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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93화 (93/255)

제 93화.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

[오늘처럼 소쩍새가 구슬피 우는 밤이면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아기씨의 마지막 비명이 들린다.

유모, 나는 가네.

배꽃처럼 고왔던 우리 아기씨는 고작 스물네 해를 살고 이역만리 화려한 황궁에서 이 한마디를 마치기도 전에 목이 매달려 세상을 떠났다.

아기씨가 죽어 명의 황제 옆에 묻히기로 되어 있던 밤, 나와 찬모는 돌솥에 지은 흰 쌀밥에 아기씨 생전 가장 좋아하신 명란젓을 참기름에 버무려 올렸다. 마지막 밥 한술까지 눈물로 비워내신 아기씨는 그간 황실에서 하사받은 비단이며 패물을 모두 나와 찬모에게 주시며,

“오랑캐 말은 북풍에 기대 서고,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는 시가 있어, 유모. 나 죽고 나거든 유모는 이거 다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가. 가서 내가 넋으로라도 돌아갈 수 있게 부처님께 기도해 줘.”

이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살 만큼 산 늙은이의 귀향 따위가 뭣이 그리 중하다고, 새로 등극한 황제가 아비의 무덤에 함께 들어갈 후궁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들르자 아기씨는 또 울며 “우리 유모가 노령이니 본국에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고 끝까지 나를 위해 부탁했다.

선녀보다 더 곱게 차려입은 아기씨가 작은 발 받침에 올라가 들보에 길게 내려진 비단 끈에 목을 들이밀 때 구석에 서 있던 나는 그만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으려 하였으나,

“유모, 나는 가네.”

그 한마디를 끝마치기도 전, 무정한 환관 놈이 발밑의 받침을 빼내 그대로 허공에 내걸리신 아기씨의 시신을 거두어야 하기에 차마 따라 죽지를 못하였다.

내 배불러 나은 것은 아니나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순간부터 내 손으로 키운, 자식보다 더 소중한 이의 싸늘한 시신을 염하는 그 기막힌 심정을 그대들은 아는가.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라 부르고 남편을 잃으면 과부라 부르는데 자식을 잃은 부모를 부르는 말은 없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불리지 못할 지극한 아픔 속에서 눈물로 어여쁜 아기씨의 몸을 씻겨 묻었노니.

그러고도 차마 죽지 못한 것은 내 주인 가문의 탐욕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기씨처럼 어여쁜 딸이 또 있었으니, 필시 또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 올릴 줄을 알아 나는 명국의 태황태후께 입 안의 혀처럼 굴며 충성을 다 바쳤노라.]

“이, 이게 대체!”

한확은 손을 벌벌 떨었다.

“김흑, 김흑, 그년은 어디에 있느냐?”

“유모는 벌써 죽은 지 세 해나 지났지 않습니까?”

“그, 그럼 이것은 대체 누가, 누가 썼다는 말이야?”

“모릅니다. 항간에선 유모가 죽을 때까지 있었던 암자의 비구니가 듣고 쓴 이야기라고도 하고,”

“하! 잡아 내거라! 그 비구니를 잡아 내!”

“하오나 도리가 없습니다, 아버님. 그 암자는 이미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 이야기는 지금 퍼질 대로 다 퍼져, 거지패들조차 구걸할 때 ‘유모, 나 가기 전에 명란젓에 뜨끈한 밥 한술 주오.’ 하며 동냥질하는 판국이에요!”

계양군의 부인 한씨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

3월이 되면서 한양의 저잣거리에 [여비 한씨 유모의 기록]이란 제목을 달고 나돌기 시작한 이 허름한 책자는 처음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아리따운 미인의 가여운 운명만큼 세간의 호기심과 연민을 자아내는 것은 드물다.

태종 때부터 전국에서 뽑혀 명나라에 진상된 빼어난 미인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그중 하나를 모신 유모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그려진 이 책은, 처음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현인비 권씨부터 이천팔백 명이 넘게 죽은 어여(魚呂)의 난에 휘말려 죽은 다른 공녀, 그리고 영락제 사후 순장 당한 여비 한씨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이국에서 죽어간 미인의 가련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자 쌀푼이나 얻어내기 위해 거지패와 사당패가 더욱 애간장이 녹도록 극화하여 공연하였는데, 특히 가장 극적인 장면인 여비 한씨의 죽음이었다. 그 때문에 순장 당한 여비 한씨와, 그 이후 또 공녀로 진상된 동생 공신 부인 한씨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다소 딱딱한 문체로 건조하게 쓰인 <육아보감>, 아이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기 위해 쉽고 재미있게 쓰인 <업동이와 신령님의 지팡이> 등의 이야기 책과 달리 이 책은 또한 문체가 아주 서정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반가의 여식이나 부인들은 물론 한문을 주로 써온 사대부 식자들조차 이 책이 가진 빼어난 표현성에 주목하여 정음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고, 창작물을 지어내기 시작한 것도 부수적인 현상이었다.

*****

“글로 세상을 평정해보고 싶다고 노래하더니, 소원 이루셨네요, 유 승휘.”

산당화가 섬뜩하도록 붉게 피어난 궐의 깊숙한 후원.

윤서는 유 승휘와 함께 꽃 구경을 빙자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뒤따르는 상궁과 나인을 모두 스무 걸음 밖으로 멀찌감치 물린 후, 꽃술을 들여다보는 척 머리를 붙이고 이야기를 나눴다.

“사연을 대강 말해준 저조차 유 승휘가 쓴 글을 읽으면서 여러 번 목이 메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생생하게 글을 잘 썼어요?”

“아이, 참. 일종의 접신 같았어요. 여비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 밤마다 목이 졸리는 꿈을 꿨답니다. 또 글을 적어 내려갈 땐 늘 오른쪽 어깨가 시렸어요. 현비 권씨, 여비 한씨가 옆에 서서 일러주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푸석해진 얼굴을 찡그리며 유 승휘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우리가 써서 배포했다는 것을 들키진 않겠지요?”

“그건, 염려 마세요. 유 승휘가 썼다는 걸 아는 이는 나 혼자뿐이고 그걸 서툰 글씨로 닥종이에 베껴 운종가 등지에 처음 오십 부를 뿌렸던 이는 지금 묘향산 깊은 골짜기 암자로 들어가 버렸어요. 지금 세간에 돌고 있는 것은 읽은 이들이 베껴 쓴 것들이니 누가 처음 배포했는지 찾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요. 권 승휘가 한 일이니 어련하려고요. 이 이야기는 반드시 알려져서, 개 같은 한가 놈 얼굴에 똥을 칠해놔야 합니다! 처음 여비 한씨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누이가 그렇게 목이 매달려 죽었는데도 또 누이를 들이밀다니요.”

일순 여비 한씨의 혼이 쓰이기라도 한 듯 유 승휘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이를 으득 갈았다.

제 아무리 많은 재물과 드높은 권세를 누린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누이의 목숨값으로 이루어냈다는 꼬리표를 한확과 그의 가문에 영영 붙여버린 두 사람은 느긋하게 늦봄 햇살을 걸어 동궁으로 향했다.

“이번에 쓰는 이야기는 순수 창작이에요. 빈한한 가문 탓에 궁녀로 팔려 들어온 어여쁜 나인이 내금위의 금군 하나와 사랑에 빠지는 것인데요.”

유 승휘가 목소리를 낮춰 또 종알종알 신작의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윤서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춰 섰다.

“쉿! 궁녀와 금군이라니요. 이거야말로 죽을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 모르시는 말씀. 금단의 사랑일수록 더 애절하고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다는 거! 제 이 눈을 좀 보세요. 글 쓰다가 하도 감정이 복받쳐 우느라고 눈가가 다 짓물렀다니까요.”

유 승휘는 윤서의 손을 끌어다 제 눈가를 짚게 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위대한 사랑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게 마련입니다. 서툴게 사랑을 시작한 제 주인공 이화가 어떻게 끝내 사랑을 이뤄내는지, 두고 보세요. 조선의 모든 이들이 우리 이화와 장용호의 사랑을 응원하게 될 테니까요.”

유 승휘는 벌써 자신이 지어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 몽롱한 눈빛이었다.

“많이 써 두세요. 당장 펴내기는 어렵지만 저하께서 정음에 맞는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계시고, 내년부터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하면 이야기 책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질 것입니다.”

그렇게 유 승휘와 이야기를 나누고 거처로 돌아왔더니 홍위가 세손 강서원의 수업을 끝마치고 아지 이씨 부인의 손을 잡고 달려왔다.

윤서는 오매육을 계피, 백단향 등과 꿀에 버무려 폭 고아낸 것을 냉수에 타서 먹는 제호탕을 내어오라 이른 후 홍위의 손을 잡고 물었다.

“우리 세손 각하! 오늘은 무엇을 배우셨어요?”

홍위는 땀이 송글송글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학으 배우고, 또 활또기하고 말타기 했떠.”

(소학을 배우고, 또 활쏘기하고 말타기 했어.)

“오, 말타기! 말 타고 달릴 수 있어요? 이담에 같이 마포나루까지 달려가면 좋을 텐데.”

“아딕은 못 달려. 자던이가 고삐 잡고 타밧타밧 걸었져. 그언데,”

(아직은 못 달려. 자선이가 고삐 잡고 타박타박 걸었어. 그런데,)

홍위는 때마침 중비가 내온 제호탕을 단숨에 다 마시고는 윤서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치예가 우었떠.”

(치례가 울었어.)

“왜요? 왜, 한치례가 울었어요?”

“치예가 말 타 때 안당을 자랑했떠. 멍나라 황제가 준 거라고. 근데 오단군이 고모 목슘 파야 얻은 거라고 말했떠. 근데 고모 목슘은 어떠케 파얐어?”

(치례가 말 탈 때 안장을 자랑했어. 명나라 황제가 준 거라고. 근데 오산군이 고모 목숨 팔아 얻은 거라고 말했어. 근데 고모 목숨은 어떻게 팔았어?)

어찌 된 상황인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날이 따뜻해지자 세손 강서원에서는 홍위를 비롯하여 배동들에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왕실에서 내준 말을 타기도 하고, 또 평소 타는 말이 있으면 가져와 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한확의 셋째 아들 한치례는 명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은 안장을 얹은 말을 끌고 와 자랑했을 것이다.

“이거, 상국의 위대한 황제께서 우리 아버님한테 하사하신 상어 가죽 안장이야.”

그걸 보고 성격이 괄괄한 임영 대군의 아들 오산군이 한마디 한 것이었다.

“낯짝도 두껍네. 고모 목숨 팔아 얻은 안장을 자랑하고.”

이렇게 아이들에게까지 한씨 가문의 비화가 알려지고 말았다.

윤서는 홍위를 품에 안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의 목숨을 팔았다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한치례의 고모님이 명나라 황실에서 황제를 따라 죽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장차 세자가 되시고 또 국왕이 되실 우리 아기씨가 입에 담으시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니 입에 담지 마세요.”

“응! 우어더 부땅했떠.”

(응! 울어서 불쌍했어.)

홍위가 한확의 셋째 아들 한치례를 가여워할 만큼 지금 조정에서는 공신 부인 한씨의 서신을 놓고한창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한번 잘 못 된 일이라고 판단하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집현전의 부수찬 박팽년은 연일 강한 어조로 한확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신 등은 한확과 그의 일족인 공신 부인이 명나라 황실의 위명을 빌어 사사로이 국혼을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명나라가 아무리 대국이고 명 황실이 아무리 존귀하다 하나 함부로 국혼을 청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이는 우리 조선이 태조 대왕부터 주권을 명확히 가지고 상국을 예로서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모 부인은 황궁의 내궁에 깊숙이 목숨을 부지하는 과부로서 감히 황명에 빗대어 국혼을 논하는 불충 무도한 무례함을 저질렀습니다. 한확은 과부 된 누이의 광망한 발언을 저지하지 못할망정 부화뇌동하였습니다.

한씨 두 누이가 진실로 명 황실의 일원으로 우리 조선 왕실과 명 황실이 가까워지길 원하였다면 감히 국혼을 논하기 전에 머리 풀고 황제 앞에 엎드려 우리 태조 대왕께서 명나라의 대명회전에 참람하게도 전조의 역신 이인임의 자손으로 기록된 것을 수정해 달라 청해야 하였을 것입니다. 조종의 한으로 쌓인 중차대한 일은 미뤄두고 사적인 인연을 논하다니 이는 만고에 그릇된 탐욕으로 (중략)]

임금과 세자가 정확하게 정황을 파악한 후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답을 내렸는데도 박팽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성삼문과 신숙주도 박팽년과 뜻을 같이 하며 한확의 삭탈관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앙 정치에서 권신이 직첩을 빼앗기고 유배를 가는 일은 흔하였다.

"상세히 파악한 후 적절한 조치를 할 터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세종께서도 북경에서의 일이 어찌 되었는지 수통사로 다녀온 역관 김을현을 통해 정황을 파악한 후 그에 맞는 대응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계신 참이었다.

그러나 무슨 조치가 어떻게 내려지든 한확과 그의 가문의 평판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거지패들까지 손가락질하는 가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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