌을 하사받아 왔으니, 그 또한 공이 컸다.”
다른 때 같으면 돌아온 날 바로 편전으로 부르셔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함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베풀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세종은 퇴청 시간이 가까운 늦은 오후, 오로지 세자만 배석한 채 어좌에 높이 앉아 한확을 맞이하였다. 구석에 붓을 든 사관이 둘이나 기척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대화 하나하나를 공식 기록으로 남겨 역사에 네가 얼마나 불경한 야망을 품었는지 박제해주지.’
세종은 엎드린 한확의 등을 보며 지난날 명의 황실을 뒷배로 두고 한확이 부려댄 오만을 마음껏 단죄할 생각에 쿡쿡 쑤시는 등의 통증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임금의 의도를 간파한 한확은 절을 올린 후, 엎드려 고하였다.
“전하, 신이 귀국길에 오를 때 황제께서 금 20냥쭝(1냥쭝은 10돈), 백은 200냥쭝과 각색 채견 50필, 저사오채수침정 5부 등을 하사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전하께 모두 바치오니, 부디 받아주시옵소서.”
한확은 일단 큰 재물을 바쳐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
한확의 말에 세종은 선왕 태종께서 살아계실 때 한확이 그의 누이 여비 한씨를 진헌하고 돌아와 명 황제에게 하사받은 금 50냥쭝 중 절반인 25냥쭝, 백은 600냥쭝 가운에 100냥쭝을 바치던 장면을 기억했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 한 해 거둬들이는 금이 총 200냥쭝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중 150냥쭝을 매년 명 황실에 조공해야 해서 그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열여덟 살이던 한확은 왕실 전체가 일 년에 겨우 소유하게 되는 황금 50냥쭝을 황제에게 하사받아 와 그 절반을 바치면서 태종 앞에서 그 자신이 명의 황자라도 된 양 그 기세가 아주 대단하게 거들먹거렸었다.
감히!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
세종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엎드려 있는 한확을 보며 외교에 있어 정확한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생하게 실감하였다.
명나라 황실과 조정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해 오란 세자의 밀명을 받고 간 수통관 김을현은 이렇게 고했다.
“한확이 명에서 황친으로 특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은 사실이오나 영락제나 선덕제가 살아계실 때 받던 대우와는 천지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때는 후궁의 인친으로 직접 황제를 알현하는 광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황제를 사적으로 따로 알현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김을현에 따르면 지금 명의 황제는 태감 왕진 등 환관의 무리에 둘러싸여 제대로 정사를 보지 않고 여색을 탐하며, 직접 외교 사절을 만나는 일도 드물다고 하였다.
황제가 내린 면복과 상복은 안남 등 다른 번국의 국왕에게도 하사하였는데, 이는 북쪽 몽골과 날로 긴장이 높아지는 정세에서 다른 번국들과 미리 관계를 공고히 해두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하였다.
김을현의 보고가 없었더라면 명 황제가 조선의 왕만 특별히 어여쁘게 여겨 면복을 하사하였다고 보고한 한확의 말만 믿고 크게 치하하였을 것이다.
또한 몽골과 명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는 정보를 듣지 못했다면, 향후 명나라가 몽골을 밀어내면 그 여파로 요동 남쪽으로 밀려 내려올 수 있고, 또 그에 밀린 여진족이 압록강을 건너올 수 있는 경우에도,
그리고 이제부터 준비를 착실히 해 다른 판세를 만들어 낼 가능성에도 대비할 계획을 시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종은 엎드린 한확을 흘겨보며 또 생각하셨다.
‘그러니 권윤서는 얼마나 치밀하고 영민한 것이냐.’
권 승휘는 이번 사신단이 북경에 갈 때 자신이 소유한 노비 중 상재(商才)가 빼어난 이들 열 명을 상단에 딸려 보냈다고 하였다. 북경에 비누와 의자, 그리고 희아가 설계한 조립품을 만들어 파는 상점을 내기 위해서였다.
“대국의 발전된 문물을 흡수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현지에 지부를 두고 무역을 하는 것입니다. 수양 대군께서 유구를 통해 저 남방의 물품을 가져오실 터이니, 저 또한 왕실 여인으로 조선의 물품을 팔아 명의 재화를 가져오고, 또 명 황실 내부의 사정도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권 승휘는 자신의 노비가 조선 출신 환관 정동을 만나 알아낸 사실을 고하였다.
“공신 부인 한씨는 붕어하신 태황태후를 극진하게 모신 공이 있어 황손의 훈육과 돌봄을 감독한다고 합니다. 선대의 후궁이기에 지금 당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긴 어려우나 장차 황제가 될 아기씨의 양육을 맡게 된다면 훗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하.”
뜻밖에도 권 승휘는 한확의 누이를 완전히 끊어내지는 말라고 조언하였다.
명 황궁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특별히 관리하여 유리하게 협력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김을현과 권 승휘의 정보까지 손에 쥔 덕에 세종께서는 냉철하게 한확을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명 황제의 인척이란 이유로 한확이 저지른 범죄를 그냥 두어야 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참으로 달라진 입장이었다.
또한 세종도 인간이신지라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을 읽으시면서 몇 번이나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으셔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 공녀들이 황제에게 진헌되어 황궁 내 암투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황제를 따라 순장되거나 한 것은 모두 조선의 힘이 약해서이니, 이는 곧 조선 임금의 잘못이기도 하다고, 세종은 가슴 아프게 반성하셨다.
‘그런데 네놈은 누이를 그리 험하게 보내고도 사사로운 이익만 도모하다가 세가 불리해지자 그 더러운 재물로 나를 회유하려 들다니!’
인사를 올리자마자 재물부터 바치겠다고 나선 한확에 대한 세종의 노여움과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영락 15년에 네가 황제께 하사받은 금의 절반과 은의 일부를 바쳤을 때 선왕께서 받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돌려주셨거늘, 내가 어찌 받겠느냐. 두어라. 그 금과 비단 모두는 너의 누이로 인해 네가 받은 것이니.”
“!”
한확은 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겉으로는 온화하게 들리는 전하의 말씀 속엔 조롱이 들어 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누이 팔아 쌓은 재물’이라는 조롱이.
하아, 이십 년 넘게 명 황실의 인척으로 누려온 명예가, 권력이 여기서 무너지는가!
그럴 수 없다! 아직은, 아직은 누이가 명 황궁에 있고 황후와도 사이가 긴밀하니!
한확이 냉철하게 사태를 분석할 때 또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누이의 서신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하거라. 여기, ‘제가 여기 명 황실에 있으니, 조선의 왕실에도 우리 조카가 있다면 그 얼마나 돈독한 상호 인척이 되는 것이겠습니까.’란 뜻이 무엇인지 상세히 고하거라.”
“그것은,”
전하께서 말씀하신 구절은 누이 공신 부인이 쓴 서신의 한 구절이었다.
[황제께서 칙서에서 ‘조종으로부터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져 왔으니’ 라 하신 말씀은 저의 언니 여비와 저 공신 부인이 황실과 맺은 황혼을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하오니 저의 짧은 소견으로, 조선의 왕실에 우리 한씨 가문의 여식이 있다면 저를 가교로 명 황실과 조선의 왕실이 혼맥으로 이어져 아름다운 인연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이렇게 두리뭉실하고 간곡하게 쓴 표현을 전하께서는 노골적인 언사로 바꾸어 하문하고 계셨다.
한확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그 말속에 든 경고, ‘여기서 더 불경하게 나오면 내 너와 네 가문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란 경고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한확은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을 고하였다.
“전하, 공신 부인의 말은 칙서에 나온 황제의 말씀을 황궁 내 사정에 맞춰 풀이한 것으로, 상호 국혼을 맺어서 명 황실과 더 공고한 관계를 구축하였으면 좋겠다는 누이의 바람을 담은 구절입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임금의 어좌에서 조금 낮은 자리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세자가 하문하였다.
“그럼, 한 대감. 그 구절은 공신 부인의 개인적인 바람을 담은 것이지 명 황제의 공식적인 뜻이 아니란 것이오?”
한확은 고개를 들어 세자의 옥안을 대하였다.
누구를 대하든 부드러운 낯빛을 잃지 않던 세자가 차가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감히 나를 사위로 욕심을 내었느냐? 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한확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고하였다.
“공신 부인의 개인적인 바람만은 아닙니다, 세자 저하. 누이인 공신 부인이 태황태후의 명을 받아 현 황후의 황궁 적응을 돕고 황자와 황녀의 훈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이가 현 황후마마와 지극히 가까운 관계인지라, 이 혼사에는 명 황후마마의 의중이 들어 있습니다.”
“······.”
“······.”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붕어한 태황태후가 생전에 예법과 학문에 밝은 공신 부인 한씨에게 황궁 생활에 낯선 어린 황후를 도우라 명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에 따라 현재 공신 부인이 황후의 큰 신뢰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윤서가 한학의 가문에 크나큰 치욕을 박제해 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신 부인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지는 말라고 한 것인가?’
한확의 대답을 들으면서 이향이 생각할 때였다.
“좋다! 명의 황후께서 그리도 우리 조선 왕실과의 간접적인 인척 관계를 원한다면, 그리고 또 너의 누이가 그걸 그렇게 원한다면 그리하도록 하지.”
세종께서 말씀하셨다.
“저, 전하!”
한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오간 대화로 볼 때 죽이진 않겠지만 국혼은 허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께서 빙글 웃으면서 물으셨다.
“이미 너의 셋째 딸과 계양군이 혼인을 하지 않았느냐? 왕의 아들에겐 서자니 적자니 하는 개념이 없는데, 너의 누이 공신 부인은 계양군이 서자라서 그러한 것이냐?”
“!”
한확의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잘못 답을 올렸다간 자칫 왕실의 권위를 부정한 불경죄로 몰릴 수 있다.
하아, 수양 대군과 그의 부인 윤씨 일파, 또 홍씨 일파의 부추김에 공연히 세자빈 자리를 탐내었다가 그간 명 황실의 인척으로 누려오던 권세를 다 잃게 되었구나.
한확은 뒤늦게 탄식했다.
“아! 아닙니다, 전하. 감히 어찌 그리 생각하오리까? 제게 여식이 많으니 하나를 더 욕심내었을 뿐입니다.”
“그으래?”
“예, 전하. 제 두 누이가 황실에 들어갔으니 조선 왕실에도 딸이 둘이 들어가길 바랐을 뿐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구차해지기만 하는 한확의 변명에 세종께서는 이십 년이 넘게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듯했다.
감히 왕의 여인인 나인과 간통하고, 함부로 닫힌 성문을 열고 들어온, 역모로 죽여버려도 될 대역죄를 저지른 꼴을 보면서도 처벌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치욕을 오늘에야!
오늘에야 벌하고 있으니!
“왕실의 자손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렸다?”
“저, 전하!”
한확의 머릿속에 고모를 닮아 영민하고 어여쁜 딸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갔다.
왕실의 자손이기만 하면 된다니. 어떤 개망나니를 주시려고!
그러나 가문의 평판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있는 것은 명 황실의 누이에 기댄 정치적인 혼맥뿐이었다.
“···예, 전하. 소신과 누이가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알겠다. 나중에 적절한 이로 정해 통고를 할 터이니, 그에 대해서는 네가 너의 누이를 통해 명 황후께 잘 말씀드리거라. 우리 조정 차원에서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다하겠다고 답을 올릴 터이니.”
누가 되었든 종친 나부랭이 하나 던져주겠다는 뜻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한확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방납에 관여한 것에 대해서 조만간 대대적인 문책이 있을 것이다.”
“!”
대대적인 문책이란 직첩을 회수하고 그간 비리로 축적한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뜻이었다.
한확은 비로소 국왕이 자신에게 관용을 베푸는 척하면서 실은 자비 없이 처벌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조 국가에서 왕의 의지에 대놓고 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사신을 떠나기 전에, 세자빈 자리를 욕심내기 전에는 그리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그리할 수 있었는데······.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도성이 너무 시끄러우니 인적 없는 곳에서 몇 년 근신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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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세종과 이향은 외교 관계에서 '정보전'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중국과 여진, 일본, 유구 등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그에 기반해 체계적인 외교 전략을 세우는 정책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한편, 대마도에서 체류하다 유구국으로 향한 수양 대군 측에서 연락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