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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87화 (87/255)

제 87화. 새봄, 동생을 맞는 홍위는 (2)

윤서는 빠른 걸음으로 홍위와 아지(유모) 이씨 부인에게 다가섰다.

홍위는 여전히 입술을 비죽이며 이씨 뒤로 몸을 물렸다.

“무슨 일이에요?”

“나도 모르네. 강서원에서 수업이 끝나고 나오시길 기다렸는데, 나오실 때부터 이렇게 울먹거리시기만 하네.”

수업 중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윤서는 뒤에 서 있는 홍위의 전담 내관 자선을 바라보았다.

자선도 모른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세손 각하, 저 좀 보세요.”

윤서는 홍위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임신 20주가 지나면서 배가 제법 불러 이제 전처럼 쪼그리고 앉아 홍위와 눈을 맞추기가 불편했다.

“아우, 아직 땅이 찬데.”

만류하는 이씨 부인의 말을 살짝 고개를 흔들고 윤서는 홍위의 손을 부드럽게 당겨 잡았다.

차다는데도 아랑곳없이 땅 위에 앉는 윤서를 보고 홍위가 주춤주춤 끌려왔다.

윤서는 홍위를 당겨 그저 품에 안았다. 그러자 홍위도 윤서의 목에 팔을 감으며 몸을 붙였다.

윤서와 홍위는 보모 나인 시절에 하였듯 서로 침묵으로 체온을 나눴다. 엄마가 없는 설움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주눅이 들어 있던 홍위가 윤서의 따스한 품 안에서 위안을 얻었듯, 갑자기 조선에 떨어진 막막함과 두려움을 말랑거리는 뺨의 따스한 온기에서 용기를 얻었듯.

무엇인가에 골이 나 잔뜩 굳어 있던 홍위의 몸이 점차 부드럽게 풀린 후, 윤서는 몸을 떼어내고 홍위의 어깨를 양손으로 살짝 잡고 눈을 맞추고 물었다.

“들어가서 팥빵 먹을까요? 아기씨 오면 드리려고 중비더러 쪄 놓으라고 했어요.”

“···응!”

임신을 하면서 윤서는 엄마가 만들어주셨던 음식을 찾게 되었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 밀가루를 반죽해 만들어주셨던 찐빵, 찹쌀 꽈배기 등. 물론 가장 먹고 싶은 것은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매운 김치였지만, 당장 구할 수 없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노산대 편에 동남아 쪽 매운 고추를 부탁을 해 두었다.

그중에서 팥을 쪄서 꿀과 버무려 소로 만들어 넣은 팥빵을 홍위가 무척 좋아했다.

윤서는 몸을 일으키고 이씨 부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홍위를 데리고 가서 돌보겠다는 뜻이었다.

세손이 평소에는 자신을 잘 따르지만 슬프거나 아프거나 할 때엔 권가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이씨 부인이 어서 모시고 가라고 손짓했다.

윤서는 홍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곧 중비와 나인 둘이 팥빵과 과일 정과, 살짝 데운 우유를 소반에 올려 들어 왔다.

윤서는 물수건으로 홍위의 손을 닦아주고, 팥빵을 먹게 하였다.

달달한 팥빵을 두 개 먹고 우유까지 마시고 나자 홍위는 기분이 좀 풀렸는지 윤서에게 안기며 배시시 웃었다.

“무엇 때문에, 속상했어요?”

윤서가 묻자 홍위는 윤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 있다가 툭 말을 했다.

“아까, 처코야 노이하고 노았는데, 치예가 업똥이는 엄마가 업다고 그랬쪄.”

(아까, 척호(斥狐)야 놀이하고 놀았는데, 치례가 업동이는 엄마가 없다고 그랬어.)

“!”

윤서는 세손 강서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했다.

업동이는 윤서가 해리 포터 이야기를 조선 실정에 맞게 각색해서 펴낸 이야기 <업동이와 신령님의 지팡이>의 주인공이었다.

업동이는 어릴 적 역병에 부모님을 잃고 이모 집에서 거둬졌는데, 제대로 방이 없이 부엌 위 다락에서 자고 노비처럼 허드렛일로 부림을 당하다가 여덟 살 생일 날 신령님이 보낸 부엉이에게서 신성한 지팡이를 얻게 되어 구미호와 온갖 귀신을 물리치는 영험한 술사가 되는 꼬마였다.

새해 <육아보감>과 함께 정음으로 배포된 이 이야기는 지금 온 조선의 꼬맹이들을 열광하게 해서, 지팡이를 만든다고 하도 가지를 꺾어대어 나무들이 수난을 당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어똥이도 엄마가 업꼬, 잉어 공주도, ···엄마가 업쪄.”

(업동이도 엄마가 없고, 인어 공주도, ···엄마가 없어.)

“···아기씨!”

한확의 아들 치례가 업동이가 엄마가 없어서 구박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홍위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본 모양이었다.

“···호위도, 엄마가, 업쪄. 그이고,”

(···홍위도 엄마가, 없어. 그리고,)

영민한 홍위는 윤서가 들려준 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거의 엄마가 없거나, 있어도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엄마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윤서는 ‘그이고(그리고)’ 한 다음에 말을 더 잇지 못하는 홍위의 망설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챘다.

업동이가 엄마가 없어 이모 집에서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을 가엾게 보는 눈초리에 맞서 홍위는 아마 내게는 아지나 권 승휘가 있다고 반박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대해 한확의 아들 치례나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 신빈의 아들 담양군 중 머리가 굵은 누군가 말했을 것이다.

“진짜 엄마가 아니잖아. 게다가 권 승휘는 아이를 가졌어. 모든 엄마는 자기 자식을 더 예뻐하는 법이야!”

윤서에게 별별 이야기를 다 하던 홍위가 윤서 품에 안겨서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이런 종류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윤서의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또 윤서가 낳은 아들이 커가면 클수록 홍위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주변에는 늘 권력자의 마음속 약한 고리를 흔들어 총애와 권력과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이 가득할 것이므로.

윤서는 품에 안긴 홍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기씨께 왜 어마마마가 안 계셔요? 어마마마께서 안 계시면 아기씨와 군주 자가가 어떻게 태어나셨겠어요?”

“···으응?”

“어마마마께선 하늘에서 우리 아기씨를 늘 지켜보시면서 사랑하고 계세요. 너무 사랑하셔서 저를 아기씨한테 보낸 거에요.”

“···거가 나잉을 보냈져?”

홍위가 힘없이 물었다. 안 믿긴다는 태도였다.

윤서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예, 제가 예전에는 아기씨를 사랑하기는 해도 좀 멍청하고 굼떴잖아요. 그러다가 작년 봄에, 아기씨 여기 동궁으로 오시기 직전부터 갑자기 똑똑하고 씩씩해졌잖아요.”

“···멍텅이는 안니야.”

(···멍청이는 아니야.)

아유 다정하기도 하여라, 우리 홍위. 권가는 진짜 경계성 지능 장애 수준이었는데도. 윤서는 허리를 굽혀 홍위의 뺨에 뽀뽀를 하고 다시 속삭였다.

“근데 제가 갑자기 왜 똑똑해지고 용감해졌는지 아세요? 그거, 아기씨 어머니, 그러니까 세자빈께서 꿈에 제게 ‘아기씨를 지키거라!’ 하고 호통을 치셔서 그런 거에요.”

“으응?”

홍위가 몸을 일으켜 윤서를 바라보았다. 눈이 아주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기씨 어마마마한테 꿀밤 맞고 똑똑해져서 아기씨를 지키게 되고 또 전보다 훨씬 더 아기씨를 사랑하게 된 거에요. 제가 아기씨 사랑하는 거 안 느껴지세요? 전 아기씨가 저 사랑하는 거 느껴지는데. 저 울 때 등도 토닥여주시고, 맛있는 것도 먹으라고 주시고.”

윤서의 말에 홍위가 고개를 들고 윤서를 보았다.

윤서가 웃자 홍위도 따라 웃더니 쑥스러운 듯 다시 고개를 품에 묻고 중얼거렸다.

“나두 느꺼진다, 거가 나잉야.”

(나도 느껴진다, 거가 나인아.)

거가 나인.

어린 홍위에게 윤서는 늘 보모 나인으로 시작한 ‘권가 나인’이었다.

코끝이 찡하게 울리며 홍위가 느끼고 있는 혼란의 정체가 무엇인지 윤서는 이해했다.

한 번도 엄마를 가져본 적 없는 홍위는 작년에 갑자기 보모 나인 윤서를 엄마와 유사한 존재로 인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보모 나인이 또 갑자기 아바마마의 후궁이 되고, 이제 아바마마의 아이까지 가졌다고 한다.

여전히 애착하는 존재가 자꾸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서 어린 홍위는 더욱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와 달리 다섯 살까지 현덕 빈 품에서 자란 아홉 살 희아는 친모에 대한 기억을 확고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윤서를 친엄마로 생각하지 않았다. 폐위된 세자빈 봉씨와 다른 후궁들에게서 다양한 해코지를 당하며 자란 탓에, 이들과 달리 자신과 홍위에게 진심을 다하는 윤서를 보고 자신들 남매를 지켜줄 어른으로 마음을 열었을 뿐이다.

“업동이가 신령님이 보여준 업경(業鏡)을 통해서 보잖아요. 어머니가 업동이를 살리기 위해 두두리랑 싸우다 돌아가신 것을요. 그 후 업동이는 훨씬 더 용감해져서 괴물들을 물리치잖아요?”

“응! 그애서 업똥이는 가즘에 두두이가 찌은 자국이 있떠!”

(응! 그래서 업똥이는 가슴에 두두리가 찌른 자국이 있어!)

“예, 그 자국을 처음에는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어머니의 사랑의 표식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힘 쎈 영웅이 되어가잖아요. 아기씨한테는 그 가슴의 표식 대신 똑똑해진 제가 있는 거에요. 제가 어마마마께서 아기씨를 사랑하시는 표식이에요.”

19대 조상 현덕 왕후 권씨가 홍위를 위해 자신을 보낸 사실을 밝히자, 홍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내 흑요석같이 새카만 눈동자를 촉촉하게 적셨다.

“···진짜야?”

울먹이며 묻는 홍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윤서는 천천히,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진짜에요. 제 목숨을 걸고 단언하건데, 정말로 어마마마께서 아기씨를 위해 저를 보내셨어요.”

“으앙, 거가 나잉야!”

홍위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윤서는 홍위의 토실한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세손 아기씨는 나중에 아바마마처럼 세자가 되시고, 또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할바마마처럼 전하가 되실 거에요. 이 나라 백성을 고루 사랑하며 지배하는 임금이 되실, 귀한 분이 바로 아기씨에요. 이렇게 귀한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러워서 여러 가지 말을 하는 거에요. 그렇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듣더라도,”

“응, 무슨 마들 어떠케 듣더아도,”

(응, 무슨 말을 어떻게 듣더라도,)

“하늘에 계신 어마마마께서 아기씨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거,”

“응, 어마마마께져 날 무턱 사!랑하시는 거.”

“예, 그리고 저도, 세자 저하도, 매일 아기씨한테 덧셈과 뺄셈을 가르쳐주는 자가도 모두 아기씨를 무척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우리 매일 저녁마다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잖아요.”

“응, 눈나랑 조입도 하고, 덧뎀 뺄뎀도 하고. 몽몽이앙 둘래잡기도 하고.”

(응, 눈나랑 조립도 하고, 덧셈 뺄셈도 하고, 몽몽이랑 술래잡기도 하고.)

“예, 그렇게 우리가 즐겁게 사랑한 느낌을 잘 간직했다가 장차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셔야 할 귀한 분이 아기씨에요. 할바마마처럼, 또 아바마마처럼.”

“응!”

홍위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래도 또 홍위는 모친이 없는 결핍을 상기시키는 말을 듣고 서러워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오늘처럼 울먹거리며 속상해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모친의 빈 자리를 주변의 어른과 누이가 얼마나 공고히 채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엄마를 일찍 잃고도 사랑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아 영웅이 된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군주로 커갈 것이라고 윤서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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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

사신단을 따라 명나라에서 귀국하고 있는 노산대에게서 서신이 왔다.

사신단에 앞서 먼저 소식을 가지고 선래 통사 귀국길에 노산대가 자신의 수하도 함께 딸려 보낸 서찰이었다.

서신을 받자마자 박 상궁은 윤서의 처소로 들었다.

윤서는 조 상궁에게 몸이 으슬으슬하니 화로를 피워오라 일렀다.

나인이 가져온 화롯불을 앞에 두고 윤서는 박 상궁 외에 모두 물렸다.

조 상궁과 매금이가 대청마루 문 앞에 서서 혹여라도 엿듣는 이가 없는지 살폈다.

서신의 내용은 평범하였다.

북경에 비누와 목가구를 파는 상점을 내었는데, 아직 이문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에 환관으로 바쳐진 정동을 통해 태감 왕진 등에게 인삼 등과 비누를 함께 바쳤다는 내용이었다.

“비누 만드는 비법을 잘 간수해야 할 터인데요.”

윤서가 큰 소리로 말하자 박 상궁이 화로 위로 서신의 빈 여백을 올리며 흥, 코웃음을 쳤다.

“처음 선점이 중요하지. 왕진의 유세가 대단하다는데.”

말과 달리 행동은 빈틈이 없었다.

빈 여백에 열기가 닿자 톡 쏘는 냄새와 함께 종이 위로 누런 글씨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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