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화. 수학 천재 평창 군주
“나 이 바퀴의 톱니 말이야. 덜 부러지게 하는 거 알 것 같아!”
윤서가 서재 방에서 2월부터 시작하기로 한 학당 교재를 만들고 있는데 평창 군주 희아가 대청마루를 건너오며 소리쳤다.
손에 톱니바퀴 세 개를 들고서였다.
“붓 좀 빌려줘.”
윤서가 가끔 ‘우리 얼음 군주님’이라고 놀리듯 희아는 평소 서늘한 표정을 한 꼬마 미인이었다. 그렇지만 이따금 활기찬 표정으로 생생하게 눈빛을 빛낼 때가 있는데, 대개 지금처럼 바퀴 관련한 기물을 만들거나, 새로운 수학 문제를 풀어낼 때였다.
희아는 윤서의 책상 위에서 세붓을 들어 바퀴의 톱니 하나에 콕콕 찍어 먹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리고는, 윤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보여줄 것이 있어. 맞는지 봐줘.”
수학 문제든 톱니바퀴를 이용한 새 조립품이든, 뭐든 궁리하여 새로 만들면 으레 윤서에게 제일 먼저 보이며 설명하는 희아였기에 윤서는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윤서의 희아 손에 이끌려 대청마루를 건너 맞은편의 방으로 갔다.
방 안은 온통 여러 크기의 톱니바퀴와, 바퀴를 걸 수 있는 장치, 여러 목각 조립품으로 가득 차 있다.
지난 한 달간 희아는 잠잘 때와, 윤서에게 수학을 배우고 문제를 풀 때를 제외하고 내내 이 방에 머물렀다. 다양한 크기의 톱니바퀴로 여러 가지 동력 전달 체계를 설계하고, 다양한 모양의 조립품을 설계하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를 낼 테니까, 권 승휘가 맞춰봐. 아주 재미있는 문제야.”
희아가 바퀴 걸이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톱니바퀴를 걸며 윤서에게 말했다.
이 바퀴 걸이도 희아가 직접 설계도를 그려 목공 장인에게 만들도록 한 기물이었다. 톱니바퀴를 거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해서 기둥 사이의 폭을 조절해 다양한 크키의 톱니바퀴를 걸어 돌리는 장치였다.
먹물 스며든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게 맞춰 건 다음,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며 희아가 말했다.
“봐, 여기 먹물이 찍힌 두 개의 톱니가 지금 돌기 시작했잖아. 그럼 각각의 바퀴는 몇 바퀴를 돌아야 처음 시작점에서처럼 먹물 톱니가 다시 만날까?”
“······?”
그런 건 세종의 손녀인 천재나 아는 거란 의미로 윤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윤서도 그 정도는 알았다. 서로 다른 톱니 개수를 가진 바퀴가 각각 몇 바퀴를 돌아야 처음 맞물린 상태로 돌아오는가 문제는 수학 시험에 단골로 나오던 문제니까.
윤서가 모른다고 하자 희아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봐봐. 여기 이 작은 바퀴는 톱니가 24개야. 이 큰 바퀴는 톱니가 72개고. 몇 바퀴 돌아가는지 세어 봐봐.”
“음, 작은 바퀴가 세 바퀴 돌고, 큰 바퀴는 한 바퀴 돌면 만나네요.”
“안 돌리고도 알 수 있어.”
희아는 종이를 가져와 윤서가 가르쳐 준 대로 24와 72를 소인수분해 하고, 최소공배수를 구해보였다.
“24는 2의 세제곱 곱하기 3, 72는 2의 세제곱 곱하기 3의 제곱. 그래서 최소공배수가 72야. 큰 바퀴 한 바퀴 돈 것이랑 같지?”
“예, 그런데 이것이랑 바퀴의 톱니가 고장나는 것이랑은······!”
아, 진짜!
이 꼬마, 뭐지!
“최소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군요. 최소공배수가 크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거로군요!”
“응!”
이제야 알았냐는 듯 희아가 환하게, 찬란하게 웃었다.
“톱니가 부러지는 건 맞물려 돌아가는 다른 바퀴의 톱니 하나랑 안 맞아서잖아. 안 맞아서 자꾸 부딪치면 부러지니까 만나는 횟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오래 버틸 수 있는 거지. 이 경우 두 톱니 바퀴의 최소공배수가 크면 클수록 만나는 횟수가 적어지는 거야. 그럼 훨씬 덜 부러지는 거야.”
“와! 진짜! 누가 세종 손녀 아니랄까 봐.”
“응? 세종이, 누구야?”
“아니에요. 와, 자가! 이리 와 봐요.”
윤서는 뭘 들으면 절대 잊지 않는 희아의 머릿속에서 ‘세종’이란 단어를 지우기 위해 서둘러 두 팔을 쫙 벌렸다.
처음에 희아는 홍위가 윤서에게 안겨 다니는 걸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도 막상 안아주려고 하면 움츠리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편하게 앉기 위해서 윤서가 만든 커다란 쿠션에 홍위와 셋이 함께 기대 앉아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차츰 가까워졌고, 유 승휘가 쓴 이야기를 함께 읽을 땐 윤서의 옆구리에 붙어 눕는 것도 꺼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학을 배우면서부터 부쩍 안기길 좋아하는 꼬마 아가씨로 변했다.
윤서가 아이를 가진 걸 아는 희아는 조심스럽게 윤서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또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최소공배수가 크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자가가 말해봐요.”
“그건, 서로 다른 소수를 가지는 숫자로 하면 돼. 이를테면 3과 7을 인수로 가지는 숫자의 톱니바퀴, 그리고 5와 11을 인수로 가지는 숫자의 톱니바퀴. 그렇게 바퀴를 만들어서 돌아가게 하면 돼.”
“자가는 진짜 천재세요. 이따 아바마마 오시면 직접 설명드리세요. 그렇지 않아도 사나흘에 한번은 시계 수리하는 것이 큰일인데.”
“응!”
천재도 어른의 따스한 품과 칭찬이 필요하다는 걸 희아를 볼 때마다 실감한다. 희아는 수학과 수학 원리의 응용에서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지만 또한 그 성취를 윤서나 이향에게 자랑할 때도 큰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꼈다.
게다가 수학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그러하듯 희아는 음악에도 아주 빼어났다. 홍위가 부르던 올챙이 노래에서 칠음계를 알아내고, 칠음계를 이용해 새로운 곡조의 노래를 만드는 작업을 세종과 함께 사나흘에 한 번 장악원에 가서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전하께서 싱글벙글 웃으시며,
“칠음계에 맞춰 편경을 새로 깎는 중인데, 희아가 귀가 밝아서 아주 도움이 된다.”
칭찬하신 걸 보면 음감도 빼어난 모양이었다.
‘아 정말로 위대한 가계(家系)로다.’
윤서는 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우리 금똥이가 자가 닮았으면 좋겠어요. 세손 각하 닮아 밝고 씩씩해도 좋고요.”
“귀엽겠다, 금똥이. 나, 동생 크는 거 처음 보니까. 홍위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헤어졌으니까.”
마음을 열고 나서야 희아는 윤서에게 이따금 어머니 현덕 빈 이야기를 했다.
차가운 얼음 위에 창백하게 누워 있던 어머니가 무서워 울었다는 이야기, 죽음이 무엇인지 누구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조유례의 집에 보내져서, 백 밤 자면 궐에 돌아가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혼자 생각해 매일 밤 날짜를 세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려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나쁜 아이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까지.
희아는 윤서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아픔, 그리고 여전히 어머니가 간절히 그립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애도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봄이 오면 빈 마노라 능에 함께 가요. 저도 가서 인사드리고 싶어요.”
“응. 나도 어머니한테 가 보고 싶어.”
“예, 세자 저하도 함께.”
임신을 하고서야 윤서는 영혼을 이 세계로 보낸 19대 조상 현덕 왕후를 용서할 마음이 들었다.
윤서가 임신하자 이향은 온돌을 놓지 않아 춥다는 구실을 들어 비현각에서 처리하던 일을 다 싸 들고 윤서의 서재로 들어왔다.
전하와 함께 저녁 수라를 들고 돌아온 이향이 초저녁부터 윤서의 거처에 머물자, 윤서 거처에서 중비가 하는 맛난 저녁을 함께 먹는 홍위도 자선당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아밤마마도 안 계셔저, 아지랑 두리 있는 거 쓰쓸해.”
(아바마마도 안 계셔서, 아지랑 둘이 있는 거 쓸쓸해.)
그래서 홍위도 윤서의 침실에서 대청마루를 건너면 있는 서쪽 방에서 아지 이씨 부인과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밤이면 이향은 윤서의 책상에서 일을 하고, 윤서는 희아와 홍위와 함께 폭신한 쿠션에 누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중비가 구워온 개암이나 군밤을 까먹거나, 윤서 입덧 때문에 중비가 담은 동치미에 국수를 말아먹거나, 꿩고기 만두를 쪄 먹었다.
가족처럼.
진짜 가족처럼.
뜨끈한 구들에 몸을 데우면서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남편과, 천진함을 되찾아가는 영민한 아이들과 함께 속닥거리며 밤을 보내다 보면 불시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으면서 생겼던 마음의 공허가,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막막함이 따스하게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잃었던 공통의 아픔을 지닌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온기로 서로를 치유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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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희아, 네가 이걸 생각해 낸 것이야?”
이날 저녁, 최소공배수를 이용해서 바퀴의 톱니 개수를 정해 바퀴의 잦은 고장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희아가 설명했다.
낮에 윤서가 들은 설명을 그대로 들으면서 이향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 윤서와 희아를 번갈아 보았다.
윤서가 가르쳐 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서린 시선에 희아는 “흥, 아바마마 미워요.” 하고 골을 내었다.
“저는 그리 수학적인 감각이 뛰어나지 않아요. 우리 자가께서 수학과 과학 분야에 천재입니다.”
윤서가 말하자 윤서 옆구리에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벌써 눈꺼풀을 무겁게 깜빡이고 있던 홍위가 희아를 건너다 보며 “눈나, 천재!” 하고 엄지를 쑥 들어 보였다.
“정말 대단하구나, 희아야. 지금 추가로 여러 개의 괘종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톱니바퀴를 새로 제작하마.”
“아바마마도 권 승휘한테 수학, 배웠어요?”
“그럼. 우리 권 승휘가 희아 네게 가르쳐 준 걸 이 아비에게도 다 가르쳐주었다.”
“아! 그럼 아바마마, 괘종 시계 말고 다른 것도 만드는 거에요? 그 우리 처음에 조립한 줄로 맞물린 바퀴 같은 거요.”
“그래! 일간 군기시에 함께 가자. 아비가 희아가 만든 여러 가지 바퀴 조립품에서 영감을 얻어서 몇 개 새롭게 만들기 시작한 기물이 있다. 희아 네가 보고 지금처럼 조언을 해주면 줗겠구나.”
“호위도 가치 가요. 호위도 데려다 주데요.”
“그럼, 우리 홍위는 세손이니 당연히 함께 가야지.”
이향이 홍위 볼을 쓰다듬으며 말하는데 멀리서 술시 반각 (저녁 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자,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어린 아기씨들은 코 주무셔야 키가 쑥쑥 큰답니다.”
윤서는 희아와 홍위의 손을 잡고 대청마루로 나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유모 백씨와 아지 이씨 부인이 희아와 홍위를 데리고 침전으로 향했다.
다시 서재 안으로 들어오자, 이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쩐지 눈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윤서는 짐작이 가면서도 모르는 척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이 좋은 날, 어이 눈물이십니까.”
“모두 다, 가슴 벅차게 좋아서. 다 부인 덕이오.”
“전하와 저하의 천재성을 이어받은 것이지요. 어지간한 영재들 많이 보았는데, 희아를 보면 진정한 천재는 격이 다르구나, 이건 노력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경지가 아니구나, 실감이 나요.”
“그런 천재성보다 날 더 기쁘게 하는 건 때로 화를 낼 줄 아는 아이다운 모습이오. 천자문을 다 외우는 모습보단 혼자 자선당에서 자지 않겠다고 떼를 쓸 줄 아는 모습이, 더 귀하오. 진심으로, 당신이 와준 덕분에 저 아이들이 이렇게 밝게 자라 오래도록······.”
“···저하.”
자식은 사무치게 사랑스럽고 그래서 늘 애달픈 존재라는 걸 윤서도 이제 안다.
앞으로 많은 일들이 닥쳐오더라도 지금처럼 차곡차곡 쌓인 행복의 순간들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라는 것도.
“그런데 저하, 전하께 먼저 말씀드려 두어야 할 일이 있어요.”